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있어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물음표가 창궐했다. 그대로 멈춰서 일곱 번 물어보고 일곱 번 대답했다.


강호동과 유재석, 누가 강할까?
유재석의 ‘배려’와 강호동의 ‘파워’는 예능프로그램의 양대산맥이다. 강호동이냐, 유재석이냐라는 질문은 연말 시상식 뿐만아니라 그들의 방송을 보는 매 순간 유효하다. 게스트들조차 어떤 의미에선 둘의 흐름에 맡겨진다. 프로그램 성격은 차치하더라도 별도의 캐릭터가 된다는 말이다. <1박2일>에서의 은지원과 <놀러와>에서의 은지원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캐릭터를 위해 거기 있는다. 강호동은 어떤 ‘패거리’나 ‘캐릭터’를 갖춘 뒤 힘을 발휘하는 진행자다. 몰입형이고 우두머리여야 한다. 출연자들 간에 어떤 수직 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깨면서 긴장감을 만든다. 유재석은 ‘패거리’ 나 ‘캐릭터’를 벗어날수록 흐뭇하고 신선한 진행을 한다. <패밀리가 떴다>엔 손님이 오거나 새 식구를 맞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1박2일>은 기존에 강호동과 어떤 인연을 갖지 않은 게스트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무한도전>과 <패밀리가 떴다>에서의 유재석은 부분인채, 전체를 조율해야하는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한다(그럴 때 진행자로서의 입장을 게스트에 기대거나 나눠 갖는다). 그는 유능하지만 <해피투게더>나 <놀러와>에서 보이는 진행 감각이야말로 유재석의 보다 핵심적인 가치다. 강호동은 ‘부끄러워하는 대장’이고, ‘투정부리는 우두머리’이며, ‘연약한 천하장사’다. 강호동의 그런 양면성은 궁금증을 준다. 어떤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반면 유재석에겐 숨겨진 카드보다는 알맞고 정확하며 적소를 파고드는 흐름을 기대하게 된다. 박명수나 이효리처럼 그 흐름을 긴장시키는 요소가 없으면 상식에 바탕을 둔 기분 좋은 웃음에 머문다. 이기는 게 이기는 것이고 센 것이 살아남는 시대, 지금은 강호동이다.

패션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왜 그리 속되고 헛되게 보일까?
패션에 필요한 건 말이나 지식이 아닐 수 있다. 톰 포드가 ‘하버드’ 졸업해서 톰 포드인가. 샤를로트 갱즈부르가 달변이라 옷도 잘 입나? 아니다. 하지만 그걸 말로 해서 시청자들에게 전할 생각이라면 최소한 말을 할 줄은 알아야 한다. 한국의 글렌 오브라이언을 바라는 게 아니라 한국말을 한국말처럼이라도 하는 방송을 원한다는 말이다. 나름 그 바닥에서 행세하는 전문가랍시고 나와서는 초록색 드레스를 보고 “그린끼가 너무 많이 도네요.” 라고 말하는 걸 귀로 들어야하는 시청자는 모두 패션의 희생양이자 노예들인가? 패션은 천박함마저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마술을 지녔지만 방송은 허접한 것을 허접하게 전달할 뿐이다. 자기가 허접한 줄도 모른채(알고도 패션이라고 우기는 건 패션의 특권이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모델을 얘기하는 것과, 디자이너를 얘기하는 것, 쇼를 얘기하고, 패션 사진을 얘기하는 것은 모두 그저 요란한 ‘패션’이기만 할 뿐이다. 플래시가 터지고 명품이 어떻고 하는 그런 얘기 말이다. 지금 패션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필요한 건 끝간 곳 없는 과시가 아니라 단 한줌이라도 좋을 전문성이다. 뉴욕의 무대에서 어떤 워킹을 선보였느냐보다 뉴욕에서 어떤 맛집을 가는가로만 모델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대체 무슨 ‘패션’이 있단 말인가.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왜 더 답답할까?
안다. 토론은 토론일 뿐 게임이 아니니까 승패란 있을 수 없음을. 하지만 1등을 가리고, 진과 선과 미를 어떻게든 구분하고,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고, 소수점으로라도 누가 나은지를 분별해야 하는 세상 속에서 이것도 옳은 데가 있고, 저것도 일리가 있다는 식이 답답한 건 사실이다. 혹자는 그 함정 같은 답답함이 짜증이라는 관전포인트를 창출해내 시청률에 일조한다고 지적하지만 말이다. 한쪽은 말도 안된다고 얘기하고, 한쪽은 왜 말이 안되냐고 되묻는다. 따지고 들자면 이건 비단 이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개념 정립의 차이이자 시각의 차이이자 정체성의 차이라는 뉘앙스는 매회 반복된다.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토론이라니. 생각 같아서는 허참이 <가족오락관>에서 최종점수를 외치듯, 손석희도 쩌렁쩌렁하게 누가 더 옳은 말을 했다고 외쳐주면 좋겠지만…. 그러면 안될까? 그게 또다른 의견의 장을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스포츠 뉴스 앵커들은 왜 옷을 ‘더’ 못입을까?
남자의 수트엔 격식과 룰이 엄연하다. 물론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인 것이고 그것을 흐뜨림으로서 어떤 생동감을 얻기도 한다.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디즈니 넥타이나 심지어 ‘은갈치(반지르한 광택이 도는 회색 수트를 이르는 말)’도 때로는 그걸 화제삼아 유머를 더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을 전제로 한 ‘유머’로서만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 ‘스타일’이 되는, 그것도 최신 유행에 맞춘 트렌디하고 젊은 옷차림이 되는 어처구니에서 온다. 스포츠뉴스는 우렁찬 진행이 포인트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도 그냥 뉴스보다 톤을 높이고, 앉기보다는 서서 해야 어울리는, 뉴스와 쇼를 섞는 무드로 간다. 그러니 옷차림에 활기를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반짝이’와 ‘원색’에서 벗어날 줄 모르며, 그 반짝이와 원색이 옷이라기보다 ‘이벤트’의 역할만 전담한다는 게 큰 문제다. 고무줄이 달린 빨갛고 반짝이는 타이와 너무 디자인된 라펠을 가진 타이트한 블랙 재킷과 흰셔츠를 애써 피하려는 의도가 역력한 검은 셔츠의 조합은 지금 당연하다는듯 나오는 스포츠뉴스 캐스터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이다. 병아리색 피케셔츠에 남색 블레이저를 입고 프로야구 개막을 알린다면 어떨까? 하늘색 버튼다운 셔츠에 굵은 실로 짠 흰색 가디건을 입고 윔블던 우승자를 소개하면 어떨까? 그게 어렵다면 그저 단순하게 꼭 조였던 넥타이를 풀어 놓고 셔츠 맨 윗단추 하나를 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스포츠는 페어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신사적인 분야인데, 그걸 전하는 뉴스캐스터는 어찌 나이트클럽을 가려고 하는 걸까?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에 세련된 연출이 있다면 어떨까?
‘고향’은 그 자체로 정말 멋지다. 마침내 돌아갈 곳이란 궁극의 유토피아일 테니까. 그런데 리버 피닉스가 길 위에 서서 아이다호로 가는 차를 히치하이킹하는 화면은 멋지지만, 서울에서 고향가려고 터미널에 모이면 ‘브이 자’ 그리는 ‘21세기 피플’들로 화면이 꽉찬다. 탱자나무 울타리, 딸기밭, 참새떼와 아침 안개, 배추 뽑는 아낙들, 소울음소리, 어느하나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 없지만, 카메라만 들이대면 요란한 리포터가 등장해 산통을 깬다. 방송국에서 나왔다니 동네 경사가 따로 없지만 그러는 와중, 고향과 고향사람들은 어떻게든 웃겨야하는 오락프로그램의 숙명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물론 그것이 기존 시청자들에게 임의롭고 구수한 서정을 만들게 하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왜 그곳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그곳자체이기보다 도시를 향한 영상편지처럼 보여야 하는 걸까? 결국 그들을 먹여살릴 소비자가 도시에 있으니까? 슬픈 얘기고 그야말로 촌스런 생각이다. 지금 농촌과 어촌과 산촌에 들이대는 카메라엔 마르고 닳도록 답습된 향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노력은 거의 전무하다. 최근 일본의 젊은 사진가들이 낸 작은 사진집들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그들이 찍은 사진엔 숲과 논과 밭이 있다.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 같은 걸로 ‘추억’을 가공하는 대신, 자연에서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음악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왜 말을 어눌하게 할까?
음악은 음악으로 말한다. 자고로 음악에 관한 말로 어떤 동의를 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 것이다. 음악비평은 언제나 그 존재 이유를 의심받는다. 장르를 말하는 것은 단순하려다 제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생겨난 방법은 ‘음악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다 좋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여성 솔로 진행자를 앞세운 심야시간대의 음악프로그램들이 있다. 이하나는 모든 출연가수의 ‘팬’이라는 설정으로 컨셉트를 이끈다. 김정은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의견보다는 분위기를 위해 봉사한다. 순위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다. 남녀 진행자가 대본을 국어책 읽듯 하는가 하면, 유치하고 민망한 설정을 해놓고는 자기들끼리도 난처해하다 제목만 발음하기도 하고,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보여~주세요!” 로 얼버무리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의 가수와 노래를 목격하는 것이 유아원생들을 위한 재롱잔치라도 된다는 걸까? 반대로 귀에 거슬릴 정도로 “아무개씨” “아무개씨” 하면서 공동 진행자를 지칭하는 건 또 어떤가? 일종의 역할놀이인가? 그런가 하면 배철수는 누구보다 ‘음악을 아는’ 뉘앙스인채, 건들건들 마이크를 잡는다. 그의 그런 태도로부터 다양한 음악들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옛날부터 잘 알았던 사이라 할 수 있는 ‘그때 참 좋았지’ 하며 추억을 우리는 것 말고는 정작 음악에 관한 좀더 섬세한 팩트를 전달하거나 하진 못한다. 대중음악은 그래서 늘 ‘그 정도로만’ 취급받는 게 아닐까? 스스로 만든 그 굴레 속에서 말이다.

<아내의 유혹>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왕지사 <아내의 유혹>에서 F1 같은 초스피드를 경험한 마당에, 사건 같지도 않은 사건 하나 매듭짓는데 대여섯 배 뜸을 들이는 드라마를 보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울화가 치밀어 “작가가 누구야” 소리가 절로 날테니까. 그렇게 신나게 달리다 차들로 꽉막힌 시내에 들어선듯한 불쾌는 원래의 리듬을 찾기가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시청자들도 그렇지만 배우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히 극중 신애리를 연기한 김서형의 다음 작품에 관해서는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싶을 만큼의 각별함이 있다. 그녀는 불완전한 발음을 악으로 이겨낸 ‘철의 여인’이자 ‘오버’를 더 큰 ‘오버’로 극복해내는, 죽기 직전까지의 혼신의 연기를 보여줬다. 그녀가 ‘더 센’ 캐릭터를 모색하다에 스스로 지쳐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송지나의 회심의 역작 <남자이야기>, 고현정 주연의 <선덕여왕>, 말많은 권상우의 드라마 복귀작 <신데렐라맨> 등의 새 드라마가 눈에 띈다. 한편, 임성한이 어디서 뭘하는지, <아내의 유혹>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에디터/ 장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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