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에서 시작해 섹스로 끝나는 이야기

남자는 무엇으로 살까? 라고 묻는다면 별의별 대답이 다 나올 거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남자 삶의대부분은 섹스에서 시작해 섹스에서 끝난다. 그게 다분히 상상에 의존할지라도. <GQ>의 남자 에디터 3명이 각각의 사례를 말했다.

안 해본 남자

섹스의 정의가 사정이 아니라 삽입이라면 나는 한 번도 안 해본 남자가 맞다. 사귀던 여자친구와 모텔방을 잡고 밤새 뭔가를 해본 적은 있지만, 그건 섹스라기보다는 진한 페팅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하게 그녀와는 삽입이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피임기구가 없었던 탓이기도 하고, 그녀도 나도 처음이라 잘 되지도 않았고, 왠지 삽입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진한 애무와 키스, 오럴 섹스만으로도 절정에 닿는 건 충분했고 나는 더 이상 쾌감을 느끼는 게 두려울 정도로 만족했다. 머릿속에 페인트를 끼얹은 듯 모든 게 하얘지고 나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때까지 해왔던 마스터베이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와는 곧 헤어졌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나는 완전히 변했다. 그 전까지 내게 섹스란 마스터베이션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사소한 판타지였다. 커피색 스타킹이나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흰 허벅지, 티셔츠 속으로 보이는 젖가슴, 가느다란 발목, 작은 발가락,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나른한 목덜미, 쪼그려 앉을 때 보이는 팬티나 둔부의 굴곡, 가는 팔의 매끈한 감촉같이 전형적인 것들 말이다. 피곤한데도 잠은 오지 않거나 괜히 심심할 때면, 혹은 에로영화나 포르노를 보다가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아침도 좋았고 저녁도 좋았다. 하루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거기가 우릿하게 아프도록 잡고 흔들었다. 나중엔 거기가 아니라 팔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후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에 자극받을 수 없었다. 보다 상세하고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것들이 필요했다. 그녀의 손이 내 것에 닿았을 때 느꼈던 부드러움, 입 안의 온기, 치아와 치아가 부딪힐 때 나던 소리, 딱딱한 실체감, 가슴을 어루만질 때 느꼈던 어떤 자족감,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젖꼭지나 엉덩이 사이를 쓸어 줄 때의 낯설고도 거부할 수 없는 느낌들. 그런 것들만이 나를 흥분시켰다. 아니 다른 것들로 흥분했을 때조차 절정의 순간엔 그것들이 생각났다. 섹스에 대한 상념이 확실히 시들해지고 계단 위로 올라가는 여자들의 치마를 더 이상 힐끔거리지 않게 된 것도 그때쯤부터였다. 섹스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변해버렸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난 섹스를 상상하려 했지만, 그녀와 헤어진 뒤에 난 섹스를 기억하려 했다. 망상은 끝났다. 영원한 얼룩 같은 게 생긴 기분이었다.
섹스가 일방적인 행위, ‘해대는’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뒤부터 섹스를 생각하기가 어려워졌다. 엘리베이터, 화장실, 공원의 벤치, 자동차, 극장이나 교실 같은 곳에서도 더 이상 자극적인 상상을 할 수 없었다. 타인들과 있을 때는 더 그랬다.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을 때도 육교를 오르는 것 같은 무심함만 있었다. 대신 외롭다고 느낄 때, 밤이라고 느낄 때만 나는 섹스를 생각한다. 비로소 점점 느슨해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바지춤에 손을 넣는다.
객원 에디터/ 이혁진

가끔 하는 남자

여름에 3킬로그램이 빠졌다. 가늘어진 건 얼굴과 팔뿐 배는 개구리처럼 부풀었고 엉덩이는 중력과 더 친해졌다. 피곤한데도 페니스는 스물 네 시간 가동 상태를 유지했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헤어졌던 여자와 보름 만에 다시 섹스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이 가을이 되어 그녀는 조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롯데리아에서 사온 햄버거에는 그릴에 구운 고기가 두 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녀의 등을 핥을 때 잘게 부서진 고기가 침과 함께 묻어 나왔다.
우리는 콘돔을 잘 끼지 않는다. 사정은 늘 배나 등에 했다. 처음엔 그게 참 어색했다. 정신없이 그녀 몸 어딘가에 싸질러 놓고 정신을 차리면 후회가 밀려왔다. 딱히 다른 방법도 없는데. 횟수가 늘어 날수록 그녀나 나나 수천 수만 마리 내 새끼들을 쓰다듬는 데 익숙해 졌다. 여름에, 그녀 배 위로 쏟아진 액체들은 에어컨 바람에 금방 차가워졌다. 우리는 그 위로 몸을 비비곤 했다. 시원했다. 섹스가 끝나면 나는 프런트에서 전화가 올 때까지 잤다.
나는 섹스를 자주 하고 사정은 매일 한다. 사정만 할 때나 지금이나 섹스를 생각하는 횟수는 비슷하다. 눈앞에 여자가 보이면 무조건 야한 생각이 났으니까.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여자 한 명이 탄다. 핑크색 반바지에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 가슴의 둥근 선이 선명한 걸로 봐선 제법 큰 ‛뽕’을 한 것 같다. 괜찮다. 엘리베이터에 달린 손잡이를 붙들고 그녀가 엉덩이를 뒤로 쭉 뺀다. 나는 지퍼를 열고…. 아마 내 시선은 엉덩이와, 그녀의 얼굴과, 초지일관 부동자세를 유지할 ‛뽕브라’ 와, 5초 간격으로 모양새를 바꿀 층수 표 시 램프를 오고 갈 것이다. 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녀는 아무 일 없이 엘리베이터를 내린다. 사실 나는 보름도 넘게 그녀를 상상 중이다. 상상하면 실행하게 된다. 이루어진 꿈도 제법 있다. 그런데 막상 실행되면 상상할 때만큼 좋진 않다. 나 혼자만 섹스 중인 여자가 꽤 된다. 집 앞 복사집 알바생과 한 지는 한 달도 더 됐다. 파트너 리스트 제일 위칸에 있다. 이상하게 질리지도 않는다.
섹스를 이따금 하면, 매일 하고 싶어진다. 아니다, 하루 종일 섹스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이에 일에 대한 생각,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생각들이 끼어든다. 이틀 연속 섹스한 다음 날에도 여자를 만나면 또 하고 싶다. 이런 날 머릿속으론 섹스말고 다른 걸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나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섹스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후회하는 것이다. 얼굴은 나날이 홀쭉해져 가고 팔뚝의 근육들도 사라진다. 몸을 흔들 때마다 살들이 배와 엉덩이로 몰린다. 섹스를 못한 날은 자위를 한다. 오죽 하면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토요일에만 자위할 것이라고 다짐한 적도 있다. 물론 안 지켜진다. 게다가 수요일과 토요일은 절대 안 빼먹고 한다.
“자기야 이제 자위하지 말고 나랑만 해.”한 여자는 이렇게 얘기 했고, 또 한 여자는 내가 “너랑 하는 거 떠올리면서 자위했어”라고 말했을 때 절정에 올랐다. 샤워를 하다가 가끔씩 내 페니스를 손에 쥐고 혼잣말을 한다.“너도 참 변덕스럽다!”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온다. 욕조 한쪽 모서리를 붙잡고 엉덩이를 길게 뺀다. 나는 샤워기의 온수를 틀고 물을 뿌리며 삽입한다. 그녀도 나만큼 힘들까? 그러나 그녀처럼 나도 주체할 수 없다. 에디터/ 이우성

매일 하는 남자

1996년 가요계를 풍요로운 가슴으로 수놓았던 자가 있었다. 김부용이다. 그의 무대에는 늘 육감적인 실루엣의 ‘맘보걸’이 등장해 몸을 흔들었다. 맘보걸은 장국영도 아니고 알파치노도 아니었건만 맘보춤을 참 잘췄다. 그녀의 육중한 가슴이 흔들릴 때 세상도 함께 흔들렸다. 1대 맘보걸 이선정이 2대 맘보걸 서유정으로 교체 된 건 공중파의 상식을 거스르는 이선정의 가슴 크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유치한 분석을 들으며, 나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젖꼭지를 희롱당하고 있는 이선정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그녀는 두 팔을 높이 든 채 밧줄로 묶여 있었고, 징이 박힌 힐을 신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채찍을 휘둘렀다. 찰싹, 공상의 마지막엔 늘 다짐했다. 언젠가 내 자랑스러운 남성 아래 세상을 무릎 꿇리리라.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며 포르노에서 본 것처럼 가슴 사이에 끼어서 하다가 얼굴에 사정할 거야. 귓속에선 김부용의 노랫소리가 윙윙대며 차올랐다. 노래 제목은‘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요컨대, 매일 하는 남자의 비밀에 대해 김부용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심정의 체온에 대해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보다 더 절박하게 감기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거유를 베고 누운 고시생의 차분함 정도랄까. 섹스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실제 거의 매일 하고 있지만, 행위 자체에 대한 열의는 날이 갈수록 고개를 수그린다. 길거리에서 끌리는 여자를 발견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삶에 대한 열의와 희망으로 충만해 벅차오르다가도, 막상 삽입에 이르는 과정과 피스톤 운동의 고단함을 떠올리면 국민교육헌장을 외는 싯다르타가 된 듯 숭고해진다. 다 귀찮다는 심정이다. 정치적 강박 때문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과 섹스는 클립톤 행성과 클리토리스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없다. 성에 끌리는 건 성별을 초월한 인간의 특성일 뿐 의식의 조건이 아닌 것이다. 이건 그저 섹스에 대한 신비함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마다의 일기> 같은 밀리언셀러‛야설’이나 포르노계의 <벤허>라 할 만한 <야간간호원>을 보며 꿈에 부풀던 소년은 간 곳이 없다. 그 거대하고 질벅한 스펙터클의 낭만은 죄다 거짓말이었거든. 그저 장삿거리일 뿐이야.
요즘은 섹스보다 진심으로 교감하는 관계에 더 관심이 간다. 섹스를 매일 하면 소녀가 되는 모양이다. 섹스의 흥분은 시들지만 진심 어린 관계의 굳건함은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성적인 욕망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다. 여체를 향한 미학의 세계에 집착하게 되는 거다.
하루 동안 섹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거유와 엉덩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북한영화 <동물의 짝짓기>를 보면서도 엉덩이에 대한 관념적 고찰에 몰두했다. 킬리 하젤의 가슴을 보라. 그녀의 가슴에 노벨 평화상을 줘야 한다. 부시와 김정일도 킬리하젤의 가슴을 가운데 두고 있다면 서로 부둥켜 얼싸안고 희망을 부르짖으며 공존과 화해를 이야기할 것이다. 어느 명민한 학자는 가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을, 엉덩이만 보고 달려들던 유인원의 단계에서 직립보행으로 발전한 데 따른 결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이나 뒤나, 기어 다니나 서서 다니나 가슴이나 엉덩이에 발기되긴 매한가지다. 오늘도 유선형의 그들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상념에,‘좀 더 긴’관계에 젖어든다.
에디터/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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