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남자와의 인터뷰

보이는 것과 실제가 영 딴 판인 배우들을 만나면 좀 웃겼다. 그런데 두 가지가 너무 똑같은 배우를 만나니 머릿속이 수선스러웠다. 머리를 열면 긍정적인 세포가 가득, 가슴을 열면 낙천적인 세포가 이만큼인 지진희를 만났다.

티셔츠는 마크 제이콥스, 카키색 팬츠는 지 스타, 검정색 비니는 줄리어스, 목걸이는 닐 바렛 by 에크루

오늘 인터뷰를 네 번 했다고 들었다. 하루에 다섯 번이나 하는 인터뷰, 질리고 물리겠다. 영화 홍보를 위한 인터뷰라서 질문도 비슷할텐데, 괜찮나?
하기로 약속한 거니까 재미있다고 계속 생각한다.

반복해서 들은 질문이라 더 이상을 싫은 것이 있다면 말해라. 안 묻겠다.
어떤 인터뷰를 해도 “뭐 재미있는 에피소드 없나?”,“어떻게 하게 됐나?”같은 질문이 가장 많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데 에피소드는 별로 없을 수밖에 없다. 일부러 에피소드를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없으면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뭐 없나?”할 땐 좀 그렇다.

묻는 사람이 당신을 불친절하다고 느끼겠다.
친절하게 말한다. 미안하기도 하고. 힘들었던 점이 있냐는 질문도 그렇다. 나는 사실 힘들지 않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안 한다. 힘들었더라도 조금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또 더 힘든 사람 많이 있는데 뭐가 힘드나 한다. 힘든 게 아니라 재미있는 거야, 운동하는 거야, 노는 거야라고 다른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안 힘들다. 이번에 <수> 하면서 엄지가 뒤로 꺾이고 인대가 늘어났다. “고생 많이 하셨죠?”하는데 나한테는 고생이 아니었다. 이 영화 하면서 두세 군데 부러지고 입원하고 그럴 줄 알았으니 고생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없으면 없다, 고생이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종종 오해를 받기는 하지만.

오해 받은 적 있나?
영화 같은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다툴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싸우다 보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발전적인 싸움이 아니라 감정적인 문제가 되면 곤란하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면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그쪽의 문제다. “너 변한 거 같다”’그러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변한 거다. 모르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면 변했다고 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전부를 몰랐던 것이다.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해를 하나? 이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난 널 이해해? 웃기지 말라고 하고 싶다.‘알 것 같아’정도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이해와 가장 비슷한 거 아닐까?

이해가 불가능하다면 이렇게 맘 놓고 솔직한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인정하면 쉽다. 이해가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솔직한 것도 인정하고 아닌 것도 인정하고. 생각의 차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 세상이 바뀐 것에 내가 변하려면 힘들다. 아내에게서도 새로운 것을 보면, 이런 면이 있었네, 한다.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다.그게 맞다.

솔직한 게 힘들지 않나?
아니다. 솔직한 게 힘이 된다. 결국에는‘정의’가 승리한다.

이번에는 정의의 승리인가? 인터뷰마다 교육적인 명제를 말한다. 어느 인터뷰에서는“최선을 다하면 다 된다”고 말했던데, 최선을 다하면 다 되나?
물론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된다.

당신은 그래서 배우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물론이다. 끝까지 가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봤다는 것은 정상을 의미하나?
아니, 과정의 끝을 말하는 것이다. 계획부터 창작물을 만들기까지의 전반을 해 본 사람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것은 직업을 여러 번 바꿔 보고 난 후에 든 생각인가?
누구나 그렇지만 나는 누구인가? 뭐가 될까? 그런 질문에 스스로 답이 안 나왔다. 이름도 못 남긴 것 같고. 왜 사는 건가? 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죽어야겠다, 했다. 시도도 해 보고.

정말 시도도 했나?
안 해본 사람 있나? 죽어야지 마음 먹고 지내던 그때가 포토그래퍼로 일할 때였는데, 자동차 사고가 심하게 났다. 자동차 반 토막이 날아가는 엄청난 사고였다. 앞 덤프 트럭이 순식간에 다가오는데 그 순간 슬로 모션으로 살아온 풍경이 정말 눈앞에 펼쳐졌다. 그 찰나에 말이다. 영화와 똑같았다. 그런데 살았다. 함께 있던 스튜디오 실장과 나 모두 멀쩡했다. 자동차가 이렇게 되었는데 다친 사람이 없냐고 앰뷸런스 기사가 황당해했다. 그러고는 바로 근처 식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얼이 빠져서였는지 소주 네 병이 완전히 맹물이었다. 밥집 아줌마가 혹시 사고났냐고 사람이 죽었냐고 물었다. 낮에 여기 와서 낯선 사람이 술을 먹을 땐 사망 사고가 있을 때라며 참 다행이라고 했다. 식당에서 나왔는데 그 와중에 봉고차가 뒤집혀서 할머니와 애가 죽어 실려가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실장님, 우리가 할 일이 남았나봐요.”그때부터 열심히 살았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좋아해주고 그러다 오늘인 것이다. 분명히 내가 살아온 이유가 있고 살아갈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늘 걸어가다가 간판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죽음도 삶의 한 순간이라 생각하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자주 말한다. 죽으면 어떻게 하라고, 시신도 기증하고, 뭐 이런 식으로.

가족 생각은 안 하나?
내가 죽으면 이 가족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준비해 줄뿐이다. 그리고 말한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그 말이 더 슬프겠다.
사람이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해 무서운 거다. 다른 세계일 뿐, 귀신이 무서운 것은 몰라서 무서운 거다.

알아도 무섭다.
가위만 눌려도 무서우니까. 이렇게 내 얘기만 막 해도 되는 건가? 질문의 꼬리에 꼬리를 문 이런 인터뷰 좋아하지만. 무엇을 물을 차례였는데 내가 샌 건가?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로 당신은 종종 호명된다. 물론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나?
고마운 일이다. 이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고등학교 때 나 역시 선망하던 형이 있었다. 남자다움에 대한 선호였는데, 그런 것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나는 남자답지 않은 배우는 별로 좋아지지 않는다.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신일룡 씨다. 혹시 아나? 그분이 가장 멋있다.

‘쾌남’광고를 하던 배우 아닌가?
맞다. 선이 굵다.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닮고 싶어했다. 나에 대한 호감은 <대장금>의 민정호의 이미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민정호는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문무에 능하고 한 여자를 끝까지 지키고 당시의 절대 존재였던 왕이 틀렸다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멋진 남자. 그 이미지로 나를 보는 데다가 금융 광고의 믿음이 어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 것 같다.


푸른색 티셔츠는 제임스 퍼스 by 분 더 숍 맨, 데님 팬츠는 더 랩

당신은 너무 잘생겼다거나, 같은 세상의 사람 같지 않다거나 하는 배우는아니다. 장동건이나 정우성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면 ‘헉’하고 놀라 아무말도 못할 것 같지만 당신을 만나면 “어머 안녕하세요”할 것 같다.
그러기 전에 나는 내가 먼저 인사한다. “어디 갔다 오세요?” “학교 갔다오니? 왜 이렇게 빨리 와? 너 땡땡이 쳤니?” “장 봐오시나봐요, 들어드릴게요.”그러면 대꾸한 후,“어?”한다. 배우의 존재감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것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배우는 내 직업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직업인이다. 물론 특별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끝나면 가장이고 친구고 이웃집 남자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당신에게 이미 구획되어진 이미지는 당신을 그렇게만 살게 두지는 않을텐데?
중고등학교 땐 욕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러다 한 할아버지가 당시 우리가 하는 욕을 똑같이 하면서 싸우는 것을 봤다. 정말 큰 충격받았다. 내가 이러고 살다간 저런 모습이 될 거고, 누가 보면 인간으로 안 보겠구나 생각했다. 그 후로 욕을 안했다. 그러다 <H> 찍으면서 욕을 하니까 내가 변하더라. 이거 무섭다. 잘못하면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할리우드 배우들은 계약할 때,‘한니발 렉터’같은 역할을 하면 정신과 치료 몇 개월까지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있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하다. 몇 개월간 죽이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그 기간에 습득된 현실이 진짜 현실을 파고든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지만 넣다 빼는 것을 잘 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 내 목표다. 일은 일, 가정에서는 가정. 이 구분을 정확하게 짓자고 생각했다. 현실이 기본이고 거기서 시작된다.

나 자신보다, 내 이미지대로 살아야 하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윤리일 수도 있다. 그럴 때 나와 내 이미지가 상이하다면 힘들 것 같다.
술을 좋아하니까 술 먹고 실수할 수도 있고, 뭐 똑같다. 하지만 이미지가 있으니까 나를 믿고 광고 모델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참는다. 잘못하지 않았어도 잘못했다고 넘어간다. 처음엔 스트레스였지만 계속 참다 보니까 익숙해진다. 종교는 없지만 신의 존재는 믿으니까 이렇게 생각한다.‘신이 나를 정말 사랑하셨구나. 올바로 살라고 요소요소에 별 장치를 다 해 놓으셨구나’하고.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이 긍정적일 수 있나?
언젠가 방송에서도 한번 말했었는데 중고등학교 때 늘 인상 쓰고 그늘져 있는 애였다. 그러다 책을 봤는데 행복해지는 비결로“거울 보고 웃어라, 샤워할 때 노래해라, 뭐해라 뭐해라”너무 많았다. 만날 똑같은 소리 지겹고 짜증났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게 뭐길래? 그래서 해봤다. 일어나자마자 괜히 거울 앞에 서서 씩 웃었다. 진짜 웃겼다.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해본 김에 샤워하며 노래도 했다. 그런데 하루가 즐거웠다. 표정이 밝고 즐거운 나를 보고 남들도 즐겁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뼛속까지 긍정적인 것, 부모님의 영향인가?
어머님이 굉장한 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루는“담배 피냐? 술은 마시냐? 여자친구는? 당구는?”하고 물으시는 거다. 실제로 하나도 하고 있는 게 없어서 다 아니라고 했더니“너는 사내 새끼도 아니다”라고 하시더니 다음날 어머니 친구 딸과 사귀라며 데려오신 분이다. 천원 달라면 이천원 주셨고, 십만원 달라면 이십만원 주셨다. 왜 더 주냐고 물으면 남자는 그래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다 십만원 달라는 데 오만원 주신다 하고, 내일 달라고 했는데 모레 주시겠다고 하는 날이 왔다. 아버님 사업이 기울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내가 더 벌어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시간이 더 가면 지금보다는 더 작은 역할이 올 수도 있다.
그 역할 너무 기대된다. 세월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주연한 게 뭐 있나?

<오래된 정원>?
조연이다. 염정아가 주연이다. 처음 시사를 하는데 주인공인 나를 보며‘아 좋다’했다. 그런데 중간 되니까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서운했다. 내가 못했나 보다 하고 속상했다. 뒤로 가니까 완전히 염정아가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이게 맞다, 이게 정답이다’라는생각이 들었다. 감독에게 엄지를 치켜올리며 정말 멋지다고 말했다.

당신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 중 ‘무난하다’는 어떤가?
무난하다는 건 재미없다. 튀지 않는다는 단점의 측면과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장점의 차원이 있다. 물론 나는 장점의 쪽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도 <퍼햅스 러브>, <오래된 정원>도 할 수 있다. 무난해서 다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국민 배우’같은 소리에 대한 욕심도 있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훗날 죽은 다음 한 번에 떠오르는 누구가 아니라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지”라는 정도가 너무 좋을 것 같다.

<수>는 그런 당신에게 어떤 영화인가?
그런 과정 중에 한 영화일 것이다.

정밀한 전략이 있나?
전략은 회사가 하는 거고 나는 함께 생각해볼 뿐이다. 다만, 텔레비전이라는 게 틀기만 하면 나오는 거라면 영화는 관객이 자신의 재화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이는 내 이미지가 영화에도 계속 나온다면 재미없지 않겠나? 그런 걸 함께 생각하고 조율할 뿐이다.

대중이 외면하는 시기가 온다면 바로 다른 직업을 취할 건가?
물론이다.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고 평생 직업이라 생각하지만 더이상 원하지 않는 배우가 된다면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방에 있는 금속 공예 관련 책을 봤다. 벌써 바꿀 준비를 하는 건가?
취미생활이다. 50대에 하고 싶은 거 준비하는 거다. 공예, 디자인,사진 등. 머물러 있거나 생각이 멈춰 있으면 가라앉는 느낌이 많아서 새롭게 반성하고 실천하고 그런다.

정말, 어떻게 살고 싶나?
내 좌우명은‘착하게 살자’인데 이것을 들으면 대체로 되게 웃는다.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착하게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인데, 사람들이 웃는 것 보면 맥 빠진다. 진짜 힘들다. 착하게 사는 것은.

당신은 정말 착한 남자인가?
좋은 남자다. 좋은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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