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중음악 박물관

기억만으로는 어림없다. 완전하지 않으니. 사무치는 추억도 하염없는 후일담도 그것만으론 소용이 없다. < GQ KOREA >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찬란한 노래가 있었는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가수들과 함께였는지를 명백한 증거와 함께 기념한다. 지금 당신이 목격하는 것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스피커를 박차고 나오는 음들이 건축해낸 노래의 제국, 대한민국 대중음악 박물관이다. 

노란색의 마이크와 흰색 마이크 스탠드는 이승환이 라이브 콘서트 때마다 사용하는 것으로, 드림팩토리 직원이 들고 왔다.
노란색의 마이크와 흰색 마이크 스탠드는 이승환이 라이브 콘서트 때마다 사용하는 것으로, 드림팩토리 직원이 들고 왔다.

 

 

이승환의 마이크 스탠드 

이승환은 혹시 날 수 있지 않을까? 손오공이여의봉 돌리듯, 그가 이 하얀 마이크스탠드를 들고 희롱할 때 그는 혹시 날고 있는 게 아닐까? 이승환의 라이브는 명분을 위한 책략이 아니고 쇼를 위한 쇼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몸이 먼저 박차고 나가는 진심이다. 그의 라이브에 가면 인체의 몇 퍼센트가 수분으로 이루어졌든 상관없이 비틀어질 때까지 함께 살아서 ‘라이브’를 경험한다.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처럼 시작하는‘붉은 낙타’는 그 절정이다. 그러는 사이 마이크 스탠드페인트칠은 조금씩, 자꾸만, 아름답게 벗겨진다.

 

 

주현미의 트로피는 여의도에 있는 주현미의 사무실에서 촬영했다.
주현미의 트로피는 여의도에 있는 주현미의 사무실에서 촬영했다.

 

 

주현미의 가수왕 트로피

미디어는 노래보단 ‘출신’에 관심이 있었다. 화교, 약사 출신이라는 배경, 약국은 어머니에게 잠깐 맡겨놓고 녹음한 첫 음반 ‘‘쌍쌍파티’의 역사“. 어느 집이나 노래 잘하는 꼬마가 한 명씩은 있잖아요, 저도 ‘꼬마가수’로 유명했어요”라는 말은 인터뷰와 방송에서 숱하게 들었다. 2월 11일 출연한 <아침마당>에서도, 시작은 그 얘기였다. 하지만 주현미는 언제나 노래 한 곡이었다. 노래가 자극한 건 한限이 아니었다.‘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사랑한다고 말해달라는 소녀였다‘. 신사동 그 사람’을 다시 만날까 새벽까지 기다리는 순정이었다. 그걸박하사탕 같은 보컬로 불렀다. 1988년 ‘신사동 그 사람’은 KBS와 MBC에서 최고인기상과 가수왕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 2월엔 이런 말을 했었다“. 여기서 더하겠다, 그런 것은 추한 것이고 욕심이에요. 이젠 후배들이 해야 할 차례고, 저는 제자리를 지켜야죠.” <아침마당> 스튜디오에선‘잠깐만’을 불렀다. 여전히 선선하고, 쉽게 부르는 노래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흉내를 못 냈다. 그 전에도, 지금도.

 

 

이 하이탑 스니커즈들은 다섯 개의 상자에 담겨 전달되었다. 촬영 당일 마음을 바꾼 탑은 다른 스니커즈를 퀵서비스로 보내왔다.
이 하이탑 스니커즈들은 다섯 개의 상자에 담겨 전달되었다. 촬영 당일 마음을 바꾼 탑은 다른 스니커즈를 퀵서비스로 보내왔다.

 

 

빅뱅의 하이 탑 스니커즈

“도대체 쟤들이 누구야?” 역사상 가장 스타일리시한 아이돌의 탄생에 한 개의 물음표와 수십만 개의 느낌표가 쏟아졌다. 함박눈처럼 그리고 이과수 폭포처럼. 문화적 자기장 속에서‘새로운’이라는 말이 응당 품어야할 가치는 그저 새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증하는 형식과 내용의 합창이어야 한다. 빅뱅이 21세기 대중문화판에 그야말로 ‘빅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음악과 스타일의 조화 때문이었다. 다섯 남자애들이 패션잡지에서나 읽었던 디자이너들과 누군가만 알고 있다는 스트리트 브랜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신고 쓰고 걸치고 무대를 누비자, 아이돌의 개념은 십대들만의 해방구로부터 당대를 가늠하는 가장 예민한 척도가 되었다. 그중 하이 톱스니커즈는 빅뱅을 떠올리는 가장 도발적인 물증이다. 탑, 태양, G-드래곤, 승리, 대성에게 자신이 가장 많이 신었거나 가장 아끼는 스니커즈를 골라달라고 했다. 왼쪽부터 태양, 승리, G-드래곤, 탑, 대성의 것이다.

 

 

릴 테이프는 김창완과 산울림의 역사이자 소장품.
릴 테이프는 김창완과 산울림의 역사이자 소장품.

 

 

산울림의 릴테이프

“지금 딱 한 곡을 다시 녹음한다면, 어떤 곡일까요?” 김창완은 대답했었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이 릴 테이프 안엔, 최초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새겨져 있다. 스물 다섯 김창완의 목소리, 김창훈의 베이스, 김창익의 드럼이 ‘아직’있다. 1978년의 산울림이다.30년을 뛰어넘은 열 곡의 노래다. 그리고 1집부터 12집까지의 릴테이프가 모두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 ‘, 노래 불러요’같은 노래의 제목들이 그때의 손글씨로 적혀 있는 걸 봤을 때, 검은 테이프에 새겨져 있을 산울림의 역사를 상상할 때… 김창완의 말이 생각났다. “전설이 과거라면, 산울림의 역사가 너무 짧았고, 현재가 모든 전설의 끝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산울림이 전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김창완의 말을, 김창완 밴드의 EP가 증명했다. 지금은, 2009년이다.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가사를 끄적이는 타이거 jk의 노트를 잠시 빌려왔다.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가사를 끄적이는 타이거 jk의 노트를 잠시 빌려왔다.

 

 

드렁큰타이거의 다이어리

진짜니 가짜니, 동쪽이니 서쪽이니, 누가누구보다 잘하고 말고 같은 장난 같은 싸움들. 힙합신엔 유난히 그런 태도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타이거 JK가 <낭독의 발견>에서 일기를 읽을 때, 그런 말들은 하나같이 논쟁을 위한 논쟁 같았다. 지적이지도 않은 지식 싸움, 그렇다고 음악적일리도 없는 소모전. JK의 일기장에 써 있던 문장들은 그냥 그대로 힙합이었다. 설명과 싸움은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연필로 갈겨 쓴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는 지금은 아빠가 된 한 남자의 삶과 음악이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가를 그 흔한 비트도 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그건 JK의 힙합이 취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모범, 혹은 농축된 분노였다.

 

 

보컬 박윤식이 입었던 바지는 매니저를 통해 퀵서비스로 도착했다.
보컬 박윤식이 입었던 바지는 매니저를 통해 퀵서비스로 도착했다.

 

 

크라잉넛의 바지 

태초에 드럭이 있었고 그곳엔 크라잉넛도 있었다. 1996년, ‘말 달리자’는 그들의 외침은 많은 사람들의 귀를 홍대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소리가 커서 멀리까지 들렸고, 내용이 단순해서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던 ‘인디 음악’이란 말은 직역한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좁다란 체크무늬 바지를 입은 아이들은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아 더 잘 보였고, 사람이 많지 않았음에도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이 의상은 핑클 팬클럽의 열성 회원인 최상벽 씨가 성유리 코스프레를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의상은 핑클 팬클럽의 열성 회원인 최상벽 씨가 성유리 코스프레를 위해 만든 것이다.

 

 

핑클의 치마 

1998년 핑클이 등장한 이후, 공연장이 낮은 음으로 진동하는 광경은 익숙한 일이 됐다. 보는이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동생처럼 보이는 네명의 여자아이들은 ‘걸 그룹’의 전형이 됐고, 비로소 남자아이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리칠 수 있었다. 요정에게 소리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재봉틀로 만든 것 같은 옷을 입어도 빛이 나게 예쁘다는 게 그 증거였으니까. Fine Killing Liberty의 앞 글자를 딴 핑클은 아직 끝난 이름이 아니다. 해체선언을 하지 않았기에.

 

 

이 악보는 이문세, 뮤직마운틴의 유상기 대표, 그리고 유족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악보들 중에 아들 정환 군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공개해주었다.
이 악보는 이문세, 뮤직마운틴의 유상기 대표, 그리고 유족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악보들 중에 아들 정환 군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공개해주었다.

 

 

이영훈의 악보와 이문세의 음성

이 악보를 수소문하는 < GQ >에게 이문세는 “영훈 씨를 더 빛나게 해줘”라며 달게 웃었다. 이영훈은 연필로 사각거리며 악보를 만들었다. 둘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서 연필심이 아직도 번지는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이영훈의 악보는 이문세의 노래로 마음의 격랑을 겪는 이들의 지도였고, 이문세의 음성과 발음이 이토록 오랫동안 아름다울 수 있게 한 이정표였다. 이 악보는 허식과 수사가 없었던 그들의 진정성이고 또 오랫동안 빛이 날 시대가 상관없는 ‘동감’의 표식이다. 2월 14일. 이문세는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날짜 하나가 더 생겼다. 2008년 2월 14일 작곡가 이영훈이 영면했고 한 해 뒤 같은 날 광화문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 자리에서 이문세는 ‘옛사랑’을 부르다 조금 울었고 ‘광화문 연가’를 부르면서 같이 부르자는 제스처를 했다. 컨트리뷰팅 에디터/조경아

 

 

이 휴대용 턴테이블은 DJ소울스케이프가 직접 스튜디오로 들고 왔다.
이 휴대용 턴테이블은 DJ소울스케이프가 직접 스튜디오로 들고 왔다.

 

 

DJ 소울스케이프의 휴대용 턴테이블

2000년, 그가 단출하게 디자인 된 첫 앨범 < 180g Beats >를 CD와 LP로 동시에 발매했을 때, 음악팬들의 기분은 사전에 상의된 듯 한결같았다. 올 것이 왔다는 만세삼창같은 환희. 그는 블랙뮤직의 어떤 정체성을 드러냈지만, 그 뿌리는 단순히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1세기 클럽플로어에 신중현과 산울림과 김트리오와 함중아를 기가 막히게 연결해 놓는다. 마치회로도처럼. 그는 이 휴대용 턴테이블을 들고 다닌다. 청음 시설이 없는 중고 레코드숍에(평택 미군기지 주변의 고물상부터필라델피아의 필라델피아레코드 익스체인지까지)가거나 했을 땐, 여기에 얹고 들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음악은 DJ 부스 앞에 모인 밤이 두렵지 않은 청춘들을 제 마음대로 춤추게 만든다.

 

 

이 음반은 에디터의 소장품이다.
이 음반은 에디터의 소장품이다.

 

 

김추자와 김정미의 음반

이 불세출의 여가수 두 명이 이룩한 신화는 점점 더 깊은곳으로부터 힘을 발휘한다. 신중현이 만든 휘황찬란한 노래중에서 하필 1972년과 1973년에 잇달아 발표된 이 두 장의 앨범을 듣는 일은, 흡사 ‘가요’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배를 미는 일과 같다. 김추자의 본능과 김정미의 직관은 둘의 음성과 창법을 분간하는 흥미진진한 과정을 생략한채로도 저마다 우뚝하게 음을 뚫고 솟아오른다. 세속과 무상함은 이 노래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지만, 김추자와 김정미는 단 한 번의 순응도 없이 멜로디를 넘나들면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은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여자 둘이서 해낸 것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가요’였다.

 

 

고 김광석의 하모니카는 김광석 팬클럽 '둥근소리' 운영자 심원식 씨가 김광석의 형 김광복 씨에게 받아 건네주었다.
고 김광석의 하모니카는 김광석 팬클럽 ‘둥근소리’ 운영자 심원식 씨가 김광석의 형 김광복 씨에게 받아 건네주었다.

 

 

김광석의 하모니카

입대 전, 친구가 선물한 <다시 부르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입대한다고 ‘이등병의 편지’라니,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노래를 다시 듣기 전에, 죽음을 먼저 만났다. 유난히 많은 가수들을 떠나보낸 그때였다. 유튜브 엔 고 김광석이 ‘노찾사’콘서트에서 혼자 불렀던 앵콜 영상이 떠다닌다. 그때 김광석은 ‘녹두꽃’을 불렀다. 1987년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이었다. 반주도 없이, 수줍은 차렷자세로. 객석은 얼어붙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간에서 화석이 됐다. 그리고 2009년, 소극장에서만 1천회 넘게 관객을 만나온 가수는 그의 숨결에 가장 가까웠던 악기를 받아들었다. 추모공연이 달래줄 수 없는 견고한 부재, 그리고 13년간 그 남자의 목청으로 불리지 못한 숱한 노래들이, 작은 하모니카 안에서 맴돌았다.

 

 

이 드레스는 이소라 7집 앨범 '8번 트랙'의 뮤직비디오에서 입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이다.
이 드레스는 이소라 7집 앨범 ‘8번 트랙’의 뮤직비디오에서 입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이다.

 

 

이소라의 긴 드레스 

그녀는 노래를 앉아서 부른다. 이따금 경련처럼 어깨를 튕겨낼 뿐, 꼬아 앉은 다리를 그대로 둔 채 그녀는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긴 드레스가 있다.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밀한 감촉. 깊거나 짙거나 혹은 알 수 없는 것들. 사실 이소라의 긴 드레스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방송된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진행의상으로서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드레스는 이소라밖에 부를 수 없는 노래를 위한 단 하나의 위로로서 그녀와 함께였다. 찢기거나 얼룩지는 일도 없이 고갈되지 않고, 영원히.이 드레스는 이소라 7집 앨범 ‘8번 트랙’의 뮤직비디오에서 입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이다.

 

 

이 컬렉션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카페 '버닝 하트' 운영자의 것이다.
이 컬렉션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카페 ‘버닝 하트’ 운영자의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기록 

1992년 4월 11일, < 특종, TV연예 >의 사회임백천은 이렇게 말했다“. (재킷에) 이름이 영어로 써 있네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트리온데요, 흔치 않게도 랩을 하는 친구들입니다.”그리고 심사위원을 소개한 후 다시 말한다“. 서태지 씨와 그 친구들의 ‘난 알아요’ 박수로 청해 듣겠습니다.” 심사위원단 평점 7.8점을 받으며 데뷔한 이 트리오는 1996년 1월까지 네 개의 정식 앨범을 냈고 지금까지 1천만 장에 가까운 음반판매를 기록했다. 아이들은 모두 아이들의 춤을 따라췄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콘, 신세대, 신드롬, 팬덤 같은 단어들이 생겨났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볼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작곡가 배상태 선생의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 원본과 배호의 뿔테 안경은, 배호 어머니 김금순 씨 양아들 정용호 씨가 보관 중인 유품.
작곡가 배상태 선생의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 원본과 배호의 뿔테 안경은, 배호 어머니 김금순 씨 양아들 정용호 씨가 보관 중인 유품.

 

 

배호의 악보와 안경

배호의 궤적은 신화적이다. 작곡가 배상태의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 원본엔, 배호의 이름이 없다. 먼저 이 노랠 불렀던 가수의 이름 위엔 빨간줄이 그어져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배호의곡이라는 배상태 선생의 판단이었다. 배호가 부른 ‘돌아가는 삼각지’는 각종 매체에서 20주 연속 1위였다. TBC, MBC, KBS 가수왕을 휩쓸었다. 배호는, 이미 신장염으로 투병 중이었다. 처음 신장염이 발병했던 그해였다. 스물넷, 1966년이었다. 1969년 MBC 10대가수상 시상식에선 동료의 등에 업힌 채 상을 받았다. 병세는 악화와 호전을 거듭했었다. 배호는“쓰러져도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드라마 같은 말을 습관처럼 했었다. 도저히 노래할 수 없어서, 음반만 틀어놓은 채 무대 위에 앉아 있기도 했었다. 사회자 등에 업혀서도 노래를 불렀다.1971년 10월 20일, 이종환이 진행해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 >는 배호의 마지막 방송이었다. 그리고 1972년 11월 7일은 배호의 마지막 날이었다. 스물 아홉이었다.

 

 

남진의 백구두는 그의 딸을 통해 퀵서비스로 전달받았다.
남진의 백구두는 그의 딸을 통해 퀵서비스로 전달받았다.

 

 

남진의 백구두 

남진이 ‘한국의 엘비스’라고 불린 건 그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상을 입었기 때문은 아니다. 가요 순위 1위와 가수왕 등극은 기본이요, 1만 명 가까운 팬클럽을 불러 남이섬에서 야외 잔치를 벌이고, 공연을 위해 머무르는 여관마다 입구에 여성팬들이 진을 치며, 속옷차림으로 뛰어드는 여성 팬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란 단어로 팩을 한 듯한 그의 얼굴과 푸른 재킷, 그리고 ‘백바지’와 ‘백구두’는 ‘70년대의 제왕’이 입었던 곤룡포나 다름없었다. 남진의 백구두는 그의 딸을 통해 퀵서비스로 전달받았다.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이 비단 한복은 김세레나가 특별히 아끼는 것을 직접 골라놓았다며 그녀의 매니저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전달해주었다.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이 비단 한복은 김세레나가 특별히 아끼는 것을 직접 골라놓았다며 그녀의 매니저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전달해주었다.

 

 

김세레나의 한복

돌아간다. 열두 폭 치마가 돌아간다. 날아든다 팔도강산 고국산천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꽃이 핀다. 갈 봄 여름없이 꽃이 피니 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 꽃보다 정신 팔려 풀섶으로 헛디딜라, 까투리 한 마리 푸드득하니, 에라 만수에라 대신이야. 김세레나는 대한민국가요계의 가장 특별한 위치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하고 있는 여왕 중의 여왕이다. 민요의 흥을 잔칫날 전 부치듯 따르되 터널을 통과한 자동차처럼 한 번 더 액셀러레이터를 밟고야 마는 한바탕. 그녀가 공깃돌놀리듯 마이크를 채트려 꺾을 때마다 세상의 모든 봉오리가 일제히 만개했고, 마침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무대에서 돌기 시작하면 지구도 제 갈 길모르고 넋을 놓았다.

 

 

이 포스터는 '그룹 들국화를 위한 팬들의 모임' 의 촬영을 위해 제공했다.
이 포스터는 ‘그룹 들국화를 위한 팬들의 모임’ 의 촬영을 위해 제공했다.

 

 

들국화의 콘서트 포스터

들국화가 ‘행진’을 부를 때 에디터는 다섯살이었다. 들국화가 <아듀 콘서트>를 했을 때, 입장료는 2천원이었다. 아마도, 새우깡은 백원이었을 때다. 그땐 젊고 마른 전인권이 있었다. 음악이 시대에 어떤 긍정적인, 혹은 저항적인 몸짓을 할 수 있나를 음악으로만 증명한 록밴드가 있었다. 젊은 가수들은 들국화를 생각하면서 헌정음반을 만들었고 ‘, 매일 그대와’같은 곡은 재즈로 편곡돼 여러 번 다시 불렸다. 하지만 그게‘, 부활’같은 시쳇말로 미화될 일은 아니었다. 들국화는, 그때여서 아름다운밴드였다. 1989년 장충체육관에 모여 있었던 청년들은 그때 20대였다. 지금은 40대다. 음악은 변하지 않으나, 사람은 변한다.

 

 

30년의 손때가 묻은 수박색 일렉트릭 기타는 함춘호의 것이다.
30년의 손때가 묻은 수박색 일렉트릭 기타는 함춘호의 것이다.

 

 

함춘호의 일렉트릭 기타

함춘호에게 물었다. “이 기타로 녹음한 앨범이 몇 장이나 될까요?” 궁금했던 건 정확한 ‘팩트’였다. 함춘호는 의외로 명랑하게 대답했다“. 80년대, 90년대에 녹음한 앨범들은 다 이 기타로 쳤어요. ”80년대 초에 구입해서 90년대 말까지, 한국 대중음악에 기타 세션이 필요한 곳엔 항상 함춘호가 있었다. 함춘호가 해외에 나가면 음악계가 정지된다는 농담 같은 진실이, 대중음악계엔 지금도 살아 있었다. 집에 와선 그때 샀던 음반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가수 이름만 보고들어 넘겼던 숱한 앨범들에, 이제야 발견한 몇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타/ 함춘호’라고.

 

 

3천 개의 은색 종이학이 든, 먼지 쌓인 유리상자는 전영록의 소속사에서 제공했다.
3천 개의 은색 종이학이 든, 먼지 쌓인 유리상자는 전영록의 소속사에서 제공했다.

 

 

전영록의 종이학

덥수룩한 머리, 얼굴의 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 예의 그 ‘청자켓’. 전영록은 그런 차림의 아이돌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종이학 선물을 많이 받은 아이돌이기도 했다. 꼭 ‘종이학’을 불러서는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도 속아 넘어갈 것 같은 미소를 가진 80년대 남자에게 또 뭘 줄 수 있을까? 종이학에 왈칵 감동하는 걸 넘어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것 같은 믿음을 주는 아이돌은 당시나 지금이나 전영록밖에 없다. 천 번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 그에게 종이학을 보냈던 팬들은 그때의 소원을 이뤘을까?

 

 

조영남의 안경은 대전 아주미술관에 전시 중인 67개의 안경 중 12개.
조영남의 안경은 대전 아주미술관에 전시 중인 67개의 안경 중 12개.

 

 

조영남의 안경

조영남의 안경은 대전에 있었다. 아주미술관 <삼팔광땡전>에 67개가 전시 중이었다. 사람들은 조영남의‘화투장’ 앞에서 머무르는 시간만큼, 그의 안경 앞에도 멈춰 섰다. “아유, 검정 뿔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맞다. 조영남은 검정 뿔테였다. 코가 너무 낮아서 그것밖에 쓸게 없었다는 80년대 조영남의 말은 농으로만 들리지 않았었다. “그때, 한참 TV 나갈때는 검정 뿔테를 썼지. 그 옛날 내가 가수 시작할 때는 가수가 안경을 끼거나, ‘야전잠바’를 입고 노래하면 안 되는 줄 알았지. 그 틀을 깬편이지.” 히트곡은 ‘화개장터’딱 하나면서 열린 음악회엔 최다 출연, 그게 벌써 39년째, ‘조영남 안경’의 어떤 상징성. “은퇴공연한다고 하고, 은테 안경을 쓰거든, 그러면 사람들이 웃는다고.” 이런 말장난. 가수와 화가를 합쳐 화수畵手라는,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타고 노는 조영남식 뻔뻔함. 서울 집 침대 맡엔, 30개가 넘는 안경이 또 있었다.

 

 

이 석고상은 2009년 2월 12일 용인에 있는 신중현의 자택에서 직접 떴다.
이 석고상은 2009년 2월 12일 용인에 있는 신중현의 자택에서 직접 떴다.

 

 

신중현의 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가정하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도 없다. 알면서도 신중현이 없었다면 한국대중음악이 어땠을까 상상한다. 그럼 김추자도 박인수도 김정미도 펄시스터스도 함중아도 함께 사라진다. 대중음악사에서 제일 흥미롭던 순간들이 싹 도려내지는 것이다. 신중현은 유난히 커 보이는 손으로 기타를 쳤고 5백 개가 넘는 곡을 만들었고 누군가를 가르쳤다. 지금 그는 역시 커 보이는 손으로 직접 지은 집에 살며 홈페이지를 만들고 기타 연주 영상을 캠코더로 찍는다. s-mw.co.kr에 가면 제일 최근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빙글빙글'을 부를 때 입었다는 이 무대의상은 나미가 직접 에디터에게 전해주었다. 너무 기분 좋은 일이라서 가슴이 뛴다고 했다.
‘빙글빙글’을 부를 때 입었다는 이 무대의상은 나미가 직접 에디터에게 전해주었다. 너무 기분 좋은 일이라서 가슴이 뛴다고 했다.

 

 

나미의 무대복

조명을 받은 스팽글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반짝인다. 가죽에는 날것의 파워가, 보석에는 떨림이 있다. 결정結晶이라 불러도 좋을까? 나미의 무대에 나미 이외의 것은 없었다. 그녀는 동작을 익혀서 춤추지 않았다. 볼륨을 조절하면서 노래하지 않았다. 본디 그렇게 태어난 생명이 저 살고 싶은 대로무대에 살고 있었다. 다부진 섬처녀같은 까만 얼굴, 움직이는 귀걸이가 만든 번화한 도발, 척추까지 찌릿한 허스키 보컬, 그리고 너무 정확한 이름, 나미.

 

 

이 밴은 2009년 3월 현재 동방신기 다섯 멤버가 함께 타고 다닌다.
이 밴은 2009년 3월 현재 동방신기 다섯 멤버가 함께 타고 다닌다.

 

 

동방신기의 밴

유노윤호 영웅재중 믹키유천 최강창민 시아준수. 이 다섯 남자를 태운 검정색 밴이 달린 길엔 한시대를 기념하는 이정표가 세워져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클라이맥스는 마침내 문이 열리고 다섯 중 누군가의 얼굴이 폭발하는 카메라 플래시에 노출되는 순간일 것이다. 이천년대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함성을 만들어 낸 파괴력과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팬덤을 이끄는 위력 앞에 ‘아이돌’ 세 글자는 한점 부끄럼 없이 진짜다. 동방신기 다섯명이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가든 그들이 내리는 곳은 가장 뜨거운 세상이 된다. 하지만 이 밴 안엔 어떤 고독이 깃들었을지도 모른다. 잠그리고 잠, 풍경 그리고 풍경, 세상의 모든 차창 밖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다섯 남자에겐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김민기 1집 초반은 에디터 소장품.
김민기 1집 초반은 에디터 소장품.

 

 

김민기 1집 

지난 1975년, 김민기 1집은 ‘불순’했다. ‘아침이슬’ 때문이었다. 시련을 긍정하지 않았던 나라는, 그걸 노래하는 가수의 입을 막았었다. 하지만 노래는 막지 못했다. 대중이 대신 불렀다. 그런 시대였다. 그건 대중이 ‘대중가요’를 지지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굳이, ‘아침이슬’을 시대와 관련짓진 않겠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은, 예술이 금지됐던 시기의 예술이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 티셔츠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창용이 이미자의 사인을 전사해 만들었다.

 

 

이 티셔츠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창용이 이미자의 사인을 전사해 만들었다.
이 티셔츠는 그래픽 디자이너 박창용이 이미자의 사인을 전사해 만들었다.

 

 

이미자의 사인이 있는 티셔츠 

그 목소리가 여전히 동백처럼 피어난다는 사실은 두 손으로 감싸고 싶을 만큼 소중하다. 이미자는가수가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떤건지 영혼을 세공한 목소리로 증명해왔다. 그렇게 50년이 지났고, 알 수 없는 많은 날들이 남았다. 노래가 아니라면 무엇도 이미자를 대신할 수 없겠지만, 그 비장한 무게를 걷고 다만 대한민국 대중음악 최고의 스타를 가장 스타답게 마주보기로 했다. 바로 이미자에게 “사인해주세요.”라는 한 마디를 건넨 것이다. 우리는 세기의 록스타가 그렇게 했듯, 이미자의 사인을 티셔츠에 이식했다. 그것을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입고 다닐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가지면에 세운 이 대중음악 박물관이 실제로 생긴다면, 그 박물관기념품 숍에서 이 티셔츠를 발견하고 싶다. 스피커에서 ‘동백아가씨’가 나온다.

 

 

플래카드는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이 제공한 파일로 <GQ>가 다시 제작했다.
플래카드는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이 제공한 파일로 <GQ>가 다시 제작했다.

 

 

조용필의 40년 팬들이 만든 플래카드 

2008년 5월, 5만 명이 잠실 주경기장을 메웠다. 오빠가 돌아왔다. 콘서트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조용필이 오빠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조용필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따라 부를 노래들,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겨울의 찻집’, ‘단발머리’…, 애기 업은 아빠는 ‘포대기’를 두르고 자리에 앉질 않았었다. 2시간 넘게 춤을 췄다. 덩실덩실, 형광봉을 휘두르면서. 애기는 등에 업혀 자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소녀처럼 상기된 볼을 하고 투박하게 박수를 쳤다. 간주가 나올땐 ‘오빠!’를 외쳤다. 가끔, 아까 그 아저씨도 ‘옵빠!’를 외쳤다. 조용필은 쉬지 않고 40여 곡을 불렀다. 그곳에, 잠실주경기장 1층과 2층 사이에, 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 탄생’ 중앙회장 박종영 씨는 말했다“. 현수막엔 일부러 오빠라는 말을 안 넣었어요. 왠지 지나간 말 같아서요.”하긴, 벌써 40년째다. 하지만 2008년 한 해, 전국 4백만 명이 ‘용필 오빠’를 외쳤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