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옷장의 대혼란

E.L.컬렉션을 보는 내 관점은 내가 입을 수 있느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패션은 판타지보다 리얼리즘이어야 한다. 리얼리즘은 무척 흥미롭고, 결국 결론도 없어 보이니까. 하지만, 컬렉션에 갈 때마다 어떤 통계로도 나에게 딱 떨어지는 카테고리가 없다는 걸 느낀다.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룩에 관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지. 저 마른 애들은 왜 절지동물처럼 관절을 삐꺽거리며 라텍스를 씌운 듯 무표정하게 홀 안을 돌아다니지? 바지가 엉덩이에 겨우 걸쳐져 있는데다 벨트고리도 없는 옷을 나더러 입으라고? 벽에다 머리를 찧고 싶게 만드는 이 음악 같은 소음은 뭐지? 저‘캣츠’코러스 멤버처럼 기괴한 자들은 누구지? 이것이 개구리와 원숭이를 거쳐‘슈퍼 원숭이’가 된 우리가 입고 싶어하는 것들이야? 패션엔, 단순한 사물의 창조보다 더 순수한 가치가 있을까? 이 쇼엔 나중에라도 토론할 만한 철학적 시각이 있나? 패션이 진실이라면 신체, 양심, 머리, 심장과 일치해야 하는거아냐? …

아, 지나친 요구다. 6월, 밀란에서 열렸던 내년 S/S 남성복 컬렉션은, 동적(動的) 측면, 관능, 우아함은 여전히 중요한 이슈였지만 패션의 어떤 신(scene)은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망가져서 더는 손쓸 도리 없는, 주문이라도 하려면 청심환을 한 알 먹어야 할 수 있는 퓨전 레스토랑의 이상한 메뉴 같다기보다는… 패션은 세부로 들어갈수록 다분히 지루해진다. 이젠 오히려 정교한 트위드 같은 섬유의 질감, 실과 천의 릴리프에 대한 연구가 패션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이번 컬렉션의 주인은 질 샌더의 새 얼굴도 미우치아 프라다 그녀도 아니라, 쇼장에서 본 일본 <레온>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내 생각에, 남성적 우아함이란 천과 색의 혼합에 대한 감각을 통해 드러난다. 고이즈미처럼 컬진 머리, 하늘색 수트와 작고 뾰죽한 깃의 스트라이프 셔츠, 반바지, 종아리까지 치켜올린 까만 양말, 굽 좀 있는 스니커즈, 성장(盛裝)한 소화시대 어린이 룩은 나에게도 옷장의 대혼란과 같았다. 예순쯤 됐을까, 쇼핑할 돈과 의사가 있고, 마틴 마르지엘라 셔츠를 고를 센스와 안목이 있다고 해도, 질서를 갈망하며 후지게 입을 수밖에 없는 그 나이의 표준과는 일찌감치 상관없었다. 마르니쇼에서, 내 건너편에 앉아 (필시 밀란 시간과 일본 현지 시간을 번갈아 보기위해) 오른손엔 크로노스위스 타임마스터와, 왼손엔 벨 앤 로스, 하나같이 빅 사이즈 시계를 찬 그 양손을 보며 마지막으로 웃었다.

쇼를 보기 위해 고작 며칠 자리를 비웠는데도, 서울은 더 습하고 더 지쳐 보였다. 도시 전체가 구약에나 나옴직한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에 이른 것 같았다. 천지에, 자기가 더는 한창 때가 아니며, 늙어 간다는 사실을 못 견디는 사람들과 블로그에 중독된 사람들뿐이라는 게 왜 이렇게 새삼스러울까. 다들 하는 일이라곤, 말 한마디 안하면서, 죽도록 떠들면서, 누가 제일 예쁘고 웃기는지에만 관심 쏟으면서, 성격을 잃어버린 도시에 매달 수백만원씩 갖다 바치면서, 먹고 마시는 것말고는 없다. 단 하나의 생을 살고, 단 한 명의 섹스 파트너를 가지며, 단 하나의 얼굴로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제한적인지, 하지만 매 시즌마다 쏟아지는 수천 벌의 옷가지들이 얼마나 황홀하고도 숨막혀 죽을 지경인지, 숨을 쉬고 싶기나 한 건지, 그 모든 게 알 수 없는 고문이 되었다. 도대체 이런 흐름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떻게 삽시간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누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까? 이 모든 게 이 세대 전체에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초콜릿 공장 같은 패션 도시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피곤한 현실이라는 또다른 판타지가 기다린다. 하지만 현실이야말로 가장 응집된 형태의 판타지이다. 현실은 판타지의 일종이되 더 집적적이고 하드코어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명백한 사실은 언제나 모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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