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박정자와 밤 열두 시에 한 인터뷰

2008.04.14GQ

그는 “기름이 다 빠진, 파김치 상태의 인터뷰도 좋지 않겠어? 절대로 이런 인터뷰는 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말이야”라고 말했다.

네 번째 이다. 당신은 다짐하듯 공언했다“. 여든살이되는 그 날까지 두해에 한 번씩 이 공연을 하는 것이 나의 아름다운 프로젝트”라고.
2003년에 처음 이 공연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박정자의 아름다운 프로젝트라고. 예순 세 살에 처음 가진 꿈이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꿈꾼다거나 바라고 희망하는 일을 정해놓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꿈은 정말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왜 이었나? 왜‘모드’라는 인물이었나?
내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고, 배역을 통해서 내 연극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그래 저 삶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훨씬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심은 있되 나이를 먹으면서 비우는, 어쩔 수 없이 비울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아직도 나야 할 철이 있다. 내가 광산도 아닌데 왜 철이 그렇게 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80을 기다린다. 나는 지금 사는 내 나이가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작년도 아니고 어제도 아니다. 내가 충분히 살았으니까 나는 오늘이 매일 예쁘다. 어떤 때 내가 스탠바이를 하고 사다리를 잡고 힘을 주는 순간, 80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최면을 건다. 무대 뒤에서 정말 많은 기도를 한다. 80이 되었을 때, 주름도 생기고 다리에 힘도 없고 그렇겠지만 늙어가는 것에 한이 없다. 화장품이나 샴푸를 쓸 때 반 이상 없어지기 시작하면 빨리 그걸 쓰고 싶어진다. 밑에 조금 남으면 얼른 많이 따라서 쓰고 싶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쓰고 비워내야 새 것으로 할 수 있으니까. 2년에 한번씩, 연극으로 했다가 이번엔 뮤지컬로 바꿨다. 내가 80이 되었을 때는 모드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순 셋에는 열 일곱 살 차이, 지금은 열 세 살 차이가 나는 모드가 되었다. 4년간 수긍이 더 가는 부분이 생겼나?
조금씩 있다. 상대역이 늘 바뀌니까 나만 80으로 갈 뿐 스태프도 바뀐다. 19를 새롭게 만나는 기쁨이나 흥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도 헤롤드와 아주 멋진키스를 했다. 역대 헤롤드가 모두 그랬지만 지금의 헤롤드는 정말 순수하다. 내가 따라가게 된다. 뮤지컬로 하니까 내가 그를 더 바라보게 된다. 노래할 때, 그 무대 위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젊음은 순수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기어리고 불안정한 속성도 있지 않나?
내가 만난 헤롤드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들 겸손했다. 연극배우들은 특히 겸손하다. 귀 기울이고 예의바르고. 그래서 연극이 기초 예술이다. 나는 내 상대역이었던 헤롤드들이 연극, 뮤지컬,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가서 텔레비전, 영화 등 큰 바다를 만나 헤엄쳤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다. 그런 가능성들을 다 가지고 있는 배우들이다.

오디션을 볼 때, 헤롤드를 선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언가?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때 안 묻어야 한다. 4년 전엔 비를 생각했었다. 박진영 씨와 통화도 했다. 다른 드라마가 잡혀있어 그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19만 보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젊은 그 친구들이 바쁘거나 회사에 소속이 되어 있어서 연극 무대에 오기가 힘들다. 회사는 여기 저기 출연을 해야 그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사회의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라 논리를 싫어하고 거리가 멀다.

모드는 관조적이고 지혜롭고 아름답지만 그렇게 죽는 건 속상했다. 더 살아가지 않기로 결정한 게.
죽는 건 포기하는 게 아니다. 죽음이 뭐 그리 이상한가? 놀라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다. 한 발을 내딛는 거다.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있어서 정말 모드가 부러운 건, 죽음을‘선택’했다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 내가 죽을 때 그렇게 슬퍼해줄 사람이 있을까? 땀,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얘기할 때, 그 때는 내 영혼도 다 그에게 주고 싶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다. 다 주고 가고 싶을 정도로. 내가 죽을 때 내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까?

너무 많을 것이다. 십여 명의 헤롤드가 지킬 것이다. 당신은 모드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동화는 되더라도 수긍이 안 가는 건 없나?
없다. 내가 왜 지금 이 얘기를 하나 싶은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넌 정말 모드를 닮아가고 있구나, 모드하고 똑같아요!” 그럴 때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거부감이 하나도 안 든다.

당신은 배우만 잘하는 사람이다. 지금 어느 순간, 배우를 그만하고 인간 누구로 돌아가 자연인으로 자신을 누리다가 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끔 윤석화와 손숙이 그런 얘기를 한다. 내가 펄쩍 뛰고 막 야단친다. 내 이기심이다. 내가 얼마나 외롭겠나. 내 라이벌들이 사라지면. 작년에 많이 힘들었던 윤석화는 요즘 홍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 전쟁터에서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전우니까.

그들이 그만두면 안 된다는 논리는 무엇인가?
연극배우로 살 때 존재감이 있는 거다. 연극을 하면서 얻은 것, 그건 부도덕하다. 그건 아니다. 아예 시시했으면 괜찮다. 용서할 수 있다. 명성이 있는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무대가 지긋지긋한 적이 없었나?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공연을 하면서 완전히 몸을 바쳤을 때, 진이 다 빠져나갈 때 난 여기서 쓰러질지도 몰라,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행복하겠지? 하는 거다. 낮 공연 할 때 저녁 공연을 위해 남겨두지 않는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다 쏟아붓는다. 작년에 <신의 아그네스>하면서 그 상처가 너무 컸다. 끝날 때까지 너무 괴로웠다. 공연 전 날 넘어졌지만 그 놀람과 상처를 입고…. 아팠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놀란 것 때문에 무대 위에서 여러 번 실수를 했다. 여러번 위기가 있었다. 이걸로 내가 끝나나? 그러면서 내가 나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아니다.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물러설 수 없다. 질 수 없다. 그건 아주 치명적이면서 자존심,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재도 못 되었다. 대본을 무대 한 쪽에 준비해놓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잠꼬대, 자다 가서라도 할 수 있는 대사들이었다. 그 상황에, 그게 잘려진 필름처럼,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그렇게 헛되게 날아가 버릴 때 그 참담함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누구도 모른다. <신의 아그네스>를 하는 동안 그 망령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다시 앙코르 공연을 한다고 할 때, <신의 아그네스>는 이걸로써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작품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당신은 다른 장르를 기웃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기사 딸린 큰 차를 탔을 수도 있었다.
아니, 바라지 않는다. 운전할 때 행복하다.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직접 운전한다는 것을. 혼자 노래 연습도 하고 대사 외우고 혼자 웃기도 하고, 너무나 감사한 공간이다.

다른걸 왜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나? 연극으로 충분하다는 강렬한 믿음 같은 게 있었나?
능력이 없어서다. 하하. 내게 연극은 종교 같은 것이다. 이곳저곳에 나를 보이고 싶지도 않고 연극만이라도 옳게 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박정자’라는 브랜드 가치를 잘 관리했다.
난 항상 어설프다. 미련하고, 바보 같고, 그것이 나를 지켜준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좀더 다른 생각을 했고 똑똑했다면 이 힘든 연극만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을 거다. 내가 아주 붙들고 늘어졌으니까. 이제는 연극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서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난 배우야, 난 최고야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생각 안 하나?
아주 교만하게도 때때로 한다. 아이쿠 하나님 교만하지 않게 해 주세요. 안 돼요. 교만하면 안 돼요. 누가 뭐래도 ‘최고의 배우야’하다가 어떨 때는‘난이게뭐야’한다. 그 꼭대기와 바닥은 순식간이다. 번쩍 빛 한 번 나면 끝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찰나에 떨어지는 그 간극을….
어쩔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당신처럼 살고자 하는 배우가 많아야 하는데….
아니,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처럼 살고자 하는 배우가 많지는 않을 거다. 그래야 그들이 살아갈 수 있으니까, 숫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시작하는 배우들에게 당신의 시대는 너무 다르다.
아직도 순수한 쪽이 많다. 고맙게도. 대단한 열정과 어렵게 어렵게 자기를 표현해가는 배우들이 많다. 감사한 일이다. 겉으로는 다 화려해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다르다. 배해선이 굳세게 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예쁘다. 내 희망을 거기에서 발견한다.

관객이 없는 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 그래도 존재한다. 이번 공연은 그간의 무대보다는 관객이 적은 편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굉장히 많은 관객이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빈 자리가 많다. 그것은 누구의 힘으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돈을 많이 들여서 광고를 뻥뻥 해서 올 사람 안 올 사람 모두 극장에 오게 할 수도 있겠지만. 만원 사례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관객동원에 있어 조촐한 공연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마음을 내려놨다. 욕심이라면 욕심이라는 것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에 한두 번에 기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표를 팔고 있다. 내가 판촉도 했다. 하하. 무대는 존재해야 하니까, 무대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 무대를 통해 내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니까. 무대가 없으면 박정자가 뭐, 이름은 또 얼마나 촌스럽나. 가운데 있는 바를 정자 하나 붙들고 여기까지 왔다. 감사하다. 나이가 드니까 모든 것이 감사하다. 감사한 일 투성이다.

몇살이 되면 그렇게 되나?
내 나이가 되면….

당신뿐만 아니라 관객과도 긴 약속을 했다. 무한 장기 공연하겠다와는 다른 약속이다. 그 약속에 대한 중압감은 행복하겠지만, 힘들지 않나?
인생은 힘든 거니까. 쉽게 가려고 하면 안된다. 인생은 어차피 힘든 것을 넘어서야 한다.

    포토그래퍼
    윤석무
    스탭
    헤어&메이크업/염선형
    기타
    컨트리뷰팅 에디터/ 조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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