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공주 세리가 찾아왔어요

<GQ KOREA>는 박세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LPGA 진출 10년과 동양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을 기념한다. 무엇으로도 대한민국 골프의 역사인 그녀에겐 부족하겠지만.



당신이 LPGA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 저는 고3이었어요. 루키였는데도 4승을 거두는 걸 보고 저도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어요. IMF라 모두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었죠. 제게도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의 감동은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의 제가 있게 된 축포였죠. 개인적으로도 영광이었지만,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더 기뻤고요.

어느 땐가부터 당신말고 다른 선수들도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서운하지는 않았나요? 영원한 1인자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계속해서 좋은 선수들이 나온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에요. 저를 더 각성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고요.

당신에게도 어느 날 슬럼프가 찾아왔는데, 너무 장기화되니까 그게 슬럼프였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LPGA 수준이 더 높아진 건가요? 루키 시절의 끈기를 잃어버린 건가요? 당연히 LPGA 수준은 높아지고 있죠.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 스스로도 루키 시절의 초심을 계속 유지해가는 것이 쉽지 않아요. 2000년과 2005년에는 우승 기록이 없었지만, 우승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죠. 원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지.

당신이 든 무수한 우승 트로피 중, 가장 사랑스런 트로피는 뭔가요? 첫 우승 트로피는 빼고요. 메이저 대회 트로피가 가장 소중하죠. 첫 우승 트로피를 제외한다면 98년도 US OPEN 트로피예요. 아까 답변 드렸듯 그때 한국은 IMF였고 저는 루키였으니까요.

운동을 잘하기 위해선 여성성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남자 못지않게 굳센 의지를 보여야 하고, 튼튼한 몸도 만들어야 하죠. 이런 현실이 우울하진 않아요? 운동선수라고 해서 여성성을 포기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일반 여성들보다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은 맞아요. 특별히 우울하게 느낀 적은 없거든요.

당신도 성형하고 싶진 않아요? 짓궂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답변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당연히 예뻐지고 싶어요. 그렇다고 솔직히 성형까지 해서 예뻐지고 싶지는 않아요.

신지애, 민나온 등 ‘박세리 키즈’라고 불리는 세대는 당신이 1998년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골프를 시작했죠. 어느새 당신의 경쟁자가 된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고 싶나요? 뻔한 말 말고요. 가끔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야 해요. 한길만 가다 보면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도 하죠. 슬럼프가 찾아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저 역시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말도 꼭 해주고 싶어요.

한국 여자 골퍼의 미래로 당신이 주목하는 선수가 있나요? 훌륭한 선수들이 너무 많아요. 그들 중 누군가를 꼽기는 정말 힘들어요.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더 성장해 나갈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라고.

한창 잘나가는 열아홉 살 골퍼 신지애에 대한 박세리의 평가는 어떤가요? 지금 바로 LPGA에 나가도 잘 해낼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고요.

올 시즌 LPGA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선화에 대해서는요? 제가 예뻐하는 후배예요. 안정된 플레이가 돋보이죠. 말없이 꾸준하게 훈련하는 모습 때문애 항상 듬직해요.

이들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미 잘 닦인 터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이 LPGA에 진출했을 때만 해도 한국 선수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잖아요. 박세리 키즈에겐 역경에서 오는 진지한 고뇌가 없어 보인다면 속단일까요? 그들이 특별히 편하게 운동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건 남자들이 흔히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나요? 시대가 주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어요.

미쉘 위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컷 오프에 탈락한 것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까요? 미셸 얘기가 많은 건 잘 알아요. 그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제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미셸이 아직 어린 소녀라는 것은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무심코 던진 말이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국계 미국인 골퍼를 한국인과 동일시 하는 언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죠? 굳이 국적으로 나누지 말고 각자의 선수들 자체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이미 성공했고 이룰 것은 다 이룬 선수인데도, 한국 팬은 늘 너무 경쟁적으로 당신이 초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지금 언론과 스포츠 팬들이 박찬호에게 “야구, 그만 둬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운동 선수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실수도 좀 눈감아 주시고요. 너무 힘들어서 혼자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아요. 비난 때문에 분발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해요.

골프를 치는 어린 선수들에게 학업은 ‘외계 언어’쯤으로 치부되고 있어요. 수업을 안 들어간다는 말이죠. 시험을 안 보고 출석일수를 안 채워도 진학을 해요. 한 가지만 잘하면 되니까,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나요?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돼요. 교육은 결국 인격과 예의를 키우는 일이니까요. 기본을 갖추지 못하면 존경받는 선수가 될 수 없어요.

이따금 골프 소식이 스포츠 뉴스가 아니라 정치 뉴스로 분류돼 보도될 때가 있어요. 로비, 비리가 스포츠와 만날 땐 영락없이 골프예요. 정말 기가 막히지 않아요? 한국의 골프 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해요. 안타까울 따름이죠, 뭐.

7월, 제이미 파 오언스 코닝 클래식에서 우승하자 언론은 당신이 전성기 때의 기량을 회복했다고 보도했어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나아진 거죠? 음. 확실히 좋아진 것 같긴 해요.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았고, 무엇보다 샷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하지만, 우승했다고 전성기 때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상승세를 탔을 뿐이에요. 우승하기 위해선 실력도 실력이지만, 약간의 운과 분위기가 따라줘야 해요.

모건 프레셀이 6번홀에서 홀인원을 성공시켰을 때 ‘이번 대회도 내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단 얘기를 들었어요. 한동안 우승하지 못하면서 마음 고생이 심했나 봐요? 당시엔 우승에 많이 목말라 있었어요. 그러나 예전에 비해선 그런 조급증이 많이 없어졌어요. 여유가 생겼어요. 골프 치는 것도 더 즐겁고.

톰 크리비 코치가 “박세리가 전성기 때인 2001년의 실력을 다시 찾았다. 세계 랭킹 1위를 향해 달릴 만하다”고 말했던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먼저 코치님께 감사 드려야겠어요. 저 스스로도 기량이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당신 슬럼프의 가장 큰 원인이 하체에 있다고 말했어요. 하체가 지나치게 많이 움직여 스윙의 일관성을 떨어뜨렸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잃어 스윙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거예요. 전적으로 동감해요. 그는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코치예요. 저도 그 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최근에는 아주 만족스러워요.

제이미 파 클래식에서 보여준 우직한 플레이를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까요? 너무 뻔한 대답이지만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올해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던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공동 5위를 차지했어요. 나름대로 많이 준비를 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모든 게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10년에 가까운 투어 생활이 당신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10년은 제가 살아온 인생의 3분의 1이죠. 세상을 좀 더 넓게 보고 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돌아보면 아주 긴 여행이었어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요.

가장 존경하는 골퍼는 누구인가요? 이유는요? 타이거 우즈요. 그의 샷은 힘이 넘쳐요.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는 자신감은 사람을 매혹시켜요.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면 타이거 우즈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도저히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던 선수도 있나요? 그런 선수는 없어요. 영원한 승자는 없으니까요. 한때는 소렌스탐이 최대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특별히 없어요. 나 자신 정도겠죠. }

골프는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인생 그 자체죠. 골프를 한 것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없으며,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골프를 할 거예요.

LPGA 총 24승 그 중 메이저 대회 5승이에요. 숫자를 얼마나 더 쌓고 싶어요? 욕심에 끝이 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숫자를 의식하진 않아요. 내년 첫 메이저 대회인 나비스코 대회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명예의 전당에 오른 후 무엇이 달라졌나요?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룬 데 의미가 있지요. 골프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목표 중 하나가 명예의 전당 입성이잖아요. 남들이 저를 보는 것이 얼마나 달라졌냐는 제 관심 대상이 아니에요. 해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소중하고 기뻐요.

박세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요? 뭐라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국 골프계의 큰 획을 긋는,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