2007 MEN OF THE YEAR

이상과 돌파력, 업적과 신사됨, 사색과 꽃다발…. <GQ KOREA>가 2007년을 닫으며 기억하려는 이름은 ‘해프닝’에 관련된 번지르한 인사가 아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을 해냈든, 거창 오리떼 버금가는 인파를 몰고다녔든, 다만 자신의 자리에 청결하게 머물렀든, 그들은 우리에게 ‘진심’ 을 전해준 남자들이다. 또한 박해미와 우영미와 장미란은 점입가경 올해의 여자다.

클럽 칼라 셔츠, 캐시미어 니트, 해링본 재킷, 진 팬츠는 모두 폴로. 컨버스 슈즈는 유재석 본인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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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

나무그늘에 섞인 햇빛 같다고 할까? 지금 유재석은 그렇게 아주 오래 머물 것 같다. 틀림없다.

이름 석 자만으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존재감인데, 유재석은 그런 건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오랜만에 매체의 인터뷰 자리에 나섰다. 너무 평범해서 할 얘기가 특별히 없다고, ‘울렁증’ 이 도지고 어색하고 쑥스러워 셔터 소리가 돌아가는 인터뷰라면 연신 배꼽 인사를 하며 고사하던 그가 ‘올해의 남자’ 를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연예인이 아니고 유명인이 아니며 스타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그랬다. 혹시 그는 자신을 향한 대중들의 깊고 진한 호감을 모르는 건 아닐까? “전 정말 잘 모르겠어요. 가끔 인터넷으로 보기만 해도 귀까지 빨개지는 칭찬 기사를 보면 감사하고 부끄러워요. 가끔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을 묻기도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참 곤란해요. 그저 저는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것 말고 거창한 어떤 게 없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즐겁게 일을 하고, 그것을 여러분이 좋아해주시고, 그 일을 길게 오래 하는 게 제 바람의 전부예요. 그걸 좀 멋지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어려워요.” 그리고 그는 노력의 진짜 의미에 대해 얘기했다.” 저는 노력이라는 단어의 뜻만 알고 있으면 노력을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나는 진짜 유명해지고 싶고, 웃기고 싶은데 왜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지?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함께 시작했지만 일찌감치 유명해진 김용만 씨, 남희석 씨, 김국진 씨, 박수홍 씨 같은 형들이 내가 정말 재미있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끌어주실거라 고대하면서 속상하고 있는 상태가 그게 노력하는 상태라고 생각한 거죠. 촬영하러 가면 세트가 사라져 있고, 열심히 찍었는데 아예 방송이 안 되는 날들이 이어졌어요. 어려서부터 웃긴다 재미있다 소리를 항상 들었던 제게는 정말 힘들었던 시간들이었어요.” 그는 필사적인 마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어의 뜻만 아는 노력이 아니라 하루 24시간을 온통 사람을 웃기는 일에 몰두하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의 진짜 노력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좋아하고 누구든 웃기는 사람으로 사는 유재석이 되었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유재석의 그 노력은 여전히 24시간 진행형이다.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배용준

한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사족 같았다. 허나, 2007년 그 이야기는 여전히 화수분이다.

2007년. 그는 천문학적인 주식을 가진 놀라운 사업가도 뒤로 하고, 어떤 잘못을 하고 돌아가도 언제나 두 팔 벌려 안아줄 것 같은 옛 연인의 그림자도 비껴 서서, 민족의 제왕이 되었다. 심장을 찔리고도 살아남는 신화적인 제왕이지만 그에게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도, 알을 깨고 나온 혁거세도 떠오르지 않는 담담하고 서정적이며 곧고 예민한 남자가 느껴졌다. 모든 여자들이 바라고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남자의 전형으로 그는 고구려를 품었다. 프로듀서 김종학은 배용준이 스스로 연구한 광개토대왕에 대한 작은 분석론을 내놓았을 때 연출가가 느끼는 배우에 대한 두터운 신망을 넘어서 그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이 솟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삼 년여를 바쳐 만든 <태왕사신기>는 40%를 넘나드는 시청률과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가 손가락 인대를 다쳤다는 것이 일본의 팬들에게는 우국의 감정까지 떠오르게 하는 염려로 달아올랐고 ‘담덕’ 의 따뜻한 카리스마에 녹아들던 시청자들도 화면 속 그의 손가락을 주시할 만큼 그에게 빠져들었다.

<태왕사신기> 속에서 배용준은 한류스타도, 거부도, 이상적 이미지를 가진 모델도, 사업가도 아니었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보이다가, 기대고 싶은 남자로 보이다가, 대통령 선거에라도 나왔으면 좋겠을 신망이 두터운 정치인으로 보였다. 유연하고 담대하며 똑똑하고 바른 그가 바로 배용준이었고 ‘담덕’ 이었다. 그는 폭풍 같은 스케줄 속에서도 자신에게 혹독하게 대했다. 운동을 게을리하지도, 평소에 읽고 있던 책을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따로 준비해 먹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고, 자기 몸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스태프들의 컨디션도 그만큼 챙겼다. 촬영장 안에서도 ‘담덕’ 같은 성정으로 보인 그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제왕이었다. 제왕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태왕사신기>가 끝나기 전에는 어떤 인터뷰도 응할 수 없다던 그가 올해의 남자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뜻 깊은 자리에 선정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여러 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세 문장이 판에 박힌 인사로 들리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안다. 그게 배용준의 힘이다.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지방시 by 쿤, 보타이는 샌프란시스코 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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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택

이 한국 남자는 올해 US오픈 16강에 진출했다.

함께 온 아내보다 한 걸음 앞서 걷는 이형택을 보고 가장답다고 생각했다. 어깨 위에 두 명의 아기,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낸 어머니, 대한민국 유일의 투어 선수로서의 고단함이 놓여 있을 텐데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즐겁게 살기 시작하면서 성적이 좋아졌어요.” 2000년에 이어 올해 US오픈 16강에 올랐을 때 그를 업고 1킬로미터는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도 감격적인지 폐부 깊은 곳에서 숨을 토해내듯 웃었다. 근 2~3년 사이 그에게서 집착하는 표정이 사라졌다.“ 여유가 생겼어요. 옛날엔 톱 랭커들하고 경기만 하면 그 선수들이 무적인 것처럼 보였단 말이에요. 어떻게 쳐도 다 받아낼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어이없는 실수를 많이 했죠. 지금은 누구랑 붙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눈매는 여전히 매섭다. US오픈 3차전 엔디 머레이(세계 랭킹 19위)와의 경기 땐 오차 없는 기계 같았다. 머레이의 움직임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는 공이 날아가는 곳으로 한 발짝 먼저 움직였다. 먼 곳에 있는 공을 치기 위해 라켓과 다리를 길게 내뻗는, 아, 그 질긴 움직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불필요한 동작이 줄이고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됐어요.” 그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둬 후배들의 도전 목표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에게서 살짝 등을 돌리며 “지금 저를 뛰게 하는 힘은 가족이에요”라고 말했다. 이형택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그의 아내는 “오빠가 예전에는 랭킹을 보면서 상당히 예민해했어요. 몸이 안 좋아서 대회에 못 나가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잖아요.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해줬죠.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는 거라고. 다행히 언젠가부터 여유를 갖게 됐어요. 이젠 거의 무신경할 정도예요” 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좋은 가족 맞다. 에디터/ 이우성

 

 

베스트, 핀턱 셔츠 모두 송지오 옴므, 페도라는 무글, 빗자루는 팀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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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웅

연극 <염쟁이 유씨>는 2년째 상연 중이다. 유순웅은 그 동안 6백여 구의 시신을 염했다.

입소문이 무서웠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개그프로그램 사이를 방황하는 대학로에서 <염쟁이 유씨>는 40대 관람객까지 불러들였다. “대학로판이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시종일관 웃고 즐기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죠.” 마당극 광대처럼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이고 한창 때의 남보원처럼 혼자 만담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연극이 관객에게 뭔가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전하잖아요. 실컷 웃고 집에 가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난 그런 거 안 만들어요.” <염쟁이 유씨>를 하기 전까지 그의 무대는 청주였다. 그곳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연극을 돈 벌기 위해서 가르치는 건 나에게도, 아이들한테도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았어요. 30대 중반 넘어서는 오로지 연기만 했어요.” 10년이 지나 그는 대학로에서 매일 저녁 자기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가 됐다. “지칠 때가 많아요. 티켓이 늘 팔려나가니까.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아파도, 링거 맞고 약 독하게 먹고….” 하긴 그가 염한 시체만도 줄잡아 6백 구가 넘는데 오죽 할까? 공연이 끝났을 때처럼 메이크업을 지우며 그가 말한다.” 내 연극이 예술이든 아니든 윤리교과서든 상관 안 해요. 그냥 사람들이 내 연극을 보고 어떤 생각이든 해봤으면 좋겠어요.” 연극 한 편을 보는 게 통속일 수는 있지만 한 편의 연극이 통속일 수는 없는 이유다. 객원 에디터/ 이혁진

 

 

그레이 후드 지프업은 리버틴 by 분더숍맨, 흰색 라운드 티셔츠는 제너럴 아이디어 by 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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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

<하얀 거탑>의 최도영.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성. 모두 좋았다. 하지만 그 출발점에 <태릉선수촌>의 이동경이 있었다.

올해의 남자에 등극했다. 내가 잘해서 이룩한 건 하나도 없다. <하얀거탑>도 <커피 프린스 1호점>도 모두 워낙 사랑받은 드라마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다. 다른 경우를 봐도 배우 혼자 잘나서 좋은 평가를 듣는 경우는 아예 없는 것 같다. 배우 이선균을 객관적으로 보면 어떤가?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빈 공간이 많다. 내가 좋은 연기를 알아보는 눈이 좋다. 진심이 느껴지는 연기는 바로 구분이 간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내 자신에게는 인색하게 되는 거 같다. <하얀 거탑>과 <커피 프린스 1호점>, 그리고 <태릉선수촌>을 관통하는 어떤 맥락이 당신을 ‘반짝 스타’ 로 여기지 않게 만든다. <태릉선수촌>의 이동경 역할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만들면서 너무 즐거웠고, 누군가에게 언제나 보여주고 싶은 드라마다. 내가 거기 참여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자랑스러운, 그런 작품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화 속의 이선균은 드라마의 그것만큼 빛나지 않는다. 영화에선 <태릉선수촌> 같은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까. 빨리 영화 쪽에서 뭔가 답을 찾고 싶은 갈망이 있다. 정말로. 이번에 개봉하는 <우리 동네>에서 지금까지 못해봤던 것들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우선 오만석과는 학교 동기고 정길영 감독님도 친한 선배라 마음이 편했다. 백 퍼센트 만족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진심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대관절 그 진심이라는 게 뭔가? 물론 연기는 다 거짓일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그 역할을 느끼고, 상대의 반응에 정직하게 리액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또 그렇게 해야 내가 편하다. 그러면서 차츰 연기가 나를 변화시키는 느낌이다. 본래 성격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배우 안 했으면 대단히 어두웠을 거다. 아무튼 지금도 그다지 외향적이지 않고, 복잡한 거 싫어하고, 사람 많은 거 꺼려하고, 뭐 그렇다. 나랑 다르면 안 보면 되지 뭐, 이렇게 빨리 결정 내리는 편이고. 그래서, 연기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날 능동적으로 만들고 적극적으로 부추긴다. 또 늘 고민하는 인간으로 남게 해준다. 매 작품마다 캐릭터를 고민하고 작품을 생각하고, 그런 과정이 참 힘든데 지나고 나면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그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허지웅

 

 

드레스셔츠, 카드프린트 브이넥 풀오버, 팬츠는 모두 샌프란시스코 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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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

배우, 클래식 해설가, 화가, 색소폰 연주자, 광고 대행사 대표…. 거기에 하나 더, 강석우는 올해 라디오 진행자가 됨으로써<여성시대>에 따뜻한 눈물을 보탰다.

청취자들이 당신을 부르는 호칭이 오빠 혹은 오라버니다. 무슨 씨도 그렇고 선생님도 애매하니까. 보통은 오빠 소릴 들으면 젊어 보인다고 좋아하는데, 나는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압박이 없어서인지 그 호칭을 즐기진 않는다. 영화 <겨울나그네>를 떠올린다 해도 당신은 오빠보다 그냥 강석우가 더 어울린다. 그때 당신은 어떤 청춘이었나. 나도 그땐 자막에 이름 올라가는 순서로 싸웠다. 젊은 배우에겐 그런 자존심도 필요하다. 치열함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그럼에도 당신은 늘 유순하고 신사적인 남자로 남아있다. 망가지는 연기를 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들이 좋은 것만 기억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랑 안 어울린다고 코믹 연기를 하지 말라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멜로 연기를 하는 것도 웃긴다. 선배들이 내가 젊었을 때 주인공을 흔쾌히 내주었듯 나도 그래야 한다. 내가 무슨 연기를 하든 배우 강석우의 이미지를 만드는 건 결국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평은 내 몫이 아니다. 너무 좋아도 걱정인가? 배우가 아무리 공인취급을 받는다 해도 캐릭터와 나를 같은 사람으로 봐주는 건 부담스럽다. 그런가하면 남편 강석우는 애처가로 유명하다. 일도 챙기고 가정도 챙기는 방법은 딱 하나다. 술을 안 마시면 된다. 그러면 저녁 6시부터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아내와 붙어 다닌다. 이제는 친구들이 먼저 찾는다. 그런 애처가라서 당신이 <여성시대>에 맞춤인지도 모른다. 청취자 대부분이 여자들일 테니까. 가끔은 우리 집안 얘기를 너무 솔직하게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지금까진 반응이 좋다. 오히려 왕자병이 있어서 귀엽다고도 한다. 그런 반응이 오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여성시대>의 진행자는 연기를 해선 장수할 수 없다. 지금 내 옆집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겸손한 척만 해서는 안 된다. 가끔 잘난 척을 하면 문자로 금세 반응이 온다. 하지만 그 반응이 안티가 아니라 이웃끼리 농담을 주고받는 느낌이라 따뜻하다. 당신의 2007년은 어떤 해였나? 이미 올초부터 내 인생에 2007년은 없다고 마음먹었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렇게 갈대처럼, 공인으로서 살았다. 오늘도 촬영하려고 이틀 동안 덜 먹고 왔다. 에디터/ 이정윤

 

 

화이트 턱시도 셔츠와 블루 체크 보타이는 란스미어, 그레이 베스트는 장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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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렬

허준, 숙종 혹은 금와왕, 지금은 내시 조치겸. 그의 연기는 산 같고 또한 강 같다.

<왕과 나>의 살인적 스케줄에 화가 나진 않나. 대본이 늦으면 아무래도 준비도 소홀하게 되고.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역시 드라마에서 보던 대인의 자세다. 실제 모습과 드라마 속 강직한 모습과 차이가 있나? 난 그냥 상당히 낙천적인 사람이다. 낭만을 좋아하고, 자연이 좋고, 와인과 시가를 즐기고, 여행을 무척 사랑하고, 플라잉 낚시도 흥미가 있고. 뭐 그렇다.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뭘 했을까? 당연히! 요리사가 됐을 거다. 먹는 것도 좋아하고 특히 만드는 걸 너무너무 좋아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레시피 보면 다들 놀란다니깐. 안 그래도 내년쯤에 꽤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쓸 생각인데,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국의 셰프들과 함께 요리를 만드는 내용이다. 사극이 좋은지 정극이 좋은지 물어보면 화낼 건가? 그건 청국장과 된장찌개 중에 뭐가 더 좋으냐는 질문으로 들린다. 난 둘 다 좋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향을 낼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쇼프로그램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해외의 시트콤이나 쇼프로그램을 봐라. 보고 나면 분명 얻는 게 있다. 하지만 한국의 쇼프로그램은 그저 웃음에만 치중돼 있다. 단순 오락만을 위한 방송이다. 그야말로 바보상자다. 정말 한탄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거기 나갈 이유가 없지 않나. 역시 당신은 강직한 게 맞다. 아니다.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름의 논리가 생긴 거다. 한 16년, 17년 전 이야기다. 하던 연극도 잘 안되고, 어머니가 차려주신 회사도 실패하고, 아무튼 정말 낭떠러지에 선 것 같은 위기가 닥쳤었다.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힘들었다. 그때 곤지암 암자에 들어가 5개월 동안 머물면서 인생과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걸 돌아봤다. 그때가 참 고비였던 것 같은데, 잘 넘어서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2007년은 당신 인생에 어떻게 남게 될까? 개인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때였는데 잘 이겨냈다는 느낌이다. 배우로서, 아주 조금은 진화한 것 같아 기쁘다. 뭔가 남기고 간, 그런 해로 기억될 거 같다. 에디터/ 허지웅

 

 

셔츠와 팬츠 모두 솔리드 옴므 우영미
셔츠와 팬츠 모두 솔리드 옴므 우영미

우영미

가게나 매장, 숍이나 스토어. 다 비슷한 거겠지만 우영미의 옷은 부티크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티크 우영미.

“재킷이 특히 예쁘고 마레에는 아주 우아한 부티크가 있어요.” 파리의 크레페집에서 옆 테이블의 젊은 남자가 ‘부티크’라는 발음을 했을 때 그 단어가 우영미와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가게나 숍, 매장이어서 안 될 이유도 없고 부티크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도 없지만, 듣는 순간 느낌의 문제다. 작고 해가 잘 들고 어디에도 없는 예쁜 셔츠가 있을 것 같은 ‘부티크’. 그는 누가 만든 건지 확실한 징표를 지닌 회색 코트(네크라인을 니트로 만든 회색 더블 브레스티드)를 입고 있었고, 우리끼리 한 얘기 중에서 한국어이기도 하고 프랑스말이기도 한 ‘우영미’ 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코트가 우영미라고 자랑했다. 그가 손님들로 북새통인 식당에 혼자 앉아서도 어색해하지 않던 것과 밖에 나가서야 담배를 피우던 것, 쓸데없이 끼어들지 않고 싱긋 웃으며 나간 것. 모두 마음에 들었다. 순간, 우영미 옷은 저런 남자들이 입는구나 생각했다. 기뻤다. 어떤 옷은 좋은 영화나 음악처럼 그걸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교감이 있다. 유럽 언론에서 그녀의 옷을 두고 얘기하는 ‘아 라 모드’ 라거나 ‘델리케이트’ 하고 ‘클린한’ 하는 식의 찬사보다 마레 우영미 숍에서 나오는 청결하고 침착한 파리 남자들이 더 정확한 ‘우영미’의 표현이다. 올 해 우영미는 매년 그랬듯이 1월과 6월에 파리 컬렉션을 치렀고 쇼는 언제나처럼 좋았다. ‘부티크 우영미’ 는 더 늘어났고 다른 언어로 채워진 잡지를 넘기다가 얼핏 차가운 표정의 우영미 사진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서는 솔리드 옴므의 20주년.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별로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약속 장소에 5분 먼저 도착하고, 10분 먼저 와있던 사람에게 “늦어서 미안하다” 고 말한다. 안부를 묻고 날씨를 얘기하는 엽서를 아주 가끔 쓴다. 크리스마스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초콜릿과 올리브를 선물하고 카드의 끝에는 꼭 ‘우영미 드림’ 이라고 적는다. 에디터/ 강지영

 

 

밍크코트는 진도모피, 드레스는 디올, 목걸이, 뱅글,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남자들의 구두는 미소페, 팬츠는 정욱준, 돌체앤가바나
밍크코트는 진도모피, 드레스는 디올, 목걸이, 뱅글,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남자들의 구두는 미소페, 팬츠는 정욱준, 돌체앤가바나

박해미

박해미를 지지한 건 여자들만이 아니다. 남자들도 아주, 많았다.

“전 무늬만 여자예요.” 듣고 있던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뮤지컬 <맘마미아> 주인공으로 물망에 올랐을 때 ‘뭔 여자가 그렇게 시끄러워’ 비아냥대며 반대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박 안 했다. “성질 죽이고 살아야 했다면, 전 벌써 죽었을걸요.” 그녀를 뽑은 건 라이선스 권한을 갖고 있는 영국인들이었다. 임성한 작가가 드라마 <하늘이시여>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땐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했다.” 무명이었지만, 기왕이면 괜찮은 역할 하고 싶었어요.” 임성한 작가는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만 했다. “악의 축입니다.” 그녀 대답은 “오오케이.” 였다. <거침 없이 하이킥>의 김병욱 프로듀서는 TV에서 친구 찾아 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낯선 여자가 하이 톤으로 “반갑다, 친구야” 를 외치는 걸 보았다. 곧 그녀를 섭외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지방 공연장으로 찾아가 명함을 주었는데 그녀 역시 그를 몰랐다“. 연출했던 프로그램을 쭉 말해주는 거예요. 그런데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죄송한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녀는 인터넷도 하지 않고(그렇게 복잡한 건 배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텔레비전도 거의 안보니까“. 쉬는 날엔 잠만 자요. 너무 피곤해서. <거침없이 하이킥> 출연진들이 종방 막바지로 가면서 대부분 링겔 맞아 가면서 했거든요. 덩치 큰 (정)준하 씨까지도요. 그래도 저만 안 맞고 버텼어요. 어릴 때 산삼을 삶아 먹었는지.” 이 정도면 남자들 앞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살 만하고, 여성 단체에서 홍보 대사로 위촉하려고 안달날 만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남편이 입을 열었다.” 당차 보이지만, 은근히 겁쟁이에요. 처음 이 사람 차에 탔을 땐데, 좁은 골목을 60km로 달리는 거예요. 무서웠죠. 속으로 ‘역시 겁 없는 여자구나’ 생각하는 사이, 자유로에 진입했어요. 근데 거기서도 쭉 60km로 가는 거 있죠. 더는 못 달려요.” “으하하하하!” 그녀가 악당 ‘검은 별’ 처럼 힘차게 웃었다.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았다. 한 시간쯤 전, 하루 종일 한 끼도 못 먹었다고 말할 때도 표정은 웃었고 목소리 톤은 높았다.” 낙천적인 기질을 타고났어요. 전 실패한 건 금방 잊어요. 늪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 올리는 거죠.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에 빨리 새로운 걸 찾는 게 낫잖아요.” <거침 없이 하이킥>의 나해미와 박해미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닮았다. 그 이미지가 너무 세서 이제 슬픈 표정을 지어도 보는 이들은 깔깔 웃을 것만 같다.” 본성인데 어쩌겠어요.” 에디터/ 이우성

 

 

박태환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미터 결승전은 시작에 불과했다. 박태환은 그 후로도 줄기차게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불쑥, 뭔가 솟아오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렇다. 아니, 도대체 저 아이가 저기서 뭐 하고 있지, 의아한 것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물 빛 포효 뒤로 옆 라인의 오우사마 멜로우리와, 다시 그 옆 라인 그랜트 해켓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보인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저들과 노는 물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50미터를 앞두고 턴할 때까지도, 나름의 선전에만 박수칠 참이었다. 그 아이는 4위였다. 그때 불쑥 뭔가 솟아올랐다. 처음엔 저러다 금세 가라앉을 줄 알았다. 한 명 따라 잡고 다시 한 명 더 따라잡을 때도. 그런데 어, 어, 한 명을 더 따라 잡고 더 이상 따라 잡을 게 없을 때가 돼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 터치패드에 머리를 박는대도 실격은 아니니까. 달려라, 달려! 어떤 기억들이 물결에 씻겨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오기 때문인지, 한풀이라도 하는 건지, 저 시위는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가 아니라 나 지금 열 받았으니까 말리지 마에 가깝다. 설마 설마 했던 사람들 다 보세요. 내가 이만큼 달릴 수 있다고요. 기어코 물 속에서 고개를 든다. 양손으로 허공을 흔들며 포효한다. 잘 봐라, 내가 코리아의 박태환이다. 이내 오른손을 불끈 쥐며 입을 굳게 다문다. 모든 언론이 반신반의했지만, 그 자신만은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는 표정, 그리고 그걸 몸으로 확인했을 때의 깊은 확신. 그러니까, 모든 건 서막에 불과했다. 에디터/ 이우성

 

 

장미란

그녀의 기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기뻐했다. 그녀가 들어올린 건 비단 130kg이 넘는 바벨만이 아니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세 차례나 거머쥔 건 당신과 유도의 전기영뿐이에요. 몰랐어요. 세 번이나 우승했다는 것에 대해선 자부심을 느껴요. 종합대회에서는 세 차례나 미끄러졌죠. 부산아시안게임, 아테네올림픽, 도하아시안게임 모두 중국선수에게 밀렸어요. 종합대회에 약하다, 는 기사가 가끔 나와요. 보다 보면, 내가 그런가? 의문이 생겨요. 언론이 선수 사기를 북돋는 게 아니라 떨어뜨린다는 느낌도 조금 들고요. 라이벌인 중국의 무솽솽도 당신 못지않게 상승세를 타고 있어요. 게다가 두 살이나 어리죠. 올림픽이 홈에서 열리는 만큼 우승에 대한 열망이 클 텐데, 대비책이 있나요? 어떤 선수를 이겨야 금메달을 딴다기보단, 제 기록을 깨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바벨을 들어올리고 있는 짧은 순간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르나요? 할 수 있다는 말. 성공하고, 바닥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하나님, 이런 영광을 얻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해요. 역도는 여자가 하기엔 유난히 고된 운동이지 않아요? 부모님이 시켜서 억지로 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안 했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130kg짜리 바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들어올리기 힘든 삶의 짐이 당신에게도 있겠죠? 이상하게도 없어요. 다른 이십대 여자들처럼 다이어트도 하고 미팅도 하고, 조금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진 않아요? 이루기 위해선 포기하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무솽솽 있잖아요. 무섭지 않아요? 이름도 생김새도. 전 귀여운데. 동생이라 그런가. 아테네에서 금메달 딴 선수는 이름이 탕콩홍이었어요. 다들, 가까이서 가만히 보면 얼마나 깜찍한 지 몰라요. 에디터/ 이우성

 

김주혁

베스트 드레서는 어떤 옷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어야 하는가를 안다. 김주혁은 그런 남자다.

사진 속 김주혁이 입고 있는 옷. 과하지 않게 쪼글거리는 캐멀 브라운색 가죽 블루종, 밑단이 보여야 서운하지 않은 니트 카디건, 만지면 백묵 가루가 묻을 것처럼 희고도 흰 셔츠, 평범한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워싱과 포켓의 위치가 딱 적당한 회색 진 팬츠, 한동안 많이 신어서 낡은 프레드 페리 운동화는 모두 김주혁의 것이다. 옷 잘 입는다는 이유로 김주혁을 올해의 남자 목록에 올렸으니, 누군가 옷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그가 직접 준비해야 하는 게 당연하단 생각을 했고, 김주혁의 생각도 그랬다. 그가 어떤 옷을 입을진 몰랐지만, 그가 입는 옷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행사장에서, 소박한 라면 집에서, 단골 멀티숍에서 김주혁을 본 사람이라면 그런 확신은 저절로 생긴다. 김주혁은 어떤 옷을 입는가 보다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 지 아는 남자다. 팬츠 길이, 네크라인의 패임 정도, 소매 길이처럼 세부에 까다롭다. 사이즈도 그렇다. 옷마다 사이즈를 다르게 입는다. 같은 바지라도 핏에 따라 30을 입을 수도 있고, 32를 입을 수도 있다는 거다. 어려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김주혁이 옷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단순하다. 옷이란 오래 입을 수 있고, 몸에 맞게 입어야 하며 치렁치렁, 덕지덕지 식의 요란한 건 질색한다. 요즘 패션 잡지에 대한 불만도 있다. 지금 이렇게 입고 어딜 가냐는 룩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게 김주혁의 생각이다. 따라할 수 있는 스타일링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의 생각과 같았다. 가장 최근 그를 본 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스타일리스트가 준비한 란스미어의 턱시도(인터뷰 날도 그 옷이 너무 컸다며 아쉬워했다)를 제외하곤 모두 그의 옷이었다. 회색 톰 브라운 수트(가장 최근에 산 옷이다)와 몽크 스트랩을 신었고, 닐 바렛(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다) 수트와 셔츠를 입었다. 넘치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다. 김주혁이 지금 당장 사고 싶은 건 레이스업 부츠다. 군화처럼 투박한 게 아니라 발에 꼭 맞는 날씬하고 납작한 검정 부츠인데, 길이는 종아리 정도고 검정 팬츠를 부츠 안에 넣어서 입을 생각이다. 부츠 하나를 고르는 데 부연 설명이 이렇게 길다. 그땐 생각이 안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부츠는 버버리 프로섬에 있다. 에디터/ 박나나

 

 

이창동

이창동의 <밀양>은 시간이 흘러 나이테가 두세 바퀴 겹쳐질 때쯤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평가를 받을 영화다.

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이창동 감독은 무척 여유로워 보였다. 한국에선 연일 <밀양>의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가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파에 무심하게 대응하는 표정이다. 상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걸까? 그래도 여긴 칸인데? 눈가의 깊은 주름을 두세 번 접어보이며 그가 웃음을 지었다.” 상을 받으면 좋은 거고, 못 받아도 좋은 거고. 평생 한 번 밟아볼까 말까한 레드 카펫이잖아. 칸영화제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영화제 본연의 정신에 충실한 축제라는 생각도 하지 않아. 그보다는 장사판이지. 어쨌든 레드 카펫 위에 서있으니까 두근두근하긴 하더라. 사람 정신을 쏙 빼놔.” 칸영화제는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선사했다.크리스티앙 문주의 놀라운 신작이 황금종려상을 가져갔다. 하지만 프랑스의 이 유서 깊은 영화제가 그야말로 순수하게 작품의 깊이와 파고만을 두고 평가를 매기는 곳이었다면, <밀양>은 단연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작품이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하늘에서 시작해 우리가 사는 땅 위에서 맺어지는 이야기” 라고 설명했다. 그의 영화 가운데 가장 따라가기 쉬우면서 동시에 어떤 면에선 가장 불편한 영화 <밀양>을 설명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긴 힘들다. <밀양>이 다루는 에피소드들은 하늘의 몫을 땅의 몫으로 돌리고, 신의 권위를 땅의 권리로 바꾼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거대담론의 존재의미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아니다. 그 존재의 이유마저 두 발을 디딘 땅 위에서 찾고 있는 거다. 여태까지 이만큼 깊고 너른 시선으로, 뜬구름 잡는 일 없이 삶의 대지에 철썩 달라붙어 구원을 이야기한 영화는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도 많지 않다. 이창동은, 위대한 에고를 가진 감독이다. 에디터/ 허지웅

 

 

셔츠는 카반 드 주카, 티셔츠는 후세인 샬라얀 , 팬츠는 코스믹 원더, 모두 에크루, 슈즈는 벵시몽 by 홀 페이퍼가든l, 뱅글은 티피 앤 매튜
셔츠는 카반 드 주카, 티셔츠는 후세인 샬라얀 , 팬츠는 코스믹 원더, 모두 에크루, 슈즈는 벵시몽 by 홀 페이퍼가든l, 뱅글은 티피 앤 매튜

임동민

올해 세 번의 독주회를 연 이 젊은 피아니스트는 그저 치고 싶은 대로 쳤을 뿐이라고 말한다.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 비오티 콩쿠르, 부조니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체코 프라하의 봄 콩쿠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무슨 콩쿠르를 그렇게 많이 나갔나? 나도 모르겠다(웃음). 경험 삼아 나갔는데 어느새 그렇게 많아졌다. 하지만 나가서 좋은 건 하나도 없다. 준비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그래도 입상을 여러 번 했으니 모든 걸 잊게 해주지 않았을까? 그건 그렇다. 이제 나이가 찼으니 더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올해 유난히 많은 독주회를 했다. 당신에겐 협연과 독주가 어떻게 다른가? 어차피 부담스러운 건 똑같다. 당신처럼 ‘젊은 피아니스트’ 인 김선욱은, 그 나라 작곡가의 음악을 배울 땐 그 나라 언어를 알아야 곡 해석을 잘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공부하니 베토벤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나? 그런 건 없다. 난 치고 싶은 곡을 치고 싶은 대로 친다. 그게 당신이 ‘천재’ 소리를 듣는 이유일까? 세 살 때 피아노 의자에 앉은 모차르트보다 당신은 8년이나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데 대한 딜레마는 없나? 없다. 피아노는 일찍 시작했다고 더 잘 치고 늦게 시작했다고 못 치는 게 아닌 것 같다. 재능도 있어야 되고 좋은 스승도 만나야 되고 노력도 필요하다. 시간이 다는 아니다. 과연 ‘천재’ 소리가 무색하지 않게, 연습도 별로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중요한 건 머리다. 어떻게 곡을 연주할지 알면 오래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난 연습을 많이 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 그저 현재에 충실할 뿐이다. 어렸을 땐 참 꿈이 많았지만 피아노만 치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피아노가 어렵게 느껴진다. 에디터/ 이정윤

 

이적

불이 꺼지고 막이 내려도, 이적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소극장은 온실 같았다. 어쿠스틱 악기가 내는 식물성의 음향에 어딘지 녹이 슬어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가 노랠 불렀다. 관객들은 환호했지만 괴성을 지르진 않았다. 방방 뛰지도 않았다. 노래가 시작되면 노랠 들었고 노래가 끝나면 백합을 던지듯 박수를 쳤다. 세 번째 앨범을 내고 그가 주력한 건 소박한 구성의 소극장 공연이었다. 총 24번의 공연 동안 만 명 넘는 관객이 찾아왔다. 쇼가 아닌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도 티켓만 남지는 않았다. 공연마다 이적이 준비한 선물이 있었으니까. 첫 번째 공연에서는 수첩이었고 앙코르 공연에서는 와인색 봉투에 담긴 사진 엽서였다. 거기엔 어떤 정중함이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노래와 그 노래를 듣는 사람 모두에 대한 존중과 진심이 있었다. 그건 단지 좋은 노래를 만들고 녹음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토크쇼에 나와 개인기를 보여주고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털어 놓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의 앨범보다 공연소식이 더 반가웠던 것도 그래서였다. 많은 뮤지션들이 무인도를 떠나듯 무대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남았다. 노래를 불렀다. 다행이다. 객원 에디터/ 이혁진

 

 

황석영

그는 장막 뒤의 원로가 아니다. 소설 <바리데기>는 그 명료한 증거다.

그는 소설쓰기가 천직이라고 말한다. “젊었을 때는 글 쓰다 안되면 괜히 나가서 술 처먹고 자극적인 일이 없나 찾아보고는 했지요. 허나 언제까지 그럴 거야. 직업작가는 일단 궁뎅이 붙이고 앉아서 있으면, 자기가 기획하고 있던 것이 나와야 된단 말이에요.” 소설을 쓰는 그의 태도에는 물리적인 단순함이 있다. 그는 소설가가 작가연(然)하며 영감이 어떻고 고통이 어떻다 말하는 게 다 소음 같다고 했다. 차라리 시간이라면 모를까. “직업작가로 올해 45년쨉니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니까 한 20년 하면 달인 소리 듣던데, 지금쯤이면 나도 글 쓰는 기술자로서는 달인 경지에 오른 게 아닌가요?” 그러니 관념과 감정을 받아 쓰기하고 니체와 바흐 얘기로 소설을 채우는 건 그에게 ‘서투른 방법’ 일 뿐이다.” 이문열이 놀릴 때 내가 만날 그래, ‘야 임마, 넌 목소리는 그렇게 커가지고, 아침에 읽은 책을 버스간에 떠드는 놈이 딱 너더라’ , ‘니 니체읽어봤나? 짜라투스트라 그거 쥑이드라’ 해서 누군가 보면 그게 넌 거라.” 이어지는 호탕한 웃음. 단박에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구구절절 복잡해지면, 그가 아니다. 이를테면 그와 연대하는 일본작가는 오에 겐자부로지 츠지 히토나리는 아닌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등산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자꾸 후배들이 산에 가자고 해서 얼마 전에 갔는데, 산이 참 좋두만, 뭐 그런 것들을 해야겠어.” 책이 20만 부 넘게 팔려 나가 좋겠다는 얘기에도 그저 “예” 할 뿐인 그는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우고 다시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댕겼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어, 담배도 끊고.” 객원 에디터/ 이혁진

 

 

엄홍길

그는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 산악인’ 이라는 굵직한 수식보다 ‘대장’ 이라는 믿음직한 단어 하나를 더 좋아한다.

로체사르 정상에서 “아무 느낌이 없다. 감정의 노출조차 사치다” 라고 했다. 산을 내려올 때서야 어떤 지독한 감회가 드는 걸까? 정상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극히 짧은 순간이다. 올라갈 때야 목표의식에 심취돼서 죽는 것에 대한 강박도 없지만 막상 결과를 이루고 나면 머릿속으로 올라온 길이 되짚어진다. 그리고 몸이 덜덜 떨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쉽게 ‘산이 뭐길래’ 라고 말할 태세다.
산은 내 자신이기도 하고 내 스승이기도 하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산을 오르면 내려올 때 해답이 떠오른다. 산을 오르내리는 건 체력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지구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신에게 그 근원은 무엇인가?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생각나는 건 가족들과 히말라야에서 죽은 동료들이다. 그 이름들을 되뇌면서 버틴다. 히말라야 16좌 산맥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산이 있다면 어디인가? 따뜻하게든 징글징글하게든. 동료들이 희생된 안나푸르나다. 시련, 고통, 실패, 좌절, 죽음을 보여준 산이기 때문이다. 네 번을 도전했다 실패하고 다섯 번째 성공해 정복한 산이라 애착도 크다. 히말라야에 오른 당신에게, 우리나라의 산은 어떤 의미로 당신을 비추나? 우리나라 산같이 오밀조밀하고 계절마다 변하는 경우도 드물다. 스위스나 캐나다의 산은 높기는 해도 눈, 바위, 얼음으로 단순하게 이뤄져 있지만 우리나라는 일 년 동안 늘 변한다. 색깔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산에 자주 가나? 서울에 있으면 주말마다 도봉산을 오른다. 오늘까지 당신이 세워온 그 기록들이 언제 어떻게 깨지길 원하나? 기록은 빨리 깨지라고 있는 거다. 어서 후배들이 다른 기록을 세워줬으면 한다. 에디터/ 이정윤

국가대표 남자 핸드볼 팀

핸드볼 코트 위에서, 심판의 휘슬 소리에 섞여 스포츠 정신은 사라졌다. 속수무책이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핸드볼 하는 애들한테 희망이 있다면 메달 따서 군대 면제받고 연금 타는 거예요. 근데 그런 희망을 판정으로 짓밟아 버렸으니. 선수들한테 감독으로서 제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김태훈 감독이 말했다. 국가대표 핸드볼 팀을 만나러 태릉 선수촌에 갔다가 당혹스러움을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 윤경신이나 조치효 같은 해외파 선수들이 소속팀으로 돌아가 있는 터라 전체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정체 모를 황량함은 뭐라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핸드볼이 비인기 스포츠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들은 하나같이 가냘퍼 보였다. 축구나 야구 선수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남자 핸드볼 팀은 지난 20년간 아시아 맹주로 군림해왔다. 세계 4강에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지난해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6연패에 도전했던 그들을 막은 건 실력이 아니라 판정이었다. 카타르에게 져 34위전으로 밀렸다. 그런 경기는 처음 봤다. 올해 9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 지역 예선 첫 경기는 더 놀라웠다. 상대는 아시아핸드볼연맹 회장의 나라 쿠웨이트였다. 그 경기는 차라리 폭력 같았다. 심판은 우리 선수가 넘어져도 휘슬을 불고 심지어는 노마크에 골을 넣어도 휘슬을 불었다. 관중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도 있었다. 김태훈 감독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제핸드볼연맹이 경기 전 보낸 공문에는 심판이 독일인으로 배정돼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핸드볼연맹이 당일 아침 심판을 바꿨다. 주최국인 일본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묵인했다. 아시아권에서 벌어지는 핸드볼 대회는 중동권 나라들의 편파판정으로 스포츠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지속적으로 항의를 해왔지만 공허했다.

아시아핸드볼연맹 대의원 중 한국인은 한 명도 없고, 대부분 중동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올림픽 직행의 희망은 경기 시작 5분 만에 깨졌다. “핸드볼 말고 축구 할 걸그랬다니까요.”사진을 찍는 도중 누군가 말했다. 누구의 말이었는지 따져 묻진 않았다. 국가대표 핸드볼 팀은 쿠웨이트 이후 나머지 네 경기에서 전승했다. 도하에서 발목을 잡았던 카타르를 상대로는 20점 차 대승을 거뒀다. 올림픽 직행 티켓은 놓쳤지만, 다행히 내년 5월 열릴 국제핸드볼연맹 자체 예선 출전권을 확보했다. 모두 네 나라가 붙는데 그 중 두 나라가 올핌픽 티켓을 갖게 된다. “꼭 (올핌픽에) 갈 겁니다. 가서 쿠웨이트랑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진짜 실력 차를 느끼게 해줘야죠. 세계 대회에선 자기들도 그런 짓 못할테니.” 올림픽 정신이 진정 존재한다면, 이들의 바람에 응답해야 한다. 윤경신의 뒤를 이어 한국 남자 핸드볼의 공격수 계보를 이을 기대주 정수영은 말했다. “운동하다가 문득, 이렇게 한다고 달라질까, 어차피 판정 때문에 또 지는 거 아닐까, 생각하다가, 감독님 말씀처럼 이번엔 정말 달라지겠지, 믿고 다시 운동 하다가….” 이들이 숭고한 이유는 불확실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비상의 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에디터/ 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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