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루이스 부르주아와의 인터뷰

2008.10.28GQ

루이스 부르주아는 올해 95세가 되었다. 현대 미술 신에서 너무 유명하고 너무나 소중한 아티스트인 그는 1997년 이후 일체의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 건강과 스케줄 상의 이유로 인터뷰 및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자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와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들었던 대답은 “불가능한 일이야. 포기해”였지만, <GQ>는 기어코 그를 만났다. 그의 판화를 15년 넘게 제작해온 뉴욕의 저명한 딜러 ‘할란 앤 위버(Harlan & Weaver)’의 도움이 컸다.

뉴욕 첼시에 있는 팥 앙금 같은 빛깔의 집에 도착했다. 7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벨을 눌렀다. 경계심을 잔뜩 얼굴에 담은 한 중년 여자가 이중 유리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3시 정각에 다시 오세요!” 일요일 오후 3시 정각. 루이스 부르주아의 집에서‘선데이 살롱’이 열리는 날이다. 미대생, 화가, 시인들이 집 앞에 모여들었다. 23명이 각자의 작품을 들고 부르주아의 집에 한 줄로 서서 들어갔다. 좁고 낡은 현관 복도를 지나자 더 낡은 거실이 나왔다. 조그만 의자가 네모꼴로 놓여 있었고, 실내는 저녁처럼 어두웠다. 거실은 마치 두 개의 뇌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 같다. 오른쪽엔 책장이 벽 한가득, 왼쪽 베니어판에는 부르주아의 전시 스크랩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티스의 말년 작업인 오려진 색종이가 유일한 다른 작가의 작품인 듯했다. 부르주아의 조그만 작업 책상엔 손님들을 위한 음료와 술, 초콜릿이 준비되어 있었고 한편엔 수북이 쌓인 미술 도구들과 서류 더미들이 있었다. 4개의 고물 램프들이 각자의 빛을 밝히고 있었고 오래된 철제 캐비닛 더미들은 책상을 지지했다. 책상 뒤 편엔 바나나 우윳빛 페인트칠이 바랜 개선문같이 생긴 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의 간유리 문은 거실과 부엌을 구분짓고 있었다. 부르주아같은 대가가 이런 곳에서 산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집이었다. 그는 평생을 아주 부유하게 산 사람인데, 작업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일절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작가다운 열정이 전해졌다(그는 고령임에도 작업량이 상당하다). 세련된 내면에 더 마음이 끌리는 이곳이 나는 차츰 좋아졌다.
3시 45분, 모마(MoMA)의 전 큐레이터이자, 상파울루비엔날레 디렉터였던 파울로 헐켄호프(현 리우데자네이루 MNBA미술관 디렉터)의 도움을 받으며 부르주아가 워커에 의지해 천천히 거실로 들어왔다. 130cm 정도의 키에 바짝 마른 몸, 가느다란 발목엔 검정 양말과 고동색 운동화를 신었다. 은회색 카디건, 흰 티셔츠, 금빛 귀고리, 흰 모자…. 그가 빨간 모직 담요를 무릎에 덮으며 책상 옆 파란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초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사람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반짝거렸다. 마음씨 좋은 할머니 같다가도 얼핏 스치는 인상은 날카롭고 다부졌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23명의 사람들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파울로는 의견을 이야기했다. 방 안의 열기는 대단했다. 부르주아는 딱 한 번, 친구인 필리스가 시를 낭송할 때 박수를 쳤고 그 외의 작품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오케이”,“ 화인!”,“베리 나이스!”,“ 댓스 굿!”같은 짧은 말들을 성의있게 소리냈다. 저녁 6시 30분, 인사를 하고 손때 묻은 가죽책 같은 그 집을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페미니즘 작가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있다. 때때로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당신이“난 페미니즘 작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언짢아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내 작품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근본적인 뿌리는 아니다. 어머니와 남편은 페미니스트였고 두 아들들(입양한 맏아들을 제외한) 역시 그렇다. 그런 까닭에 작업을 하면서도 다른 여성 작가들이 겪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당연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여성 미술’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그것은 부조리한 개념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많은 것들은 성차별이라는 개념 이전에, 내가 경험한 고통, 고독, 상처, 증오, 연민 등을 통해 얻은 감정의 집합이다. 나는 내가 알고 경험한 것만 다룬다.

잠깐, 당신이 작품을 하던 초기엔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지않았나?
그건 큰 실수였다. 하지만 난 한 번도 어떤 집단이나 유파에 속해서 작업하지 않았고 다른 화가들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고독한 장거리주자로 살아왔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활동하던 그 당시, 1932년에서 33년으로 넘어갈 무렵, 파리에서의 내 관심사는 아르데코 그래픽 디자인이었다. 나는 초현실주의는 질색이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모든 것을 그저 농담으로 만들어버린다. 난 인생은 비극이라 여긴다. 하루하루 생존해 나가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낙천주의자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스타작가 찾기에 급급한 현대 미술계에서 당신을 구별해 주는 가장 큰 특징은 당신의 작업이 진실되고, 어떠한 믿음을 주며, 꾸준하고 안정적이며 여유로운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내 작업은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투쟁을 위해 존재한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작가로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남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예술의 배후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나는 사람들을 서로 소통하게 이끌어주고 싶고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예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자,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나는 낙천적이며 예술의 이러한 순기능을 믿고 여러 상황을 실제로 좋아지게 만들었다. 내게 낙천주의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예술은 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자 나만의 공포와 두려움을 볼 수있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직시하고 알아야만 한다. 그런 고찰이 당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연도를 말한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 어머니가 돌아가신 1932년 – 을 시작으로, 내가 결혼한 1938년, 그리고 두 아들이 태어난 1940년과 1941년, 친아버지가 돌아가신 1951년, 남편과 사별한 1973년이다.

당신은 1911년 크리스마스날 태어나 올해로 95세가 되었다. 거의 한 세기를 살면서 차분히 생을 쌓아온 당신에게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묻는다면 실례일까? 사실은 추억에 관해 묻고 싶지만.
추억? 추억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준다. 감정의 기록들은 현재를 사는 데 도움을 준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생산성 없 는 노스탤지어와는 구분하고 싶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닌 실존주의자니까.

그렇다면 모순과 공포 사이엔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아무도 자폭이나 자살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에 대한 예방대책과 각자의 공포감을 해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불안한 마음은 당신이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을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유년기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들었다. 많은 드로잉들에 문장들이나 메모, 어떤 주장들이 적혀 있다. 그것들은 자기 확인인가 아니면 특정 누군가를 향해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 또는“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당신을사랑한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나?”라는 글귀들 말이다.
때때로 나는 드로잉의 뒷면에도 내면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글을 써놓곤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감정적인 리듬이나 감동, 직감 같은 것들을 담은 추상적인 드로잉에 그런 글귀를 적곤했다. 내가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 원천에 도달하게 만드는 내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시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글쓰기가 작품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작품은 내가 설명할 필요없이 시각적인 것 자체로 존재해야 하고, 작품 자체로 말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유년시절은 당신을 예술가로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나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도심에서 자랐다. 아주 어린 소녀일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술 수업은 학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또 그것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중세 태피스트리 복원작업을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업을 돕는 일은 내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고 피할 수 없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계속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예술가라는 직업은 그저 식충이나 기생충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때가 몇 살이었나?
열두 살. 당시 토요일마다 일하러 오기로 한 인부가 오지 못하면 일이 밀린 어머니는 패닉 상태였고, 내게“루이스, 좀 도와주겠니?”라고 물어보셨다. 나는“네, 기꺼이 돕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중세 태피스트리 복원을 도울 정도라면 열두 살 소녀의 실력이 상당했다는 이야기인데,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던 건가?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미술시간에 결코 남보다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추켜세워주거나 믿어주면 상대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개처럼 일하고 능력 이상의 성취를 하는 학생이었다. 실력은 모자라도 나는 펜을 어떻게 사용하는 줄은 알고 있어서, 일단 태피스트리의 도안을 그리는 드로잉 역할 등으로 가업을 도왔다. 이때 깨달은 철학은 내 작업에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는데, 예술가는 늘 어디에서나 유용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항상 당신의 작품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어머니는 1918년‘스패니시 플루’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잘못 알려진 전염병에 걸리면서 섹스에 대한 관심도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권위적인 바람둥이 아버지로부터 일종의 폐기처분을 당한다. 그 후 아버지는 영어 가정 교사를 임신시켰지만 더이상 애를 원하지 않는다며 영국으로 쫓아버린다. 내 성격 중엔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점이 있는데 나는 당시 두려움의 대상이던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엄마를 간호하고 태피스트리를 수리했다. 당시 내 모든 시간은 일종의‘치유’를 위해 바쳐진 기간이었다.

루이스 부르주아 'The Couple' 2003 (from a Portfolio of seven prints, La Reparation), 종이에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 인그레이빙, 43.1 x 38.1 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부르주아 ‘The Couple’ 2003 (from a Portfolio of seven prints, La Reparation), 종이에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 인그레이빙, 43.1 x 38.1 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부르주아 'I Love You Do You Llove Me ?' 1987, 캔버스에 유채와 잉크 88.9 x 12.7 x 10.1 cm Private Collection / Photograph by Zindman Fremont

루이스 부르주아 ‘I Love You Do You Llove Me ?’ 1987, 캔버스에 유채와 잉크 88.9 x 12.7 x 10.1 cm Private Collection / Photograph by Zindman Fremont

 

루이스 부르주아 'Eight in Bed' 2000, 컬러 리토그래프 & 종이에 엠보싱, 52.3 x 59.6cm Courtesy Solo Impression, New York / Photograph by Christopher Burke

루이스 부르주아 ‘Eight in Bed’ 2000, 컬러 리토그래프 & 종이에 엠보싱, 52.3 x 59.6cm Courtesy Solo Impression, New York / Photograph by Christopher Burke

사춘기부터 1938년 미술평론가 로버트 골드워터와 결혼해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의 삶은 어땠는가?
아버지는 부자였다. 갤러리 라파예트나 쁘렝땅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셨고, 덕분에 나는 늘 샤넬 같은 유명 브랜드만 입고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육에 인색해서 교육비는 일절 지원해주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알면 장학금을 받았는데, 나는 소르본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다. 정신적 불안감을 수학이란 안정된 체계로 해소하고 싶었지만, 이내 수학의 한계를 깨닫고 에꼴 드 루브르와 에꼴 데 보자르, 몽마르뜨 화가들의 스튜디오를 거치며 미술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말부터 판화를 했고 1938년엔 화가 페르낭 레제로부터 조각에 필요한 3차원의 감각을 배웠다. 인생에서 첫 월급을 받은 일은 사진에 리터치를 하는 일이었으나 난 사진 찍히는 것도, 기억하기 위한 사진도 싫어한다. 난 리터치라는 작업에 죄책감을 느낀다. 한번은 키우던 개가 죽어 아버지가 땅에 묻었는데, 그의 게으른 성격 탓에 충분히 깊게 묻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개가 묻힌 곳에 가서 다시 들춰보았다. 개는 늘 거기 묻혀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결국 뭔가를 잊거나 용서하기 위해서다. 어떤 사실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당시엔 개를 제대로 잘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각을 시작한 건 1940년이지만, 당신의 작업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맞다. 1960년대부터 무거운 돌덩어리나 무쇠 같은 재료에서 석고나 라텍스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한 조각으로 바뀐다. 1966년이 특히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1930년대 말부터 시작한 판화는 1980년대 말에서야 처음으로 당신 작품에 다시 등장한다. 당신에게 판화란 무엇인가?
판화는 나에게 다양한 의미를 준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치유이며,회상이며, 불만이며, 억제이며, 시간의 통로이며, 손의 움직임 등 복합적이다. 나는 판을 부식시키는 에칭 작업보단 판에 직접 드로잉의 흔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나 드라이포인트를 선호한다. ‘Do,Undo, Redo’라는 모든 종류의 수작업을 이용한 반복되는 활동에 집착하는 내 성향이기도 하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몇 가지 소재에 대해 알고 싶다. 예를 들면, 거미나 거울, 바늘 같은 것들 말이다.
거미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영웅이자 기념비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였고, 다정했고, 현명했으며 늘 나를 지켜주었다. 또 거미는 모기처럼 인간에게 유해한 다른 곤충들을 잡아먹는다. 외할머니는 악성 인플루엔자로 돌아가셨다. 거울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고, 바늘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엮어내는 관용의 역할을 한다. 뭔가 잊어버리기 위해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거미가 어머니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그리고 거미줄 작업은 서로 얽혀 있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어릴 적에 당신이 했던 태피스트리의 얽힌 구조와도 연결된다. 그렇게 당신의 예술과 삶을 잇는 연결 구조로 거미나 거미줄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

루이스 부르주아 'The Ladders' 2006, 종이에 애쿼틴트 인그레이빙, 50.8 x 39.3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부르주아 ‘The Ladders’ 2006, 종이에 애쿼틴트 인그레이빙, 50.8 x 39.3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부르주아 'Spide' 1996, 청동, 337.8 x 668 x 632.4cm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 Photograph by Vincente De Mello

루이스 부르주아 ‘Spide’ 1996, 청동, 337.8 x 668 x 632.4cm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 Photograph by Vincente De Mello

 

루이스 부르주아 'I Do, I Undo, I Redo' 1999, 혼합재료, 테이트 모던 터빈 홀에서의 전시(2000) Photograph by Marcus Leith

루이스 부르주아 ‘I Do, I Undo, I Redo’ 1999, 혼합재료, 테이트 모던 터빈 홀에서의 전시(2000) Photograph by Marcus Leith

당신이 여성을 그릴 땐 대부분 빨간 하이힐에 진주목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 두 가지가 당신에겐 여성성의 상징인 듯하다.
그 두 가지는 섹시함을 대표한다.

어디선가 당신이 “내가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남성복 디자이너가 되었을 것”이란 말을 읽었다. 옷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옷에 관련된 특별한 기억이 있나?
내게 몸이란 실재하는 조각이다. 당신이 몸에 관심이 있으면 자연스레 옷으로 관심이 연결된다. 옷(패브릭, 색상, 스타일을 총칭한 의미로)은 전적으로 각자의 몸에 대해 어떤 면을 드러내고 어떤 면을 숨기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모든 욕망을 의미한다. 어떤 옷은 특정한 면과 기능을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 예를 들면 장소와 사람에 대한 어떤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는 남성복이 아니라, 남자 잠옷을 디자인하고 싶다. 단지 잠옷만.

2003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불면증 드로잉> 전시에서 당신은 1994년 11월부터 1995년 6월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던 시기에 완성된 작업들을 선보였다. 전시 서문에 “잠이 든다는 것은 천국이다. 그것은 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천국이다”말이 있었다. 작품을 만들면서 그것을 불면증을 이겨내는 과정이나 절대적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이용하는가?
밤에 하는 드로잉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아주 조금,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곤 하는 당신에게 자화상 작업이 없는 이유는 뭘까?
나는 내 자신에겐 관심이 없다. ‘I, me,myself’라는 말은 소름끼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선데이 살롱’을 시작한 이유도 같다.

당신은 1997년 이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들었다. 집 바깥의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가 지금 이야기한 ‘선데이 살롱’인 셈인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일요일 3시마다 나는 거실을 일반에게 오픈한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 단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직접 제작한 작품을 들고 아티스트로서만 참석할 것, 그리고 감기에 걸려서 오지 말 것. 젊은 세대들의 작품과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끝날 때마다 어떤 결핍감을 느낀다. 참석한 사람들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가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선데이 살롱’에 오는 사람들은 내가 해주는 어떤 말들이 자신들이 제2의 피카소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길 바라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평소 즐기는 음식은 뭔가?
초콜릿, 코카 콜라, 체다 치즈를 한 장 얹은 파스타(측근의 말에 따르 면, 오랜 기간 동안 점심 메뉴였다고 한다. 부르주아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직접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루이스 브루주아  2005, 드라이포인트, 애쿼틴트와 신 콜레 인그레이빙, 46.3 x 64.7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브루주아 2005, 드라이포인트, 애쿼틴트와 신 콜레 인그레이빙, 46.3 x 64.7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

 

루이스 부르주아 'Portrait of Jean--Louis'1947~1949, 청동, 벽걸이 88.9 x12.7 x 10.1cm Courtesy Cheim & Read / Photograph by Christopher Burke

루이스 부르주아 ‘Portrait of Jean–Louis’1947~1949, 청동, 벽걸이 88.9 x12.7 x 10.1cm Courtesy Cheim & Read / Photograph by Christopher Burke

 

루이스 부르주아 'Cell(Eyes & Mirrors)' 1989~1993, 대리석, 거울, 강철, 유리, 236.2 x 210.8 x 218.4cm Collection Tate Modern, London

루이스 부르주아 ‘Cell(Eyes & Mirrors)’ 1989~1993, 대리석, 거울, 강철, 유리, 236.2 x 210.8 x 218.4cm Collection Tate Modern, London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는?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 ‘실존주의자’라는 단어는 마술같이 매력적이다.

이루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미술사학자.

당신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예술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신에게 성공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공한 예술가는 어떤 특권을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성공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내 생각을 정말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성공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특권이다.어떤 창조적 동기를 가지고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특권이다. 동기나 원인 그리고 뻗어나가는 욕구, 그 어떤 것이든 작업과 연관을 맺게 된다.

앞으로 성공하고 싶은 젊은 예술가들을 위해서는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모든 예술가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젊은 작가들은 성공이라는 것이 어떤 내공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형태의 의미나 진짜 근본이 되는 동기에 접근해가는 자기 경험은 없으면서 다른 어떤 것의 겉모습만 베끼고 모방하려 드는데,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예술은 삶 자체이지 그럴듯해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왜 많은 사람들이 미술 작품을 사고, 팔고, 모은다고 생각하나? 최근 현대 미술계의 상업적인 동향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대로 작품이 팔리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과연 작품의‘경제적인 가치’란 어떤 의미일까?
‘작품을 판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옛날엔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한 후 집으로 작품들을 다시 가져왔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전혀 팔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돈의 관계성에 대해 연관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미술시장의 상황들은 작품의 절대적인 질보다는 매우 많은 부분을 취향이라는 관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 취향의 역사라는 게 흥미로울 뿐이다.

당신에게 가장 흥미있는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내일 할 작업, 그리고 어제와 내일의 균형이다. 과거는 나로부터 이미 도망치고 있으니까.

    에디터
    컨트리뷰팅 에디터/ 박정민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