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떠나요

이 인터뷰에는 너무 많아 미처 다 적지 못한 말줄임표와 침묵이 있다. 그 행간 사이로 정진영은 현재를 훌쩍 떠나고 있었다.

수트는 DKNY, 셔츠와 구두는 돌체앤가바나, 타이는 타임 옴므, 트렁크는 글로브 트로터.
수트는 DKNY, 셔츠와 구두는 돌체앤가바나, 타이는 타임 옴므, 트렁크는 글로브 트로터.

 

<날아라 허동구>는 착한 영화라고 들었다.
진정성이 보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눈물이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다. 감정은 있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아, 이거 영화를 안 보신 상태에서 얘기하려니 왠지….

왠지 거짓말 같은가? 나도 ‘정말 그럴까?’라고 속으로 의심하고 있다.
영화 보고‘에이, 이게 뭐야?’그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하.

그런데 말이다. 진정성 있는 영화라는 판단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구분이 참 애매하다. 패륜 다룬 영화라 할지라도 만드는 사람, 감독을 비롯한 제작자와 참여자들이 그 얘기에 어떻게 직면하고 있는가에 따라 진정성 판단이 될 듯하다. 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영화 보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난 <날아라 허동구> 참 좋다. 사실 난 항상 내가 찍은 영화를 다 좋아했다. 한참 지나야 객관적으로 보이고.

오늘 홍보 제대로 한다. 배우에 대해 우리는 악역이나 잔인한 운명에 의해 좌초되는 역할을 맡으면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고, 발달 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나 일상적인 역을 연기하면 덜 기대하게 된다. 잘못된 건가?
음, 뻔해 보이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이 영화는 작년 8월에 찍었다. 그래서 사실 내용을 다 까먹었다(웃음). 10년째‘얼레벌레’영화 배우로 밥을 먹고 살고 있는데, 자식을 둔 아빠 연기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건 나니까. 근데 그런 영화 만들어지기 힘들다. 흥행 코드가 없어서. 사실 난 이 영화도 대기업에서 투자받아 제작된 게 너무 신기하다.

김상경은 한 인터뷰에서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이유가 어머니가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족들, 친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라는 점도 때론 중요하게 작용할 것같다. 특히 자기 아들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것.
그건 아마 나만이 아니라 애를 둔 배우들은 다 하고 싶은 영화일 거다. 이 영화가 아마 우리 아들이 극장에서 보는 최초의 내 영화가 될 거다.

인터뷰 전 여기저기 수소문해봐도 당신에 대해서는 좋은 얘기뿐이더라. 어떤 배우는 안성기에 대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항상 반듯할 수 있냐며 무서울 정도라고 했다. 정진영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 때문이다. 하하. 안성기 선배님이야 술도 안 드시지, 완전 보살 나셨지 뭐. 사리 나올 거다, 아마. 나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다.

배우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다소 흐트러지거나 신경질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하는데,그런 말로 배우를 정의한다면 당신은 예외다. 다음 세상에 맘대로 살 수 있는 배우로 태어나고 싶어도 당신 같은 배우로 태어날까봐 겁난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반듯하게 살아야 할 것같아서.
영화 시작한 게 나이 먹고 난 뒤여서 그런가 보다. 글쎄, 바르다는 말을 좋아하긴 한다. 심지어 우리 아들 이름도‘단오’인데 바를 단에 또 오. 바르면 부끄럽지 않다. 다소 좀 부족해도. 부끄러운 게 있으면 다른 게 많아도 부끄러운 거다. 에이, 모르겠다. 배우는 배우지 뭐. 작품에서 보는 그대로 보면 된다.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거 아니겠나? 우리나라는 유교 영향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아직도 원칙이 없는 사회여서 그런지 배우에게 자꾸 다른 원칙을 들이댄다. 그 사람 착해? 그 사람 좋아? 그 사람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배우를 평가하는 기준이 그건 아닌 것 같다. 배우는 좋은 배우라는 평가가 제일 좋은 평가이지 착한 배우라든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배우는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그 생각을 과도하게 하는 편이다. 반발심일지도 모른다. 하도 바르다 바르다 그래서. <파워 인터뷰>에 출연해서 좋은 사람 되려고 연기하는 거 아니다, 라고 했다가 혼났네. 편집해 붙여놓으니까 이상한 뉘앙스로 읽혔는지, 몇몇 사람들이 나보고 웃긴 놈이라고 하더라.

그러면 당신은 좋은 배우인가?
그렇게 치고 들어오다니….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돼야지. 조금씩 나아지겠지.

즐기는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못 따라간다는 말도 있으니까. 이준익 감독은 당신을 ‘현장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배우’라고 말했다.
재밌다. 거듭하니까 여유도 생기고. 영화 촬영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갖고 새로운 캐릭터 맡아서 새로운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온갖 일이 다 벌어진다. 밤새도록 술도 마시고 무수히 많은 엑스트라 만나기도 하고 무수히 많은 구경꾼 만나기도 하고. 영화는 그러니까 사적 여행기인 셈이다.

여행 가면 집에 돌아오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않나? 몸도 너무 피곤하고 보이는 것도 이제 다 똑같아 보이는 그런 순간들.
3개월 찍으면 돌아오는 여행이니까, 괜찮다. 즐겁다. 원래 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특히 혼자 하는 여행. 3개월 간의 영화 촬영에 홀로 떠나는 여행까지.

아내가 뭐라고 안 하나?
많이는 못 간다. 자주 가면 집에서 쫓겨난다. 아내가 혼자 어디 간다고 하면 말리지 않는다. 필요한 걸 아니까. 올 초에는 네팔도 갔다 왔고.

난 작년에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네팔 다녀왔다. 당신은 산이 거기 있어서 갔나?
난 비행기가 뜨길래 갔다(웃음). 직항이 생겼길래. 문화유산을 좋아해서 앙코르와트도 혼자 갔고 윈남성도 혼자 갔고 교토도 혼자 갔다. 네팔에도 문화 유산 많더라. 벅터푸르 가봤나? 거기 참 좋지?

여행은 정작 그 당시보다 지나고 난 뒤에 그때를 떠올릴 때가 더 좋더라. 지금 돌이켜 봤을때 <날아라 허동구>의 사적 여행에서는 어떤 즐거움이 있었나? 괴로움도 있었을 테고.
<왕의 남자>는 감정이 많이 쌓이는 영화여서 힘들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과도한 감정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보통, 영화 찍기 전에는 살 조금 빼놓고 시작한다. 이번엔 치킨집 사장 역이라 그럴 필요도 없고 치킨 실컷 먹고 좋았다(웃음).

촬영 전에 계산하고 분석하는 스타일이었던 당신이 <왕의 남자>에서는 그 준비 과정을 다 버리고 현장성과 즉흥성에만 기대 연기했었다. <왕의 남자> 후 연기 패턴이 바뀌었나?
음, 잘 모르겠다. <왕의 남자> 때는 이준익 감독님과 잘 아니까 미리 공부 안 하고 찍었다. 서로 믿으니까. 서로 의심 안 하니까. 지금 찍고 있는 이준익 감독님의 <즐거운 인생>에서도 그러고 있긴 하다. 이번 영화는 신인 감독이니까 미리 영화에 대해 얘길 많이 했다. 확실히 예전엔 대사 하나하나 다 붙여놓고 달달 외워서 갔다. 역할 자체도 균형을 맞춰주고 튀지 않는 역할이라서. 그러려면 계산을 다 해놓아야 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몇 가지 경우마저 머릿속에 넣어놓아야 한다. 반면 내가 치고 나가는 역할일 경우엔 미리 준비해가면 영화 온도가 떨어지니까 안된다. 아직은 많이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당신처럼 이성적이고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믿고 연기할 수있었나? 한번 사람과의 신뢰를 구축하면 당신에게 그 관계는 영원한 편인가?
사람 관계는 좀 그런 편이다. 작업하면서 이준익 감독에게 신뢰가 쌓인 거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웃음). 영화는 친목회가 아니다. 친해서 영화 같이 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바라보는 각도가 같거나 최소한 비슷해서 같이 하는 거다. 이준익 감독님은 좀 더 멋진 표현을 쓰는데 ‘마음이 맞는 게 아니라 뜻이 맞다’ 고 하더라.

근데 이준익 감독말고 다른 감독한텐 연락이 안 오나?
이준익 감독님이 항상 내 스케줄을 빼노라 하니까(웃음). 다음에 무슨 영화야, 그러면‘네,알았어요’그런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그러니까 일단 시간을 빼놓아야 한다. <왕의 남자>도 1년 걸렸고 <즐거운 인생> 전에 <매혹> 한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그게 유보된 상태고. <즐거운 인생> 끝나고도 이준익 감독님의 차기작 연말에 촬영 들어가기로 했다.근데, 난 <매혹>은 꼭 찍은 것만 같다. 계속 감량하고 몸 만들어서 그런가?

벗는 신이 많은가 보다. 그래서 내심 기대했는데. 당신도 기대가 많았나 보다.
벗는 것 투성이다. 감량하고 정신 학대하고 있었는데 영화가 좀 세서 좀 더 묵혀야 할 것같다. 감독님이 준비가 되면 하겠지.

배우의 ‘몸뚱아리’가 감독 것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영화는 감독의 의도 덩어리다. 감독의 의도가 없으면 표류하고 배우 연기도 감독이 하는 거다. 감독의 의도대로 안 하면 안 된다. 영화가 무너진다.

이준익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라는 매체에서 그 판을 가지고 기존의 이야기 체계를 뒤집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당신과 각도가 비슷한가?
그 분은 좀 어그레시브하다(웃음). 나는 순하다. 그래서 자꾸 나보고 우파라고 한다. 영화는 내 일이다. 무엇을 위해서 영화를 하진 않는다. 영화를 위해서 영화를 한다.

언제까지 영화를 위해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오늘을 살다 보면 미래가 되는 거겠지. 오늘 사는 것도 과거 때문이고. 난 영화 할 줄 몰랐다. 근데 돌이켜 보면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앞에 깔아놓은 게 있었네, 그런 생각 한다. 그렇다고 또 영화배우로 살려고 예전에 연극이니 뭐니 한 건 아니었다. 과거 살았으니까 오늘을 산다. 어느 날 갑자기 관둘 수도 있고 쫓겨날 수도 있을 거다.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게 인생 아니겠나?

지리산 기슭에서 10년간 도 닦은 도인과 선문답하고 있는 느낌이다. 화도 잘 안 낼 것 같다.
거의 안 낸다. 참으면 된다. 한 템포 지나가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된다. 예쁜 옷을 입고 길을 가는데 차가 세게 지나가는 바람에 물이 튀었다고 하자. 화 나지 않나? 하지만 내일은 괜찮다. 갈아입으면 되니까. 시간을 그렇게 당기면 된다. 화 내면 자기에게만 해롭지.

조금만 더 있으면 안성기처럼 사리 나올 것 같은데….
암만 해봤자 사리의 수준이 안성기 선배님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사람인데, 죽어도 하기 싫은 게 있지 않을까?
죽어도 하기 싫어도 사람은 하긴 해야 한다.

왜?
…. 그래도 8:2 정도라면 살만하지 않을까?

8이 하고 싶은 일인가?
아니, 2가 하고 싶은 일. 그 2마저 없으면 괴로운 거고.

너무 조금 아닌가? 반반은 되어야 살 맛 나는데….
난 그것보다는 많은 것 같긴 한데….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난 아주 행복한 케이스다(웃음). 보통은 그러기 힘들다. 8:2만 돼도 살 만하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 <GQ>는 남성지니까 애 아빠들은 혹시 안 보는 거 아닌가? <날아라 허동구>는 애 아빠가 아니면 완전히 공감하긴 힘들 수도 있다.

애 아빠건 아니건 독자들은 당신처럼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을 보고 싶어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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