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토너 안성기

안성기는 51년 동안 영화 배우였다.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의 부침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며 그는 홀로 자리를 지켰다.

턱시도 수트와 셔츠, 보타이는 모두 루이비통
턱시도 수트와 셔츠, 보타이는 모두 루이비통

신체 사이즈가 30년 동안 똑같았다던데. 그게 가능한 건가. 매일 운동을 하니까. 오후에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가슴 운동과 어깨 운동을 주로 한다. 거의 거르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나. 배우니까. 배우한테는 몸이 도구니까. 내가 영어는 참 안 는다. 필요할 때만 하고 또 잊어버리고 그런다. 하지만 운동은 일의 연장이다. 내 몸을 잘 관리하면 연기의 폭도 그만큼 늘어나지.

안성기 하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떠올리는 후배 배우들이 많다. 그게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천성이다. 성실한 건. 대신 내 나름대로는 잃는 게 있다. 그걸 나도 안다.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때론 망가지지도 못한다. 하지만 살아보니까 모든 걸 다 얻을 수는 없더라.

그래도 인간 안성기도 아주 가끔은 일탈을 꿈꾸지 않나? 망가지고 싶은 욕망이야 있지. 영화에서도 그렇고, 실제 삶에서도 가끔 일탈을 꿈꾼다. 다른 안성기가 된달까. 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짧고 그 사람의 이미지는 하나다. 사람들 뇌리에 박힌 안성기도 하나다. 이제 와서 달라질 수 없다.

설경구 같은 배우는 망가져야 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인생의 쓴 맛을 봐야 한다는 거다. 설경구 같은 배우만 있어봐. 정신없지. 또 나 같은 배우만 있어봐. 지루하지. 사람한텐 주어진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다. 그 길을 부드럽고 성실하게 살면 된다.

역할에서 악독해질 수도 있다. 난 악역을 한다고 해도 너무 나쁜 건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이 안성기한테 기대하는 느낌이란 게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다.

50년을 연기해왔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안성기를 지니고 있을 지경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제약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50년 동안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배고픔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욕심이 없어서? 나한테 들어온 시나리오 가운데 정말 두 번 만나기 힘든 작품들만 있는 건 아니다. 미덕이 있는 시나리오라면 난 그대로 좋은 거다.

걸작을 기다린 적이 없다? 그런 적 없다. 그러면 너무 힘들다. 나한테 중요한 건 어떤 작품을 하느냐가 아니다. 영화를 하면서 관객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훨씬 의미가 있다. 나중에 내 영화들 가운데 어떤 작품이 남겨질까 이런 생각 안 한다. 그냥 배우로 한평생 살다가 가는 거다.

어떤 사람은 희대의 걸작을 남기고자 한다. 곽경택 감독 같은 이는 영화가 승부라고 말한다. 내 삶은 마라톤이다. 100미터는 육상의 꽃이라지만, 난 장거리 달리기를 선택한 인생인 거다.

계속 달리고 싶다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반세기 동안 어떻게 계속 배가 고플 수 있는 건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욕망을 만든다. 난 지금도 어린 후배 감독들한테 칭찬을 받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류승완 감독하고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찍을 때였다. 내가 이런 애드립을 쳤다“. 장풍을 배우는 값은 장풍크기에 따라 다르지.”류승완 감독이 그렇게 좋아하더라. 그런 사소한 맛이 사는 맛이고 연기하는 맛이다. 몸도 건강해야지. 다행히도 난 현장에 있는 게 너무 좋다. 몸이 건강하니까 근질근질해서 현장에 나가고 싶어서 미치는 거다.

안성기의 인생은 별 곡절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인가. 그런데 그 말이 맞다. 나는 뜨뜻미지근하게 살았다고 할까. 생각해 보면 성질 내야 할 때 안내거나 못 내고 살았다. 한국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내 나이 또래로 라이벌이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그냥 평이하고 조용하게, 그렇게 왔다.

화도 내지 않는다고? 내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화를 낼 때를 자꾸 놓친다. 나중에 집에 와서 가만 생각해 보면 화낼 일인데 그땐 잘 모른다.

그런 성격이 연기에도 배어 나온다. 안성기의 연기는 건조하다. 그렇지. 난 내재되고 안으로 쌓이는 게 좋다.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들을 보면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다. 밖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게 천성적으로 싫다. 폭발하기보단 잔잔하게 안으로 숨을 죽이는 연기가 더 좋다.

50년 동안 여러 감독들을 만났다. 멀리는 이장호 감독부터 배창호, 이명세, 류승완까지. 임권택 감독부터였다.

때론 그들이 불쌍하지 않나? 수많은 감독들의 부침을 곁에서 지켜봤으니까. 그들의 전성기와 쇠락기까지 말이다. 감독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배우는 자기 연기 하고 좀 쉬면 된다. 감독은 영화의 모든 걸 책임지고 결과까지도 영원히 책임져야 한다. 누가 나보고도 감독을 해보라고 하는데 늘 주저하게 된다. 제작은 관심이 없지만 연출은 솔직히 좀 해보고도 싶다. 하지만 두렵다. 얼마 전에 배창호 감독하고 같이 용평에 갔었다.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지. 정말, 배창호 감독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단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그를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변해가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지쳐가는 걸 보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안성기는 그 시대를 온전히 관통해낸 유일무이한 배우다. 누가 그러더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신나게 영화를 하더니 아직도 신나게 영화를 하고 있다고.

더 못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던 때는 없었나?  IMF 때 위기감이 들었다. 영화가 너무 안 만들어져서 영화진흥공사의 도움을 받아 <진실게임> 같은 영화에 출연했었다. 그때 이대로 가다간 더는 영화를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젊었을 땐 이런 뻔뻔한 생각을 했었다. 수십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내가 할 역할이 한두 편은 없겠나. 지금까지 늘 한두 편은 있었다. 그게 없어질 때가 연기를 그만두는 시점일 거다. 그런데 아직 한국에 선 그렇게까지 연기 인생을 살다 간 유례가 없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내 동년배는 다들 회사에서도 정년퇴임을 했으니까.

<마이 뉴 파트너>를 보면서 생각했다. <투캅스>의 형사한테 장성한 아들이 생겼달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투캅스>의 인물보단 더 심각하고 아픔이 있는 사람이다. 아내도 일찍 죽었고 아들한테도 외면당하거든.

<현의 노래>의 우륵은 안성기를 위한 역할이다. 평생 음악을 위해 산 우륵과 평생 영화를 위해 산 안성기가 겹친다. <현의 노래>는 진지하게 감동을 주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 주경중 감독한테도 얘기했다. 시나리오 중간에 코믹한 부분이 있었는데 빼자고 했다. 그런데 <현의 노래>는 투자가 아직 결정이 안 됐다. 4월쯤 촬영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걱정이다.

정말 영화에 평생을 바쳤다. 난 정말 영화가 좋다. 드라마는 좀 무섭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당된 촬영 분량을 소화해내야만 하는 환경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영화는 서로를 배려한다. 기다려준다. NG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직도 행복하다.

배려구나. 어릴 때 그걸 알았다. 중학교 때 아역 은퇴를 했다가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영화인들의 부침이 피부로 느껴졌다. 허망함 같은 걸 일찍 느꼈다. 그래서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삶에 굴곡이 없었던 건 어렸을 때부터 정답을 알아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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