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유희열의 TOY스토리

2008.09.04GQ

TOY가 돌아왔다. 여전히 ‘유희열스러운’ 여섯 번째 앨범을 가지고. 지난 6년에 관해 물었다. ‘토이남’에 관해서도. 자, 그럼 일단 물부터 한 잔 마시고.

부직포 느낌의 하늘색 니트는 질 샌더, 통이 넓은 획색 바지는 엠비오.

부직포 느낌의 하늘색 니트는 질 샌더, 통이 넓은 획색 바지는 엠비오.

세상에, 6년 만이다. 너무 했다. 무슨 공을 그렇게 들였나?
공을 유난히 들인 건 아니고 보통 작업을 하면 좀 오래 걸리는 편이다. 곡을 막 써내는 타입이 못 된다. 그럴 능력이 없다. 게다가 마음에 안 들면 녹음까지 했더라도 그냥 버린다. 다른 작곡가들 보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뒀다가 다른 데 쓰기도 하는데, 난 마음에 안 차는 건 아예 폐기한다.

아깝다, 그것만 주워다 만들어도 앨범 한 장은 거뜬할 텐데. 꼭 폐기해야만 하나?
어쨌건 내 이름이 박혀서 나가는 거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걸 한 번 쓰면 앞으로도 계속 쓸 거 같았다. 그런 건 못 견딘다. 굉장히 괴로워한다.

새 앨범<Thank You>를 서른 번쯤 들었다. 한 번에 멜로디가 들리진 않지만 어떤 악기가 어떻게 쓰였는지, 음악적 아이디어가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계속 듣다 보니, 비로소 멜로디도 귀에 익었다. 그건 5집에서 예견된 변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들어주면 내 마음을 거의 알아주는 거다. 사실 4집 전까지는 그냥 기분대로 한 것 같다.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그땐 젊었고 녹음실 가는 게 마냥 재미있었다. 히트가 나고 사람들이 좋아하기 이전에,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4집, 5집부터였다. 4집에선 아무래도 경력이 쌓이게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5집에선 정말 뭐가 좋은 건지 고민하다 보니 고생스러웠다. 너무 지쳐서 제목도 일부러 ‘페르마타’라고 했었다. 소진됐다는 기분에 당분간 음악은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빠져 있던 음악(퓨전재즈에 기반한, 코드워크 중심의 화성적인 음악)과 트렌드가 일치하지 않아 지치기도 했고, 발라드 작곡가로 각인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건 거의 다 발라드에서 보여줬기 때문에 이제 발라드 싸움은, 좀 더 슬픈가, 막말로‘야마’가 있는가, 상업적으로 얼마나 포장될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일이 돼 버렸다. 5집부터는 더 이상 예전 어법의 발라드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5집을 끝내고 닥치는 대로 여행을 다녔다.

여행 다녀온 사람처럼 정말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이제 5집까지 얘기했는데 6집을 작업하면서는 뭐가 더 달라졌나?
6집 작업을 하면서부턴 멜로디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가진 그림을 음악으로 정확하게 표현했는지를 계속 검증했다. 예전에는 이 부분에서 슬퍼? 뭐가 와? 짠해? 같은 것에 주안점을 뒀다면 5집부터는 좀 더 냉정하게 음악적으로 접근했다. 편곡, 즉 연주를 어떻게 할 건지, 멜로디가 오버인 건 아닌지를 검토하면서 디테일을 만들고‘오버필’을 잘라버리는 식으로 작업했다. 확실히 한 방에 다가오는 건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하면 계속해서 ‘마음을 울리는 따뜻한 음악’을 쓸 수 있겠지만 이제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그렇다면 당신에겐‘음악=자기표현’이라는 건가?
그렇다. 그리고 예전보다 겸연쩍은 게 많아졌다. 조금 더 오버하는 게 상업적일 순 있지만 이젠 그렇게 못하겠다. 세월의 탓도 있을 것이다.

새 앨범 전체가 전자 음악의 자기장에 놓여 있다. 당신에게 21세기란 그런 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음악인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이제 전자음은 편곡의 재료, 그러니까 그림 그릴 때 쓰는 물감처럼 됐다. 어쿠스틱으로도 잘 할 수 있지만 난 연주자가 아니라 프로듀서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취해야 한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메이저 뮤지션치곤 음악을 안 가리고 듣는다는 거다. 한 음악의 여러 갈래를 들은 뒤 장르 전체의 관습적인 특징을 마스터한다. 특징적인 요소를 잡아내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한 곡으로 농축하는 게 내 욕심이다. 예를 들어 일렉트로닉 음악의 특징은 한 마디 단위의 반복과 사운드의 어떤 변화겠지만 난 그걸 내 음악이 가진 스토리라인 위에다 방법론적으로 도입한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나를 굉장히 키치적인 사람으로 쓰기도 하는데, 인정한다. 하지만 일렉트로닉한 정서를 갖고 와서 그냥 내 음악에 갖다 붙인다고 붙는 게 아니다. 스토리 라인이 생기면 음악이 깨져버리니까. 그런 기분도 안 나고. 그래서 편곡을 될 때까지 계속한다. 그런 작업방식이 6년을 끌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좀 어려운 얘긴 거 같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고, 음원을 선별하고 멜로디에 얹는 방식은 어딘지 윤상을 연상시킨다.
윤상 씨는 굉장히 좋아하는 선배 뮤지션이다. 윤상 씨 음악은 들을 때마다 벽에 부딪힌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다했구나 싶어서. 뭘 듣다가 너무 좋다고 하면 이미 듣고 있다.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정말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윤상 씨를 피한다고 피해 보는 데 그게 음악에서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워낙 좋아하니까.

최근 몇 년간 대중음악의 장르는 세분화, 전문화됐다. 6집이 지금 대중음악 신에서 과연 새로울 수 있을까?
그걸 굉장히 고민했었다. 정말 달라졌다. 뭔가 독자적인 걸 하려면 어떤 장르를 파야 했는데 그러기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원전음악을 들었다. 크라프트베르크나 YMO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그걸 내 음악에다 갖다 붙이는 게 오히려 새롭겠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윤상 씨처럼. 윤상 씨 음악은 정확한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어서 소스만 빼면 가요나 발라드가 되지만 그런 것들이 한데 녹아들어서 이른바 윤상표 음악이 된다. 나도 음악은 토이표 음악인데 전자음악의 소스와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다른 뮤지션들이 손대지 못할 정도로 세밀한 에디팅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만들고 싶었다. 윤상 씨와 나의 차이점 중 하나는 내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했기 때문에 화성적 측면에서 윤상 씨보단 풍부한 게 있다는 거다. 윤상 씨가 단아하다면 나는 좀더 펼쳐낸다. 그걸 청자들이 알아차리기에는 애매하다. 좀 더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사운드를 원하는데 난 그게 겸연쩍어서 감췄으니까. 작업 중엔 잘 안 들리는 소리 같은 데서 쾌감을 얻었는데 과연 이걸 누가 알까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새로운’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강박은 있다. 당신에겐 어땠나?
새로운 혹은 독자적인 시도는 토이에서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토이는‘포퓰러한’팀이지 굳이 실험을 해야 할 팀이 아니다. 4집 5집할 때도 실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알려지지 않은 거였기 때문에 신선했던 거고 지금은 사람들이 더 자극적인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예전처럼 독특하진 않을 것이다. 이젠 뭐든 온라인상으로 충분히 빨리 들을 수 있어서 새로운 걸 시도한다는 게 나한텐 지루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을 열심히 세공하는 게 이번 작업의 재미고 의미였다.

‘프랑지파니’같은 곡에선 3세계 음악에 대한 관심이 보인다.
3세계 음악은 좋은 소스가 되긴 하지만 요즘엔 쉽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3세계 음악과 연합한 일렉트로니카를 한동안 좋아했었는데 요즘엔 너무 싫어한다. 재기와 테크닉, 아이디어는 좋지만 정작 느낌이 안 온다. 저게 뭐야 싶은 거다. ‘프랑지파니’를 만들었지만 그렇게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이병우 씨가 기타를 치고 또 누가 퍼커션을 치더라도 브라질 어촌계장이랑 청년회회장 둘이 와서 하는 것만 못하다. 멜로디의 힘이고 뭐고 간에 기질에서 나오는 거니까.

당신 음반이 나온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음원이 아니라 음반을 살 거라고 했다. 무엇이 그들을 기대하게 만든 걸까?
일단 기분이 참 좋다. 훨씬 더 무섭게 만들어야 할, 다음에 뭘 작업할 때도 훨씬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주니까. 라디오를 통해 나와 청자가 정서와 취향을 공유해 온 시간이 5년 가까이 된다. 그 사람들은 내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이 좋다는 것보다, 음악을 들었을 당시 자신들이 어땠다는 걸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음반이 나온다니까 다들 반갑게 음반을 구매하겠다는 것 아닐까. 음원으로 듣기엔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한편으로는‘,,지금 시대가 이러니까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것보다 내가 쭉 해온 방식이 옳다는 판단도 했다. 쪼개서 넣어라, 60분 넘어가면 CD 듣기 힘들다, 아무도 CD 전체를 듣지 않는다는 얘기를 필드에 계신 분들에게 수없이 들었다. 다들 바보짓이라고 그랬는데, 내겐 한 곡이 갖는 의미는 그렇게 크지 않다. 나는 앨범을 만드는 방법밖에 모른다.

사춘기적 외로움, 순애보적 이별 같은 것에 대해 많이 써왔다. 가족이 생기면서 토이의 감성도 변했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전작들은 모두 부재에 관한 거였다. 지금은 채워져 있다. 모든 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때는 밝은 노래를 하더라도 ‘네가 있다면’ 이 전제였지만 지금은 ‘네가 있어서’ 가 전제다. 감정도 예전에는 사랑, 외로움, 그리움과 심지어 기쁨까지도 내가 그 한가운데에서 얘기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확 바람을 맞고 걸어가면서 죽을 거 같은. 지금은, 바람이 저기서 막 불고 있는데 나는 창 안에서 바람이 불었었다, 불고 있다고 얘기 하는 거 같다. 그 창이라는 건 가족이고 아내다. 막말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부재와 상실, 외로움의 이미지 때문이었을 텐데 그걸 알긴 알겠는데 죽어도 쓸 수가 없었다. 윤리적으로 그렇게 못 하겠어서. 물론 쓸 수는 있다. 왜 그걸 못하겠나. 십년 가까이 그걸 써왔는데. 5집까지는 내추럴 본, 그랬나 보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땐 당신이 쓴 가사도 구어적이고 직설적이었다. 5집은 그 절정이었고.
5집 때가 너무 외로웠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고 모든 게 끝,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했던 음반이었다. 지금은 힘을 좀 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잘 들리지 않는 부분에서는 치열하게 작업했지만 오히려 한 번에 확 오는, 이 음악 들으면 나 죽을 거 같아 하는 것은‘잘’알지만 일부러 안 했다. 7, 8집 되면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 같다. 그게 좋다. 옛날 앨범 들으면 옛날 내가 생각난다. 1집 음반 들으면 정말 스무 살 초반에 음악이 마냥 좋아가지고 했던 거 생각나고, 2집 들으면 제대하자마자 촌스러워가지고 어떻게 좀 히트 내볼까 그랬던 생각나고, 3집 땐 약간 멋 좀 부렸고, 4집 땐 좀 고민하고, 5집 땐 너무 힘들었고, 6집은 한 10년 뒤에 들으면 신혼의 모습이 보일 거 같다. 십 년 뒤면 무덤덤한 부부사이와 세상이 다 그렇다는 애길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러고 싶다, 난. 그래서 지금 내 앨범이 잘 안 들린다고 하는 싱글들도 결혼해서 들으면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다.

 

겨자색 스웨터는 버버리 프로섬.

겨자색 스웨터는 버버리 프로섬.

음악은 작곡가의 추억이자 기록인 걸까?
그렇다. 나는 음악이 굉장히 개인적이어야 하고 그걸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업적인 균형을 맞추고 적당히 포장하는 것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것’을 사는 거니까. 지금은 시스템이 음악을 만든다. 회사가 존재하고 그 다음에 뮤지션이 존재하니 개인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잖나.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나는 개인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음반들이 참 좋고 그런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음반을 팔고 사고 듣고 소장을 하는 의미가 있으니까.

추억을 나누어 갖는 거니까?
그렇다. 어떤 사람의 것을 사는 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니까. 이 사람이 어떤 이야기꾼이냐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왜 이 이야기를 하냐는 거다. 대체 왜, 지금 이런 음악을 할까 같은 것들.

그렇다면 앨범을 모은다는 건 한 뮤지션의 히스토리를 갖게 되는 걸까?
맞다. 하지만 대한민국엔 뮤지션의 히스토리란 게 없는 것 같다. 조용필 씨의 예전 음반을 사고 싶어 음반가게에 가면, 없다. 갖다놔 봐야 한두 장 팔리니까 더 이상 안 찍는다.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를 알려면 오로지 예전 음반을 사는 수 밖에 없는데 그러질 못하니,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게 아무 의미 없어져 버리는 거다. 대한민국 땅에서 심지어 조용필조차 예전 음반을 구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무수한 뮤지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열심히 음악해서 걸어온 여정을 들을 수가 없다면 음악 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다. 차라리 텔레비전 나가서 몇 번 더 웃기는 게 더 존재감 있다. 작곡가로서 일본 같은 델 가면 행복해지는 것도 예전에 나온 때 묻은 음반들이 아직도 있다는 거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온라인이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거기에 음악이 계속 쌓여야만 뮤지션의 가치가 올라가는 시대라는 것. 거기에 기대를 하고 있다.

혹시‘토이남’이라고 아나? 한 칼럼니스트가 당신과 당신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는 남자들의 어떤 이미지에 관해 쓴 거다. 우아하고 개인적이고 유약한, 그러니까 긴 손가락으로 와인잔을 들고 강아지보단 고양이를 좋아하고 볕 좋은 날엔 베이글 샌드위치 사서 자전거타고 소풍 가는 독신남의 이미지 말이다.
안다. 재밌게 봤다(하하). 어떻게 다 그렇게 살겠나. 나한텐 정말 게으르고 지저분한 부분이 많다. 정말 오랫동안 안 씻고 안 나갈 때도 많은데, 다만 그렇게 바라보는 거에 대해서 뭘 얘기하고자 하는진 알겠다. 노래에서 그런 부분이 많이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노래라서 그런 거다. 일반적인 남자와 다른 점도 분명 있다. 만약 밥을 먹으면 나한텐 밥 먹는 것 자체가 중요하진 않다. 비싸지 않더라도 지금 뭘 먹고 있느냐가 먹는 재미,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연애담을 듣더라도 누가 만나고 헤어졌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찰나가 있었냐가 궁금하다. 내 눈에 밟히는 건 디테일이다. (카메라 케이스를 잡으며) 제품이 이렇게 있으면 이걸 케이스로 보는 게 아니라 바느질이 어떻다 같은 게 먼저 눈에 보인다. 이런 게 일반적 남성성과는 굉장히 다른 부분인 거 같다. 물론 굉장히 마초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토이남이라는 부제가 붙은 거 같다. 토이남에 본질은 여성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잖나. 더군다나 그렇게 해놓고 자기도 좋아하는. 나도 그런 내 모습이 좋다. 싫지 않다. 와이프를 만난 것도 그런 취향이 너무 맞아서다. 와이프가 농담처럼 하는 얘기가 대한민국에 이런 남자가 있을 줄 정말 몰랐다는 거니까.

당신의 여성적인 일면이 좋아보였다는 건가?
예를 들어 둘이 쇼핑하러 가면, 보통 여자가 쇼핑할 때 남자는 팔짱 끼고 기다리는 게 전형인데 난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거는 이렇다 저건 저렇다고 한다. 심지어 내가 찾아주거나 잡지 보다가 어울릴만한 게 나오면 알려주기도 한다. 그런 게 이 친구와는 잘 통하고 자연스럽다. 식당 같은 곳도 여긴 이래서 좋고 저긴 누구나 다 가니까 의미 없다고 얘기하는 것까지 잘 맞다. 그게 정답일린 없지만 우린 우리끼리 우리만의 세상에서 사는 거니까.

유명 뮤지션인 당신에게 가정은 어떤 걸까?
일단 행복하다.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행복하다. 어저께 그런 얘길 했는데 나중에 딸애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 이 앨범이 나와서 되게 잘 나갔어, 여기에 너 사진도 있고 뭐도 있어 하면 딸도 좋아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중엔 무시하겠지만(하하). 내가 있고 또 두 사람이 있는 게 내가 살아나가고 음악할 때 반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케팅이나 이벤트가 되는 건, 아니다. 사진 찍히고 초대받는 것, 가족에 대한 얘기를 피해가는 것도 그래서다. 어차피 음악엔 개인이 담겨야 하지만 순수하게, 고스란히 녹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족을 드러내는 게 싫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질 것이다. 가슴이 짠해오는 순간이 있지 않나?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제일 그렇다. 일 년 가까이 새벽작업 때문에 자는 모습을 못 봤다. 날마다 새벽 6시 정도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면 기다리다 지쳐서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이 동시에 들면서,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대다수의 남편과 아빠가 갖는, 그런 느낌일 거다. 깨 있으면 정신없다. 애가 막 놀자고 하면 피곤하기도 하다. 그래도 자고 있는 거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지고.

애는 잘 봐주나?
아내가 잘 봐주는 편이라고 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아무래도 잘 봐주게 된다. 앨범 작업하기 전에는 시간 나면 목욕도 거의 내가 시켰다. 요즘엔 바빠서 못 그랬지만.

여행을 자주 가는 걸로 알고 있다. 여행이 무엇을 주기 때문일까?
우린 돈만 벌면 여행간다. 정말이다. 나나 이 친구나 재어 놓는 스타일이 못 된다. 내일의 행복보다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사람들이라서 결혼도 한 거고. 세상엔 예쁘고 능력 좋은 여자들도 많지만 딱 보인다. 아, 어떻게 되겠구나라는 게. 이 친군 거의 유일하게 나같이 어떤 무책임한 행복을, 철없는 행복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부부가 뭐고 애들을 키우는 게 뭐건 간에 우리가 좋으면 좋은 거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가는 거고. 강남에 살다 보니 바나 카페에서 친구들 만나 얘기하면 누가 뭘 했고 뭘 샀고 몇 평에 살고 우리 애는 지금 여길 다니고 하는 걸 자주 듣게된다. 자꾸 그런 것에 휩쓸리다 보면 정말 저런 삶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여행을 간다. 자꾸 다니면서 정말 우리만의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계속해서 되뇐다. 거기선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이방인으로 한동안 살다 서울에 돌아오면 많은 것들이 그냥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좋은 경험을 한다.

당신도 프로모션 활동으로 이 인터뷰를 하지만, 다들 좀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뮤지션이 된다는 건 엔터테이너가 된다는 뜻이기도 한 걸까?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본질은 라디오를 나가거나 공연하는 것보다 반응이 확실히 빠르다는 거다. 검색어 순위에 오르면 음반 나왔네 하면서 사기도 하니까. 좋다. 그것도 좋지만 만일 음반이 안 팔려서 프로그램에 나갔다고 치자. 다음 음반을 냈을 때 또 그러면 안 나가겠느냐는 거다. 한 번 했으니까 조금 더 영양가 있는 프로그램을 몇 개 더 치자. 그런 게 빤히 보인다. 지금 내가 너무 아프다고 몸에 안 좋은 주사를 맞고 싶은 마음이 나는 없다. 난 내성을 기르고 싶다. 예능 프로그램을 나가서 할 것도 없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내 음악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말을 재미있게 해서 시청률 높이는 거다. 나갈 이유가 없다. 내 음악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새 앨범 뮤직비디오는 정말 작심하고 찍은 듯 했다. 마지막 그 손가락질은 절정이었다.
조은석 감독과 작업했는데, 둘 다 음악 듣고 그랬다. 음악이 대놓고 70년대니 뮤직비디오도 대놓고 촌스럽게 가자고. 그래도 우리끼린 너무 오버하진 말자고 했다. 그런데 노래하는 친구가 너무 열심히 해서 조신히 끝내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마지막에 노래하는 친구를 손가락으로 딱 가리킨 건 그래서였는데 감독이 그걸 그대로 썼다. 의도된 유치함.

빨갛고 야한 얘기 같은 걸 드러내는 건 취향 탓인가?
막말로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별 짓 다 하지 않나. 야한 얘기도 하고 누가 웃긴 거 시키면 망가지기도 하고.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냥 아 재밌다하고 하는 거다. 야한 얘기는 라디오 할 때도 꽤 많이 했는데, 난 내 이미지가 있고 그걸 지켜야 한다는 걸 방송 들어가면 잘 인식하지 못한다.

늘 영화음악에 관심 있다 말만 하고 한 작품도 하지 않았다. 설마 섭외가 안 들어온 건가?
사실 영화음악을 했다. 무보수로 학생들 단편작품을 훈련 삼아 했었다. 유명 감독님들과 몇 번 만난 적도 있는데 솔직히 무서워서 못하겠다. 폐를 끼칠까봐. 음악만 던지면 된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일단 싱크도 맞춰야 되고 뭐도 해야 하고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훈련을 하고 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하는 거면 내가 다 책임지고 그걸로 그만이지만, 스태프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 때문에 다른 일까지 차질이 생길까봐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겠다. 좀 더 경험을 쌓고 자신 있을 때 할 작정이다. (이)병우 형한테 좀 많이 배워야겠다. 밑에서 청소라도 하면서.

당신은 예술가인가, 장인인가?, 아니면 단지 뮤지션인가?
앨범 마지막 노랠 부른 친구가 처남이다. 그 친군 예술가다. 저거 아니면 딴 건 못할 거 같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자기 음악 연습한다. 아마추어긴 하지만 그 친굴 보면서 예술가의 태도란 저런 거라고 생각했다. 난 예술가는 아닌 거 같다. 예술가라고 하기엔 너무 얕고 생각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고 외부와 타협도 많이 한다. 그래서 장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다. 평생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아마 못 될 수도 있겠다는 게 그때의 답이었다. 물론 그걸 꿈꿔왔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예술가지만.

    에디터
    이혁진
    포토그래퍼
    레스
    스탭
    스타일리스트/서수경, 헤어&메이크업/염선형
    기타
    글/객원 에디터/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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