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홍익음악

2009.01.02GQ

대중음악을 널리 소개하는 방식에 관한 텔레비전, 라디오, 음악평론가의 관점에 관한 비평

대중음악이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음악으로서 널리 이로워지길 바라노니, 텔레비전 음악프로그램은 제 본분을 다하고 있으며, 라디오의 선곡 기능은 제 역할에 충실하며, 인터넷 시대의 음악평론가는 제 주장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지 살폈다.

TV가 말랑말랑
선주문 백만 장을 호령하던 음악시장이 선사신화마냥 회자된 지도 오래, 지상파 매체는 자주 ‘대중적이지 않지만 실력 있는’ 음악인들의 전령사를 자처해 왔다. 소위 ‘음악 전문 방송 TV프로그램’의 관행화된 편성배경이 그렇다. 시도만으로도 갸륵하게 여겨야할지 모르나 그 실체는 애초의 의도가 무색한 때가 대부분이었다. 스타나 검증된 음악인을 진행자로 앞세우고, 때마침 앨범 혹은 싱글을 발표해 홍보창구 하나가 궁한 가수들이 출연진으로 채우는 속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 리포트 수준의 막간 토크쇼와 커플관객의 참여도 증진을 명목으로 출연자를 엄한 사랑의 메신저로 변용하는 등 제작진의 딜레마를 전시했을 뿐이다. 최근 200회 특집에서 80년대 가수들을 세워 ‘Memory’나 ‘Dancing Queen’을 부르게 한 <콘서트 7080>은 연말 추억의 팝차트라는 요식행위에 머무는 것으로 결국 <가요무대>의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준 씁쓸한 사례다.

그런데 최근, 이 고질적인 관행을 돌파하겠다고 새삼 나선 쇼프로그램들이 있다. 6년 남짓 장수한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후속격인 <이하나의 페퍼민트>와,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의 스핀오프(?)이자 스튜디오 라이브 쇼라 할 수 있는 <음악여행 라라라>다. ‘페퍼민트’는 배우 이하나를 뉴페이스로 내 걸며 환골탈태를 선언했다. 이하나에게선 윤도현의 관성적인 중용과 거리가 먼 열혈 팬의 신심과 열정이 묻어나 색다른 감흥을 준다. 여기에 왕년의 록커의 딸, 아마추어 음악인이라는 이력이 <김정은의 초콜릿>의 김정은이 갖지 못한 여분의 전문성을 더한다. 첫 회 출연자 이병우와의 각별한 화학작용은 그런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하나의 독특한 이력이 주는 포장효과에 기대는 것 이상으로 제작진이 깊게 모색한 것 같지는 않다. 신변잡기식 토크와 소녀주의적 감흥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초콜릿’의 그루피식 진행을 피하려면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라라라’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활용해 관객이 없는 본격 공연을 모색하고, 첫 회부터 미디어에선 다소 생소한 아티스트 이승열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작은 파격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이승열은 ‘라라라’의 성공뿐만 아니라 패착의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먼저, 하나부터 열까지 기술적인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균의 공간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최소한의 대중성을 갖춘 음악인이 얼마나 더 나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007 주제가와 원더걸스의 히트곡을 블루스 메들리로 편곡한 이승열의 재기발랄한 퍼포먼스는 다음의 윤종신에서 응용, 발전되지 못했다. 굳이 MR까지 끌어들여 코러스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채운 윤종신의 퍼포먼스는 애초 표방했던 스튜디오 라이브 특유의 담백한 현장성을 놓치고 있다. 윤종신이 이런데, 담당PD의 뜻대로 추후 다른 장르, 가령 아이돌그룹과 댄스가수들이 고유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설 수 전망은 희미해 보인다. ‘라디오스타’ 식의 공세적인 유머코드로 어떤 거리를 두는 시도도 게으르거나 의지박약으로 비친다. 장기하의 퍼포먼스를 해프닝으로만 해석하고 끝낸 막간토크는 결국 본격 음악쇼보다는 ‘라디오스타’의 연장에 무게중심이 기울어있다는 인상을 준다. 정통한 음악을 배려하는 미디어멘토라는 ‘가오’는 이제 배부르다. 여기까지 왔다면 예능쇼와 음악이 서로 부대끼지 않아도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도도 가능하다. 모험이 아니라 약간 다른 트리트먼트 수준에서 말이다.
글/ 최세희(대중음악평론가)

라디오가 비실비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소위 ‘지상파 계열’ 라디오 채널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팝 음악 전문 프로그램이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스타급 DJ들의 말솜씨 진열과 재롱 잔치로 변해버린 지 오래 됐지만 평일에도 2시간동안 평균 14곡 정도의 음악을 온전히 소개하는 모범적인 프로그램이다. 전문 음악 방송이니만큼 ‘선곡을 책임지는 작가’가 따로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강한 색깔을 가진 훌륭한 DJ가 오랫동안 색깔을 지키고 있는 만큼 PD나 작가가 바뀌어도 큰 변화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그 선곡의 스타일이 조금 번연해지고 있다. 최근엔 그 선곡이 지나치게 패턴화 되고 폭이 좁아지고 있다. 지난 1년간 라디오헤드와 건즈 엔 로지스의 음악은 1달 평균 1~2회씩 거의 규칙적으로 선곡됐다. 그에 반해 커티스 메이필드는 지난 2007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선곡되지 않았고 아이작 헤이즈는 그가 사망한 소식이 들려온 날조차 선곡되지 않았다. 비주류 장르나 실험적인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는 현실을 무시한 발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DJ는 대중을 이끌 수 있는 파워를 지녔지만 선곡은 대중의 취향에 지나치게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사실 이런 전문 음악 프로그램의 선곡 문제는 그저 ‘옥에 티’일 뿐이다. 음악이 위주가 아닌 프로그램들의 선곡 문제는 더 심각하다. 게스트의 홍보에 초점이 맞춰진 선곡, 날씨와 요일, 그리고 시기와 사연 내용에 최적화된 고전적 선곡 스타일은 거의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발견되는 문제다. 높은 청취율을 올리기 위한 목적을 지닌 선곡은 결국 의미 없는 선곡이 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주류 라디오 프로그램들의 선곡이 급격히 품질이 낮아진 이유로 가장 의심가는 부분은 인터넷 AOD 서비스와 연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의 선곡표 섹션은 ‘듣는 선곡표’로 바뀌었다. 라디오 역시 인터넷 라디오 콘솔이 보급되면서 전파보다 인터넷망을 통한 접근방식이 주류화 되고 있다. 라디오와 인터넷이 만나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빠른 피드백을 들 수 있다. DJ가 말실수를 해도 방송사 상담실에 ‘항의 전화’를 하거나 엽서나 편지 등으로 피드백을 보내던 옛날에 비해 요즘은 실시간으로 대중의 반응에 응대할 수 있다. 이 곡이 지루하다던가 DJ가 문제 발언을 했다던가 하는 의견은 방송과 동시에 교환된다. 이런 빠른 피드백에 의해 라디오는 더욱 민첩해졌다. 말하자면 오히려 대중의 피드백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하는 것이 더욱 다양한 음악을 들을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예전엔 방송사 음반실에서 음반을 미리 대여해 스튜디오로 가져와야 했지만 지금은 방송사 내의 인트라넷을 통해 몇 초만에 가져와 즉석에서 선곡할 수 있다. 그렇게 대중이 원하는 서비스를 더욱 민첩하게 할 수 있다. 대중이 원하는 서비스를 빠르게 할 수 있는 만큼 진중하고 고집스러운 음악 선곡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은 테크놀러지가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고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현대 사회의 병폐를 상징하는 일이다. 정성스러운 구매행위가 아닌 MP3로 편하게 듣는 노래들이 ‘음악이 지닌 힘’을 빼앗았었던 것처럼 라디오 역시 그렇게 힘을 잃고 있다.
글/ 조원희(대중음악평론가)

음악평론가가 기진맥진
노래는 이렇게 쉬운데 말은 이토록 못 알아들어도 좋은가? 이 말은 대중음악을 둘러싼 모든 ‘언어적 행위’를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시킨다. 어떤 이들은 앨범 리뷰를 읽으며 그 앨범을 사라는 건지 사지말라는 건지 요점만 얘기하라는 태도가 되기도 한다. 그는 별점을 보며 중얼거린다. “다섯 개가 만점인데 별이 세 개면 괜찮다는 거야 별로라는 거야?” 배후를 파고들면 더욱 강력한 단어가 있다. 바로 ‘취향’이다.
바야흐로 인터넷이 어떤 ‘여론’을 상징하게 된 지금은 취향의 시대다(90년대를 담론의 시대라고 한다면 더더욱). 개인 블로그들은 그토록 들키고픈 각자의 취향을 그토록 개인적인 테두리 안에 펼쳐놓는다. 미디어는 아니지만 미디어적 속성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채 호오에만 관심을 둔다.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닥감’이라는 말이 있다. ‘닥치고 감상’의 준말이다. 좋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조건은 ‘닥칠 것’뿐이다. 그렇게 ‘닥칠 것’을 요구하는 판에서 평론가의 자리는 좁고 불편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자, 생각이 없어도 말할 수 있나니, 음악 평론따위가 무슨 대수인가.

사실 대중음악평론가들이 자신을 대중음악평론가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있어도 드물다. 근래 대중음악에 관해서만 유독 ‘애호가’ ‘의견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등의 말들이 창궐하는 건, ‘평론가’라는 말의 부정적 편견을 덜어보려는 안간힘이자, 그 무게나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청자 중 한 사람’정도로 간주하려는 모색이다. 다시 문제는 원점이다.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 심지어 지지하거나 비판하면서 주장하는 것은 뭘까? 청자의 취향에 호소하려는 홍보문일까? 자신의 취향을 좀더 적절하게 말하려는 유식함일까? 다만 어떤 분별을 전하고자 함일까?
그런데 자신을 뭐라고 칭할까마저 걱정하는 필자들의 섬세함과는 별개로 청자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가수를 좋게 보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읽을뿐, 평론이 어떤 음악이나 가수를 좋아하는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안좋은 평이면 무시하면 그만이고, 좋은 평이면 ‘평론가마저 인정한 음악’이 되는 건 너무 쉬운 요즘 일이다. 그러는 사이 음악에 관한 비평은 ‘자기만의 방’이 된다.

올해 포털 사이트 네이버는 ‘오늘의 뮤직’이라는 코너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네티즌과 평론가가 섞여서 한 앨범을 두고 함께 접근을 시도하는 등, 그 ‘포털다운’ 방식은 무리없이 유연했다. 더이상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부질 없어 보이는 시대, 네이버의 접근은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비평의 위치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 대중음악평론가 조원희는 최근 김종국의 앨범에 대해 ‘비평의 대상이 될만한 앨범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말을 지지한다. 김종국의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견지하는 평론가의 태도에 관한 지지다. 평론가는 가장 전문적이며 가장 고급한 정보로 청자들에게 다가서야 하지만, 그 전문성과 고급함을 증명하는 건 매체가 준 ‘평론가’라는 직함이 아니라 평론가 스스로 견지해야할 소신이다. 누군가는 별을 하나 주고 누군가는 별을 다섯개 준다. 거기서 누구를 신뢰하느냐의 문제가 생긴다.
에디터/ 장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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