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 리그를 아홉 번 제패한 사나이

브라이언 롭슨도 에릭 칸토나도 폴 스콜스와 데이비드 베컴도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을 아홉 번 들어올리진 못했다. 그것을 해낸 건 지구상에 오직 라이언 긱스뿐이다.

입국할 때만 해도 기르고 있던 멋진 턱수염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묻자 그는 인터뷰 때문에 잘랐다고 말했다. 인터 뷰가 다 끝난 후 농담처럼 두 가지를 더 물었다.“다음 스케줄 장소로 당신을 데려가려고 안달인 저 사람들이 보여요?”그들은 꼭 종료 5분을 남겨두고 1대 0으로 뒤지고 있는 그라운드의 선수들 같았다. 당사자인 그와 에디터만 파고다 공원의 비둘기처럼 유유자적했다.“어떤 상황에서도 조급해해선 안돼요.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없지만, 제겐 현재의 약속이 가장 중요해요.”“오후엔 와의 인터뷰만이 유일한 스케줄이라고 들었는데 금세 뭐가 또 잡힌 거죠?”“고아원 방문이라고 해서요….”드세게 몰아치던 비의 공격이 잠시 누그러진 월요일 오후였다.

MBC 취재진이 시간을 어기는 바람에 우리의 만남이 30분이나 늦어졌어요. 7시로 예정된 FA CUP 결승전이 예고도 없이 지연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그 정도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가요?
30분이 지연됐든 하루가 지연됐든 개의치 않아요. 저는 항상 제 자신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있어요. 제게, 제 자신을 제어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전 세계 언론과 셀 수 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을 텐데요 주로 어떤 질문을 받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음…. 물론 이런 질문은 아니에요. 하하. 농담입니다. 후배들의 플레이가 어떠냐는 질문을 받을 때 기분이 좋아요. 저 역시‘영 플레이어’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옛날 생각이 나고 감회가 새롭죠. 맨유에서 뛰고 있는 후배들은 모두 훌륭한 재능을 가졌어요. 칭찬할 게 넘쳐나요.

지난해 맨유가 우승하는 데 있어 크리스티아누가 군계일학의 활약을 보여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만, 더 원대한 힘은 팀 전체가 하나 됐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해요. 똘똘 뭉칠 수 있던 비결은 뭐죠? 그라운드 위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 그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선수와 스테프 모두가 함께 경기를 한다는 마음가짐, 그것이 맨유의 정신이에요. 팀워크는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죠. 그게 없었다면 성공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크리스티아누가 맨유에 입단한 후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주전 경쟁에서 밀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시즌엔 캐릭까지 입단했고요. 그러나 맨유에서 당신의 위치는 여전히 확고해 보여요. 저는 제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이것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들과 경쟁했다기보단 서로의 장점을 교환했다고 생각해요.

퍼거슨 감독의 믿음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기용해주었고,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었죠. 축구 선수에게 서른 다섯이란 나이는 젊은 게 아니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몸은 느려졌지만 머리는 빨라졌어요. 미리 판단하고 움직이면 불필요한 동작을 많이 줄일 수 있어요. 굉장히 어렵고 극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도 저는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아요. 이미 여러 차례 그런 상황을 극복했던 적이 있거든요. 이런 경험을 젊은 선수들 과 공유함으로써 패기와 노련함이 잘 어우러진 팀을 만들게 된 거죠. 달라지는 팀을 보는 일은 상당히 흥미로워요.

동물적인 균형감각은 타고난 건가요? 아니면 노력을 통해 얻은 건가요? 예를 들어 왼발로 접고 들어가는 듯한 동작을 취하곤, 정작은 오른발로 치고 들어가서 왼발 슛을 날린다거나. 그런 동작에 속아서 균형을 잃은 수비수들이넘어지는 경우를 종종 봤어요.
선천적으로 타고 난 거예요. 아버지도 럭비 선수 출신이었는데 경기중에 몸이 굉장히 흔들려도 균형을 잃지 않았어요. 그런 유전자가 제게도 전달된 것 같아요.

한국엔 박지성의 팬말고 순수하게 맨유의 팬도 많아요. 그들은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부터 맨유의 팬이었고, 그들 중 대다수는 당신의 팬이죠.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나요? 아니에요. 한국에 와서 정말 놀랐어요. 맨유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구단이기 때문에 팬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 왔지만 앞으로도 자주 오고 싶어요. 깜짝 파티를 선물 받은 것 같아요.

무엇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까지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까요? 맨유가 세계 최강 팀이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그 팀의 작은 일부일 뿐이에요. 팬들이 제게 보내는 관심은 결국 팀에게 보내는 거예요. 저는 제 자신이 돋보이는 플레이에 욕심을 내지 않아요. 기록에도 관심 없어요. 팀에 헌신하는 것만이 기쁨이에요.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인정받았고, 리그에서 우승을 무려 아홉 번이나 한 당신에게도 시련의 시간이 있었나요? 누구든 지는 게 가장 싫겠죠. 저 역시 승리했던 순간보다 졌던 때가 기억에 남아요. 특히 큰 경기에 서 진 건 오래오래 저를 아프게 해요. 그것말곤, 심각한 부상이나 부침이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시련은 겪진 않았어요. 가족들에게 파파라치들이 따라붙는 등 사생활을 침해받을 때마다 실망을 느끼는 것을 제외하곤요.

누구에게 느끼는 실망인가요? 저는 팬들을 존중해요. 팬들도 저를 존중한다면 파파라치들이 유포하는 사진들에 흥미를 갖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마음 아픈 패배는 어떤 경기였죠? 유로 2004 플레이오프에서 웨일스가 러시아에 져 본선에 오르지 못했을 때가 가장 안타까웠어요.

잉글랜드는 당신이 웨일스가 아니라 잉글랜드 대표 선수로 뛰기를 희망했어요. 웨일스를 택한 게 후회됐던 적은 없나요? 선택을 달리했더라면 꿈의 무대, 그러니까 월드컵과 유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잖아요.제게 웨일스는 또 하나의 가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한 번 더 월드컵에 도전하고 싶어요?웨일즈 대표팀에서는 은퇴를 했습니다.

체코의 네드베드나 프랑스의 지단처럼 월드컵 즈음에 마음이 바뀔 가능성은 없나요? 그럴 것 같진 않아요. 이제 리그에만 충실하고 싶어요. 1~2년 정도 더 선수로 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려보는 건 아니에요 정신없이 웃다가도 그는 금방 진지해졌다. 표정이 멋지다고 말하자, 그는 사진은 더 멋질 거라고 응수했다. 잘난 척은 결코 아니었다.
노려보는 건 아니에요 정신없이 웃다가도 그는 금방 진지해졌다. 표정이 멋지다고 말하자, 그는 사진은 더 멋질 거라고 응수했다. 잘난 척은 결코 아니었다.

1993년 프리미어리그 데뷔 해에 우승을 했어요. 겨우 19세였는데도 불구하고 시즌 42경기 중 한 경기만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 출전했죠. 그때, 당신에게 놀라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감했나요? 데뷔 첫 해에 우승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이전까지 우리 팀은 26년 동안 우승컵을 들지 못했거든요. 이변이었죠. 그해에 우리 팀은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과 계약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정말 환상적인 사건 아닌가요? 제가 리그에서 무려 아홉 번이나 우승한 것 그리고 트리플 크라운(한 시즌에 자국 리그, FA CUP, 챔피언스 리그 모두를 우승한 것)을 차지한 것은 모두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첫 우승을 결정지었던 순간에 가장 먼저 끌어안았던 선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요? 물론이죠. 지금도 생생해요. 당시 주장이던 스티브 브루스였어요. 그 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던 것까지 기억나요. 정말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우승했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앞으로도 잊지 못할 거예요.

맨유를 거쳐간 선수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그 선수의 어떤 것이 왜 기억에 남죠? 셰필드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인 미드필더 브라이언 롭슨과 스파키 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블랙번의 감독 마크 휴즈요. 그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전사처럼 보였어요. 그들에게 많이 의지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맨유에 그들을 연상케 하는 선수가 있나요? 주장인 게리 네빌이요. 그는 열정과 헌신으로 무장된 선수예요. 모두 그를 믿고 따르죠. 같은 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좀 전에 말한 브라이언 롭슨이나 마크 휴즈말고도 맨유를 거쳐간 위대한 선수들이 많았잖아요. 그들 중 당신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던 선수는 누구죠? 제게 그런 선수는 존재하지 않아요. 저는 누군가를 넘어서기 위해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팀의 일원으로 축구를 하는 거예요. 팀에 도움이 되는 것만이 의미 있을 뿐이에요.

기자들이 당신에게 팀의 젊은 선수들 그러니까 박지성, 루니, 크리스티아누에 대해 묻는 게 지겹지 않나요?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루니나 호나우도처럼 유명한 선수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성도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 저는 젊은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 그런 유능한 선수들과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에 제 자신이 뿌듯하기도 하고요.

사람들은 왜 당신의 입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까요? 그들보다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이겠죠. 사람들은 그 들이 맨유의 눈부신 역사를 계속 이어가 주기를 바래요.

당신이 맨유 역사의 증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팀에 헌신했던 선수라는 의미라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까지 맨유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이 늘 저를 행복하게 해요.

당신과 동일 포지션에서 당신을 무기력하게 만든 선수가 있었나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기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던 선수는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예요. 이 질문의 답과는 조금 무관할 수 있지 만, 현재 맨유의 수비수인 비디치 역시 저를 놀라게 하는 선수입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수비수기 때문에 주목을 덜 받아 요. 그러나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죠.

낙천주의자의 풍선 그는 웃으라면 웃고 화내라면 화냈다.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가 귓속말로 이제 그만 가야해,라고 말해도 내색을 못했다. 순진한 총각처럼.
낙천주의자의 풍선 그는 웃으라면 웃고 화내라면 화냈다.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가 귓속말로 이제 그만 가야해,라고 말해도 내색을 못했다. 순진한 총각처럼.

경기 중에 동료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가 있을 텐데요,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영건이었을 때와 고참이 된 지금 어떻게 다른가요? 다른 선수들이 제 움직임에 대해 특별한 제안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들은 제가 어디로 어떻게 뛸지 잘 알아요. 나이가 들수록 공을 주고받을 때 무언의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텔레파시가 통하듯 서로 알게 되죠. 저 역시 어디에 어떤 선수가 있을지 알아요. 대부분의 경우 본능적인 움직임이 말을 대신하죠.

한국의 박지성 팬들은 그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또는 그 밖에 여러 이유로 팀 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진 않을까 걱정해요.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에요. 박지성이 좋은 동료로 인정받고 있나요? 립서비스 말고요. 팀워크를 중시하는 게 맨유예요. 아시는 바와 같이 지성은 성격도 좋고 팀 플레이를 중시하는 선수잖아요. 그는 입단한 후로 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왔고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왔어요. 그런 선수를 누가 싫어하겠어요?

웨일스 국민에게 당신의 의미는 각별하겠죠. 우리에겐 박지성이 그래요. 지성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야 할 것 같아요. 립서비스 아니에요.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한 미드필더로서, 미드필더가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우선 어떤 포지션이든 연습에 충실하고 성실한 게 일등 덕목이란 말을 하고 싶어요. 미드필더로선 창의성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골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언제나 머릿 속에 구상할 줄 알아야 해요. 기계적으로 움직여도 축구는 할 수있지만, 탄성을 자아내는 플레이를 펼칠수는 없어요. 의외의 움직임이 중요하거든요.

한국팬들은 당신이 신고 있는 축구화에도 관심이 많아요. 리복의 스프린트핏을 신고 있어요.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요. 또한 리복은 저의 오랜 파트너이기도 해요.

친선 경기를 하게 돼 있는 FC 서울의 주장 이을용 선수도 리복의 축구화를 신는다고 들었어요. 그는 당신처럼 좋은 왼발을 가지고 있어요. 하하. 누구 왼발이 더 강한지 한번 겨뤄봐야겠어요. 무엇이 당신을 뛰게 하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꾸준히 축구를 하면서 성실함이 몸에 밴 것 같아 요. 축구가 정말 즐겁고 맨유라는 팀에 있다는 게 행복해요. 열 번째 우승컵도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져요. 돈 많은 구단들 이 뛰어난 선수를 마구마구 사들이거든요. 이후에 그들이 어찌 되든 상관도 안 하면서 말이에요. 첼시를 보세요. 그런 팀에서 팀워크가 생길 수 있을까요? 은퇴하기 전에 또 한 번 우승컵을 들게 될진 모르 겠어요. 우승은 언제나 시즌 초반 어떻게 경기 하느냐에 달려 있어 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경험이에요. 우리의 젊은 선수들은 이번 시즌을 통해 좋은 경험을 했어요. 연이어 우승한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죠. 그들과 함께 뛰는 다음 시즌이 너무 기대됩니다. 먼 훗날 세계의 축구팬들이 당신을 어떤 선수로 기억하길 바라나요? 팬들을 기쁘게 하고 열광하게 하며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선수로 기 억되고 싶어요. 동료와 팬이 없다면 저도 축구를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