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저, 먹는 거 진짜 좋아하거든요

E.L.이젠 개인적 사회에서 한 명 개인으로 살아가는 게 상식이 되었다(확실히 인터넷은 자주적인 사람들을 위한 네트워크다). 감정은 고요함 속에서 부활한다는 건 워즈워드만의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만드는 전문적 능력에만 의지한 채 억지로 인사이더군에 속해버린 나 같은 사람은 외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체중 감량을 원하는 여자가 종일 집에 있으면서 식단을 조절하기 불가능한 것처럼, 원하건 아니건 내 일은 다수와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혼자의 형식은 직업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군). 그러나 개인들이 서로 얼마나 관계하는지가 삶의 가치를 정의하는 세태에 내 조직 세포의 네트워크들은 서정적이기 짝이 없다. 나는 사막에 있는 것도 아닌데, 실용적 관계에서만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 같으면서 실은 안 하고 있으니까. 내 생각에 결합을 이룬 삶은 비효율적이고 창조적이지 않다. 결혼 또한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더 이상 인생을 위한 게 아니다. 섹스는 존재를 증명하는 확립된 방식이 아닌, 하나의 활동 아닌가.

하지만, 모두 일정량의 고독한 시간을 (아니면 침묵으로라도) 필요로 하지만, 금욕적인 남자와 여자들도 그룹을 이루어야 한다는 측은지심때문에 설립된 유럽의 한 수도원을 보면 누구도 마지막까지 혼자는 싫은 거다. 그들조차 수도원 안에서 천사와 성직자들의 은총과 계율, 영적 본성에 대한 사색에 의해‘결합’되고 있었으니까. 나는 세금을 착실하게 내고, 공중도덕도 끝내주게 잘 지키고, 정리정돈된 연애 때문에 내 어깨에 그 큰 머리를 기대며 씁쓸해하는 사람들에게 곧잘 조언도 하고, 정해진 지역을 크게 일탈하지도 않았고, 재활용도 하며 살았는데, 온순한 시민인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교통체증, 1가구 2주택이었다가 치른 당혹감, 일 때문에 바빠서 (세 끼 다 챙겨먹으면서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너무나 불행하다고(돈도 잘 벌면서 불행하면 또 얼마나 불행하다고!) 칭얼대는 사람들뿐이다. 그 소란을 피하자고 백날‘마음의 평화’를 가르치는 책들을 읽으며 침대 위에서 비비적대는 것도, 소설 속에서 내 인생의 그림자를 보며, 나와 그 인물들의 유사성을 낭만적 방식으로 과장하는 것도 이젠 싫다. TV를 켜면 기분이 더 상한다.“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돈적으로 힘들어요” “저 먹는 거 진짜 좋아해요”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들을 침처럼 매달고 사는 비정상인들 때문에. 기분 좋은 것‘같다’는건 기분 좋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 거지? 또 누구라고 먹는 게 싫을까?모든 명사에 과녁 적(的)자만 붙이면 고상해지나? 어떻게 말을 저따구로밖에 못 할까? 곧 방영될 드라마의 여배우가“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많이 봐주세요”하고 지껄이면 골빈 년,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누군들 열심히 안 하나? 편집실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열심히 하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하다. 민초들이건 이상화된 대단한 집단에서건 내가 발견하고 싶은 언어, 웅변처럼 저항하기 힘든 힘이 실린 언어, 운율과 논리와 관대함이 따뜻하게 섞인 언어를 만나긴 너무나 힘들다.

난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말 신경증 환자가 돼버린 걸까.입만 열면 뒤죽박죽되는 문법, 거품 같은 얼버무림, 문장 앞머리에서 시작된 주절을 이끌지 못하는 종속절, 청중들이 유아들뿐인 것 같은 단순한 논박, 머릿속 한 꾸러미를 펼쳐놓는 데 30개면 충분한 단어들은 언어의 모든 신비를 덮는다. 말을 잘한다는 건 만담을 한다는 걸까? 위대한 연설은 곧 역사 아닌가? 토론을 하는 집단적 능력은 어디에 있나? 그러나 입담 과시, 수사학적 달변으로 좌중을 흔들어놓는 것보다 중요한 건 흉중을 드러내는 순간의 감흥이다. 자신을‘정말 매력적인 못된 년’이라고 표현한 린제이 로한의 직설화법은 백과사전을 펼친 듯한 링컨류의 능변가들을 능히 무찌른다.본디 수사학은 범절 있는 사회의 기본 강령이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 그러나 세상엔 지혜뿐만 아니라 언어의 숭고함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다. 그래서 나는 다시 소년원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워한다. 2월엔 혼자 있을 때 가장 외롭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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