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유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전히 수작업을 고집한다. 어떤 이탈리아인은 그가 유네스코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동양의 디즈니’라고 부르는 건 실례다. 월트 디즈니의 영향력은 그의 초기작에서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를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와 비교하면 더 곤란해진다. 미야자키는 데츠카 오사무에 대한 극심한 혹평가였다. 젊은 시절에는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도쿄 미타카 숲 속에는 지브리 박물관이 있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세계와 작업 공간을 소개하는 곳이다. ‘지브리’라는 이름은 스튜디오 설립 당시 비행에 대한 그의 열정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브리’는 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의 비행기 이름이기도 하고, 북아메리카에서 부는 열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자”며 작업 공간에 그 이름을 붙였다. 2층에는 ‘지브리 군단’이 그린 캐리커처들이 잔뜩 벽을 둘러싸고 있고, 직원들은 모두들 작업대에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왼쪽 아래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약간 위협적이면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야자키다. 천재적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 또한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다. 현재 지브리의 대표이사이자 제작자인 스즈키 토시오는, 과거에는 미야자키를 인터뷰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기자였다. 미야자키는 잡지 16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채울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때만 인터뷰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스즈키는 안간힘을 써야 했다. 지금도 미야자키가 인터뷰를 허락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괜한 까다로움은 아니다. 매일 오후 텔레비전에서 <미래소년 코난>(1978)을 보며 즐거워했던 우리들의 유년기를 떠올리고, 그의 작품들이 미친 영향들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감히 미야자키가 생존해 있는 애니메이션 계의 거장들 중 첫 번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이나 작가들 중에서 손으로 그린 만화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2002), 오스카상(2003), 베니스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2005)을 받은 사람은 없다. 이는 디즈니사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이다. 오늘날 수작업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음에도, 그는 <벼랑 위의 포뇨>와 같은 신작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일본의 신도사상과 북유럽의 판타지를 엮을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 그걸 성공시키기까지 한 작가가 있나? 마찬가지로, 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이미지를 그려냈던 작가도 없다. 수백만의 어린이들이 그가 만들어 낸 판타지의 영향력에 감염되었다. 일본 엄마들은 <이웃집 토토로>(1998)의 중독성 있는 후렴구를 아이들에게 자장가처럼 불러주곤 한다.

몇 주 전, 인도에서는 젊은 이탈리아인 엄마가 아기에게 <이웃집 토토로> 주제가를 들려주는 것을 본적이 있다. 중앙 아프리카 카리바 호수 근교에서 만난 어떤 이민자는, <미래소년 코난> DVD시리즈를 파스타 반죽 기계와 함께 마치 인생의 필수품인양 갖고 있었다. 그 DVD는 아직 세상에 발을 내딛지 않은 그의 어린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미야자키 작품들의 유명세는 세상 곳곳에 퍼져있다. 물론, 국적을 초월해 알려진 디즈니 클래식도 있다(비교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메시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부모들의 눈에는 훨씬 비교육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원령공주>(1997)에서 주인공들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구간을 넘나들고, 선과 악은 빛과 그림자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역사의 불완전함이 꼭 필요만큼의 분량에 담겨있다. 어쩌면 미야자키 작품들의 중심 테마가 노리는 첫 번째 대상은 성인들이다. 물론, 아이들도 그의 작품을 즐겁게 본다. 그러나 어지간한 어른도 미야자키의 작품들이 말하는 바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란 힘들다. 설명하기 전에, 자신부터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작품들은 정치적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붉은 돼지>(1992)를 살펴보자.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도 국가 이익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포르코(인간일 때 이름은 마르코 파고트)는 20~30년대 아드리아해 주변 해안(그 당시에는 아직 이탈리아 영토였다)에서 활동하는 비행사다. 그는 섬에서 라디오 한 대, 우산 한 개, 영화 잡지와 자신의 비행기 ‘사보이아 S-21’ 한 대와 함께 혼자 지낸다. 그는 그 비행기를 타고 공중해적과 전투를 벌이는 용병인데, 1915~1918년 비행전을 겪은 후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됐다(미야자키가 사랑하는 작가 로얼드 달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전쟁을 겪은 후, 인간에 대한 극심한 증오 때문에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리라 예상한다. 이 영화는 1993년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장편 부분 대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인들은 <붉은 돼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의 국민 배우 장 르노에게 붉은 돼지 목소리를 맡겼다. 미국에서는 마이클 키튼이 목소리를 맡았다. 반면, 영화와 약간의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는 이탈리아에서 이 영화는 15년간 단 한번도 상영되지 않았고,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지도 않았다. 얼마 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이민자가 만든 한 웹사이트에서, 시드니 텔레비전이 구유고슬라비아 피난민 커뮤니티를 고려해 영화 <붉은 돼지>를 여러 차례 전파로 흘려 보낸 적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짧은 동화 형태의 감동을 주는 영화가, 이탈리아에서 잊혀지고 있는 역사의 한 부분을 재발견하게도 한다.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 일본과 유럽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면에서, 미야자키는 인류의 유산으로서 유네스코의 보호를 받을 만하다. 그는 살아있는 보물이나 다름없다. 그의 작가 정신이 담긴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며,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아들 고로가 감독한 <게드전기>(미국작가 어슐러 k. 르 귄에 의해 쓰여진 판타지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며 미야자키 역시, 그녀의 작품들 중 하나를 영화화 하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모두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미야자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는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1984)와 같은 대작을 만들 때 주 멤버로 협업했던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겔리온> 시리즈의 감독)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야자키를 영원히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의 손 끝에서 만들어지는 세밀한 아름다움과 상상력의 힘이다. “나에게는 컴퓨터 그래픽과 수디자인 작업 간의 올바른 비율 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할 줄 알지만, 난 나의 작품들을 2D작업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핸드폰 화면마저도 3D로 만들어지고, 디즈니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영화까지 픽사에 의해 3D로 대체 중인 시대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있으니, 하야오, 그는 늙은 삼촌과 같은 월트 디즈니와 비교될 인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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