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큐를 사랑한 과속 스캔들

<과속 스캔들>은 전대미문 과속 데뷔작이다. 신인 강형철 감독은 첫 장편으로 800만명을 모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강형철은 심히 <GQ>스러운 인간이다.

트렌치 코트는 버버리 프로섬, 티셔츠는 프라다, 자전거 휠은 노현동 엠세븐바이크.
트렌치 코트는 버버리 프로섬, 티셔츠는 프라다, 자전거 휠은 노현동 엠세븐바이크.

<과속 스캔들>의 주인공 남현수는 몹시 <GQ>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남현수의 공간을 정말 를 보면서 꾸몄다. 뱅앤 올룹슨 오디오라든가, 인테리어라든가,남현수가 입는 옷이라든가. <GQ>적인 사람이란 건 참 많은 걸 갖고 누리면서도 어딘가엔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거 같다. 그런데 <과속 스캔들>의 남현수는 거기에 한가지가 더 있다. 그렇게 자기 삶을 누리지만 잠자리에 들면 문득 어떤 허전함을 느낀다.

그 허전함이 가족 아닐까? 다음 날 아침엔 또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기 삶을 누릴 것이다.하지만 현수도 정작 가족을 갖게 되자 그 허전함의 정체가 가족이었단 걸 알게 된다.

<GQ>에 나오는 물건들은 남자의 세계를 꾸미는 불가결한 소품들이다. 그 물건이 곧 그남자의 세계다. 나도 물건을 사지만 가끔 그 생각도 한다. 이 물건으로 얻은 즐거움이 얼마나갈까. 나도 아는 거다. 그 즐거움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어쩌면 현수도 그렇지 않았을까.여러 물건들로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채웠지만 달래지지 않았던 무언가가 있었을 거다.

현수의 집 서재엔 꼭 가 가지런히 꽂혀 있어야 한다고 우겼다고 들었다. 그건 좀 운명적이었던 거 같다. 우연히 접했는데 재미있는 걸로만 채워져 있더라. 다른 잡지도 있었지만 제일 재미있었다. 그 뒤로 늘 사서 봤다. 가 영화에 나왔으면 싶었던 건 이 남자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를 세워놓으면 세네카도 제일 멋있고. 크게‘GQ’라고 만들어지니까.

를 보는 남현수라. 어떤 면에선 현수가 허상으로 채워진 삶을 살고 있단 걸 보여주고싶었다. 그래야 갑자기 정남이와 기동이가 끼어들었을 때 변화가 올 테니까.

분명 안엔 현실도 있지만 환상도 있다. 그런데 왜 다들 그 환상을 좋아할까. 사람들한텐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잡지를 본다는 건자기 삶이 아닌 더 나은 다른 삶을 꿈꾸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게 때론 허상이라고 욕 할수 있을 테지만 반대로 사람은 그런 꿈 때문에 사는 거니까.

영화는 어떤가. 현실을 깨닫게 해야 하나. 환상으로 꿈을 꾸게 해야 하나. 영화마다 다르지 않나 싶다. <과속 스캔들>엔 분명 환상이 있다. 현실의 미혼모를 생각해보면 쉽다. 얼마나 아픔이 많고 슬픔이 많겠나. 하지만 <과속 스캔들>의 미혼모는 밝고 당당하다. 현실에서 본다면 판타지다. 물론 밝은 친구들도 있겠지만 최소한 마냥 즐겁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거짓이라기보단 즐거운 영화의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현실과 관객 사이의 화해를 이끈다. 그럴 수 있다. 현실은 더 리얼할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현실에선 오히려 문제를 외면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환상이 곁들여진 영화에선 오히려 현실을 직시한다.

영화엔 꼭 현실이 담겨야 한다는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영화를 보면 그 영화는 명작 중의 명작이지만 사실 현실적으론 오류투성이다. 우린 흔히 현실 같은영화만을 숭배하지만 그건 영화가 리얼하거나 환상이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 같다. 결국 모든 건 톤과 매너의 문제가 아닐까.

당신도 <과속 스캔들>의 남현수와 닮지 않았나? 내가 다양한 인생 경험이 없어서 말이다.캐릭터를 다듬을 때 결국 내가 투영된 부분이 좀 있다.

어떤 거? 원래 남현수가 사귀던 여자는 ‘쭉쭉빵빵’하다. 그건가? 아니라곤 말 못하겠다. 뭐, 평상시 라이프스타일이 현수와 많이 닮았다.

현수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남자다. 나도 가끔 듣는 얘기가 있다. 너도 나이 먹어봐라.취향이 바뀐다. 물론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 하는 취향까지. <과속 스캔들>에서도 현수 역시 참한 여자를 만나고 가족을 갖게 되잖나.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직은 취향인 건가? 아까 차는 벤츠였고, 음악은 클래식을 듣던데. 요즘은 클래식이나 재즈를 즐겨 듣는다. 차는, 누나 차를 잠시 빌린 거다.

그런가. 어쨌든 취향이 중요한 건 맞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면 무척 반갑다.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보면 옷가게에서도 무척 반갑듯이. 먼저 손이 가고. 삶에서 반가움을 느끼는 건 내 취향을 마주했을 때 아닌가 싶다.

당신이 가진 가장 중요한 취향은 뭔가. 게으름?

세상에서 영화 감독만이 당당하게 누릴 수 있는 취향이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 거의 일년에 반은 낮밤을 바꿔 사는 거 같다. 불규칙하고. 나한텐 혼자 조용하게 지내는 시간이 꼭필요하다. 밤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읽고. 술 마시고.

김지운 감독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김지운 감독도 백수 10년, 감독 10년을 산 거같다고 했다. 감독이란 직업도 사실 반 백수니까.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취향이 만들어 지는거 같긴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학과 다닐 때 만들었던 단편의 톤이나 지금 만들고 있는톤이나 비슷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큰 발전이 없는 건데, 어떻게 보면 그때 만들어진 내취향인 거다. 백수 시절에 봤던 영화나 책들이 더 기억에 남고. 진짜 돈이 없어서 두꺼운 책을 한 권 사면 그렇게 재미있게 읽힐 수가 없다. 아까워서. 지금은 열 권씩 사서 봐도 잘 안읽히는데. 아, 그래서 백수 시절 나한테 는 괴로운 잡지였다.

요즘은 여자들이 를 더 많이 본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저번에도 여자친구 데리고 고기집에 갔는데 좀 그렇더라. 근사한 델 가 본 적이 있어야지.

결혼은 안 하나? 아직 잘 모르겠다. 어른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직 피터팬 기질이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해야 결혼을 하게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꼭 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의무로 할 수는 없지 않나.

이래저래 <과속 스캔들>의 남현수랑 닮았다. 미꾸라지처럼 사는 것도 닮았다. 그런데 요즘남자들이 다 그런 것 같다. 아는 선배도 자꾸만 결혼을 미룬다. 늘 뭔가 더 이루고 더 성공하면 하겠다고 한다. 지금 봐도 성공했는데.

과속 스캔들>이 800만을 넘겼으니까 그 정도면 돈도 좀 모은 거 아닌가. 다른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진 아니다.

적어도 책 한 권 사는 걸 고민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렇다. 음반 좀 사고 여행 좀 다니고.그럴 수 있는 정도다.

<과속 스캔들>은 음악적인 리듬감을 지닌 영화다. 재즈적인 지점도 있다. 조여 줬다 풀어줬다. 영화를 보면‘헝가리 무곡’이 쓰였다. 난 <과속 스캔들>의 리듬감을 ‘헝가리무곡’에 빗대고 싶다. 빰빰빰 하고 빨리 가다가 어느 순간에 빰하고 멈추고.

영화 만들 때 돈 아껴서 음악 한 곡 더 쓰자고 했다면서. 제작비가 넉넉하질 못했으니까.하지만 음악은 무척 쓰고 싶은 거다. 그런데 음악 하나 쓰는 게 돈이 장난이 아니다.

재즈를 좋아한다면, 누굴 좋아하나? 조금 아방가르드한 재즈를 좋아한다. 피아노 연주하는것도 좋다. 디지털 피아노를 하나 사려고 물색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까진 트럼펫을 불었는데 우리 할머니가 폐 안 좋아진다고 과잉보호를 하는 통에 배우다 말았다. 그게 참 아쉽네. 난 지금도 영화를 보다 보면 음악에 꽂힌다. <리플리>에 꽂혔던 것도 그랬다.

예전에 차태현 씨가 영화야말로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꽃이 되는 게 아니다. 영상과 음악과 미술과 패션에 폭넓은 취향을 가진 감독이 영화에 그걸 함축할 때 영화가 꽃이 되는 거다. 맞다. 요즘처럼 매체가 다양한 시대엔 관객들도 누릴 게 많다. 그런 관객들을 상대하면서 가만 둔다고 영화가 대중문화를 선도하게 되는 게 아닐 것이다. 여러감독님들이 계시지만 나 같은 감독이 하고 싶은 것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다양한 취향을 영화에 섞어 넣고 관객과 호흡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번엔 성공한 거 아닌가. 데뷔작이 800만이라니. 그게 돈 많이 벌려고 찍은 게아니다. 그냥 영화를 계속 하기 위해서 시작한 거지. <과속 스캔들> 시나리오를 썼을 때두근 두근 떨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 느낌이 드는 시나리오를 만났을 때 영화를 찍고 싶다.뭐, 나도 앞으론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토막 낸 영화를 찍을지도 모르고.

결국 중요한 건 뭘 찍느냐가 아니라 어떤 스타일로 찍느냐일 거다. 그게 감독의 인장이다. 김지운 감독처럼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다면 멋진 것 같다. 내가 김지운 감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형식과 내용에서 자기 스타일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늘 다르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