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정은, 임수정이다

임수정은 처음부터 코드와 유행을 따르는 스타라기보다 그저 속 깊은 이성 친구 같아 보였다. 다른 무엇을 빌려 임수정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종종 무위로 돌아간다. 돌이켜보면 임수정은 늘 임수정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그녀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회색스웨터는 버버리 프로섬, 검정색 톱은 CK언더웨어

밝아 보여요. 많이. 그냥, 요즘은 모든 일이 어렵지 않네요. 왠지 적극적 이랄까. 한동안 활동을 쉬어서 그럴까요. 아니, 꼭 그런 거 아니라도 말이죠.

그러고 보면 <각설탕>때도 무대인사를 참 오랫동안 다녔잖아요. 한 달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원래 책임감이 강한 편인가요?
<각설탕>은 그 영화 에 대한 책임감이 워낙 컸던 상황이었고요. 한 분이라도 더 많은 분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어요. <괴물>이 스크린을 휩쓸던 때였으니까요. 하긴 주어져 있는 일을 고집스레 끝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긴 해요. 요즘에는 더 하죠. 회피하기보다는 좋든 나쁘든 일단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중압감으로 다가오진 않나요? 그랬던 적도 있었어요. 저도 데뷔 9년 차 고, 배우로는 6년 차고요.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시간 위에서 나름대로 전략을 터득한 거죠. 예전에는 내가 싫고 잘 못할 것 같은 문제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컸어요. 지금은 그렇게 싫고 못할 거 같아도 이왕 ‘해야 하는’거라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심정인 거에요.

하지만 ‘해야 하는’이라는 말에선 의지보다 좌절이 먼저 읽혀요. 자포자기는 아니에요. 그보다는 익숙함의 문제인 거죠. 이래도 저래도 제 몫으로 남겨진 일인 거잖아요. 그렇다면 ‘잘’해내야죠.

작년 말에 <행복> 촬영을 끝낸 후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휴식기가 있었죠. 자연인 임수정은 무얼 했을지 궁금해요. 작년 12월 말에 크랭크업했는데 그동안 해외영화제 일정도 있고 이런 저런 업무들이 남아있어서, 집중적으로 쉰 건 두 달 정도 되는 거 같아요. 여행을 많이 좋아하는데 많이 못 갔어요. 요번에 <행복>에 관련한 일정이 모두 끝나면 여행을 한 번 더 갈 생각이고요. 얼마 전부터는 어쿠스틱 기타를 배우고 있 거든요. 아, 이거 요즘 너무 자주 이야기하고 다니네요. 나중에 실력 좀 보자고 하면 어쩌지(웃음)? 굉장한 건 아니고요. 이제 겨우 코드 몇 개 잡는 수준이에요.

조만간 공연을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임수정과 벌떼들’어때요? (웃음) 사실 정말 그런 생각이 있어요. 희망사항이지만, 오랫동안 배워서 취미 맞는 사람들과 작은 소규모 밴드 같은 걸 해보고 싶거든요. 물론 비공개로요.

그동안 참 좋은 작품들에 출연해왔잖아요. 자기만의 선택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만 보고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아요. 작품 전체의 느낌, 완성도를 가늠하게 된다고 할까요? 시나리오 너머에 숨어 있는 그런 공기를 포착해보려 노력하죠.

하지만 시나리오만 보고 완성도를 추측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죠. 그렇죠. 그래서 감독님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참 많이 작용해요. <행복>이 딱 그런 경우죠.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뭔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심지어 결말까지도 열려 있는 구조였어요. 이야기 끝에 ‘바뀔 수 있다’고 전제돼 있었죠. 허진호 감독님은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고요. 촬영하면서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뭐가 어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실제 완성된 영화의 결말은 시나리오 내용과 달라요. <싸이보그라도 괜찮아>의 시나리오는 더 심했잖아요. 아무것도 유추해낼 수 없는 이야기였죠. 그렇게 이야기 자체의 불투명함이 다소 우려되더라도 감독님을 믿고 가는 거예요.

전에 류승완 감독과 대화하는데 “박찬욱 감독님은 임수정 씨와 바람났다고 자기가 부러 소문내고 다니면서 스캔들내는 데 성공했는데, 나는 정두홍 감독이랑 스캔들 났다. 이게 뭐냐”며 원통해했어요. (웃음) 아이고 배야. 정말 너무 재밌는 분이시죠! 아무래도 감독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연기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싸이보그라도 괜찮아>때는 박찬욱 감독님이랑 씨네마떼끄도 다니고 그랬거든요. 막상 우리 영화랑 ‘영군’ 이라는 캐릭터보다는 옛날 영화, 그리고 먹는 이야기 많이 했어요. 영군은 연기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지만, 감독님이 정답을 주고 가는 게 아니라서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도 같아요. 허진호 감독님과의 작업은 또 달랐어요. 연기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박찬욱 감독님과 같고요. 다만, 매 장면마다 촬영 전후로 대화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배우와 감독이 함께 현장에서 정답을 찾아가보자는 거죠.

황정민 씨와의 캐스팅은 아무래도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야후’광고에서 당신이 황정민 씨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세요?“아저씨!”라고 불렀죠. 다들 처음에 의아해하고, 실제 어울릴지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황)정민 오빠가 살을 많이 빼면서 얼굴의 각도 살고 훨씬 젊어졌고요, 저도 의상이나 머리에 신경 쓰면서 성숙해 보이려 했거든요. 영화에서 제가 연기하는 ‘은희’가 20대 후반, 정민 오빠가 연기하는 ‘영수’가 30대 중반이에요. 실제 저희 나이랑 똑같죠. 이건 그들의 나이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영화잖아요. 영화를 보시면 다들 자연스레 넘어가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예고편을 봤는데, 어딘가 숨이 가빠지는 느낌이랄까요. 특히 은희가 영수에 게“내가 그 여자보다 잘 해줄테니 가지 마”라고 빌 때는 정말 뭔가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는데요. 남성 판타지로 두고 볼 수도 있지만, 믿었던 사람의 떠나간 마음을 돌리려는 절박함이 남자나 여자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죠. <행복>은 요양원에서 만난 남녀가 사랑을 하고, 병이 다 나은 남자가 다시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그 안의 은희라는 인물은 전혀 현대적인 여성상이 아니죠. 그보다는 고전적이랄까요. 떠난다는 남자를 잡으려고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냥 가라고 그러면 안 돼? 수없이 자문해 봤죠. 공감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은희의 사랑은, 그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이야기와 인물의 상황을 마음으로 좇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레 손이 모아지고 싹싹 빌게 되더라고요.

그런 절박한 심정은 직접 겪어봐야 연기해낼 수 있는 거 아닐까 싶었어요. 활동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나 때문에 화났을 때, 그럴 때 잘못했다고 빌어본 적은 있죠. 하지만 그거랑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예 요. 그 경험을 되살려서 연기를 하기에는 은희의 감정이 너무 깊고 절대적이었어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연기란 모방인가요, 기술인가요, 경력인가요. 모두 다요,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이죠. 제가 캐릭터에 들어가기보다는 그 인생을, 캐릭터를 제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편이에요. 일단 내 안으로 가져와요. 그리고 그게 진실이라고 느끼게 될 때까지 고민하는 거죠. 꼭 합리적인 대답이 아니라도 좋아요. 내가 울고 화를 내는 연기를 할 때, 그 이유가 스스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그건 싫어요. 관객들도 눈치 챌 거라고요.

전에는 정서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한 적이 있나요? 많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아요. 그런 상황이 반복되며 불만이 쌓여요. 그게 최대치였던 게 드라마였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까요. 제가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기를 해보여야 하는 환경이 너무 아쉬웠어요. 그런 드라마로 사랑을 얻었지만 참 조심스러운 거죠. 드라마를 선택한다는 게.

원피스는 마틴 마르지엘라, 뱅글은 구네군다 by 한스타일

얼마 전에 바로 그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애니메이션 버전을 봤습니다. 소지섭씨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으로도 아 차무혁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의 캐릭터는 아무리 봐도 그게 은채인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되게 큰 칭찬이십니다.

꼭 칭찬만은 아니고요. 당신에게 지상 최고의 여배우입니다, 라고 상찬해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어떤 롤이 주어지든지 거기에 충분한 신뢰감과 당위성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이거든요. 리얼리즘의 차원은 아닌거 같고요. 싸이보그를 연기하고 있어도, 뭐랄까, ‘땅이 보인다’고 할까요. <싸이보그라도 괜찮아>의 영군은 헤어스타일부터 정신세계까지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는 캐릭터죠. 그렇게 비현실적인 인물은 관객에게 공감을 줄 수 없을 때 영화 자체를 망쳐버려요. 하지만 그걸 설명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연기하지는 않아요. 다만 아까 말한 대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해보려, 내 속에서 삭히고 느껴보려 애쓰는 거죠. 허진호 감독님 전작 가운데 <봄날은 간다>가 있잖아요. <봄날은 간다>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지요. <행복>은 그에 대한 메아리인가요, 혹은 대답인가요? 대답인 거 같아요. 변할 수 있다,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달라지는데 감정이라고 왜 못 변할까, 라는 대답. 잔인해도 그게 현실인 거 같아요. 좋아 죽다가도 시들해지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별하고, 그런 게 우리 주위의 사랑이죠. <행복>에서 영수가 은희를 떠나려하지만 그의 사랑이 거짓이었던 건 아니거든요. 다만, 여기는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실감인 거예요.

이소라 씨의 노래 가운데 ‘바람이 분다’를 들어보면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대목이 있어요. 사랑이 변하는 거, 혹은 애초부터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는 거. 여기에 옳다 그르다의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걸까요? 그런 거보다는 자연의 이치라는 느낌이 더 강해요. 사랑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감정이죠. 어릴 때는 모두 사랑이 어떻게 변해? 라고 물어요.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사랑은 변하죠. 사람도 변해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고요. 어린애는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처자식을 낳고요. 핸드폰도 계속 더 좋은 게 나오고요(웃음). 모두 바뀐다고요. 이걸 당위성의 문제로 분류할 순 없는 거 같아요. 이왕 변하는 거 그나마 좋게 변하면 다행인거라는, 그런 생각이에요.

그동안 당신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요, 늘 울고 있어요. 그러게요. 우리나라는 여배우들이 우는 걸 좋아하나 봐요. 은연중에 그런 (사회적인) 요구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눈물 흘리는 여배우가 아니라, 눈물 흘리는 임수정에 대한 욕망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 잘 우는 체질은 아니거든요. 그런 요구들 혹은 시대적인 흐름, 유행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억지로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흐름을 타고 갈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내버려 두자는 주의죠. 대중을 끌고 갈 생각 없고요. 나는 내 갈 길 갈 테니까 떨어질 테면 떨어지고 계속 따라오시려면 따라오세요, 뭐 이런 마음이랄까요.

배우라는 직업이 본인에게 절박한 문제는 아닌 건가요? 절박한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하지만 절대 떼어낼 순 없을 거 같네요. 배우라고 불리는 게 좋고요. 작품 하나 끝낼 때마다 인간적으로 성숙되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연기를 하면서 내 안으로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그런 와중에 제 본질이 조금씩 흔들리고 새롭게 규정되는 거 같아요. 그런 과정의 반복인 거죠. 더 어른이 되어 간다는 기분이고요. 그와 동시에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있고요.

당신에게 훌륭한 배우란 무엇이죠? 저는 앞으로 연기 생활을 10년 정도, 그러니까 마흔 살 정도까지 보고 있고요. 그 이후에도 연기를 더 할 지 문제는 그때 가서 판단해보는 거고. 그때까지 딱 한 작품만, 배우 임수정의 최고, 절정의 연기가 나왔다는 칭찬을 받아보고 싶어요. 연기의 정점이요. 정말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콱 쳐드는 그 순간까지(웃음). 그날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팬클럽에는 자주 들어가보시나요? 네. 티 안나게 자주요.

조금은 부담도 느끼실 만한데요. 아니요, 예전엔 좀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죠. 하지만 저와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본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명해주시려고 한다거나, 이런 모습들이 너무 고맙죠. 오히려 저는 담담한데 그들이 더 안타까워하니까요. 고맙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고요.

얼마 전 학력위조 이야기가 언론에 나왔었잖아요. 당신이 전문대학 학력을 없는 걸로 위조하고 고졸로 이야기했다고요. 그게 전문대학도, 정규 학위코스도 아니라서 결국 위조가 아니라는 걸 알린 것도 팬클럽이죠.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이 많겠죠. 오해가 많을 거고. 하지만 그들은 저에 대해 모르잖아요. 저라는 인간에 대해서요. 모든 오해와 구설수에 일일이 매달려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에요. 시간이 많이 지나면, 결국엔 나라는 배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제가 나서서 이렇고 저렇고 설명한다고 그분들이 이해해줄까요? 모른단 말이에요. 누군가가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사람이었고, 그런 문제를 살아생전에 인정받는다면 정말 대단한 복인 거죠. 제가 더 나이 든 다음에 인정해주셔도 되고요, 죽은 다음이라도 상관없어요. 언젠간 이해될 거라고요. 전 그래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그렇게 믿을래요.

이해될 때까지 내버려두자는 건가요. 좀 느리죠. 그런데 가끔 인격적인 모욕을 당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바로 어필을 하죠. 나도 사회인이고 당신도 사회인이고 서로 동등한데 말이에요. 나이 많아, 경력도 많아, 돈도 많아, 그래 그건 알겠어. 그렇지만 그걸 가지고 위아래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든가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한다든지 하면 굉장히 화가 나죠.

공감해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나이나 연차, 계급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분들이 있죠. 굉장히 많죠!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설사 그 순간에 제 게 피해가 오더라도, 그런 손해가 별로 아쉽지 않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야기해요. 눈앞에서요. 피하고 숨어서 궁시렁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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