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동안 안 한 여자

이 여자, 멀쩡하다. 예쁘기까지 하다. 압구정에서 같이 걸을 땐, 남자 세 명 정도가 흘끔거렸다. 그럼 뭐하나? 안 한 지가 3년인데.

신음은 막아도 새어 나왔다. 뒤틀리다 떨고, 떨다 또 꺾였다.여자가 이렇게도 떨릴 수 있다는 걸, 그날 밤에 알았다. 그냥 키스하고, 목을 핥았을 뿐인데도. 스웨터를 벗기면서, 척추뼈를 따라 손가락을 그었을 뿐인데도. 치마 속에 들어간 손이 본능대로 움직였을 뿐인데도.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나는, (중략)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무진기행> 김승옥의 문장이다. 이보다 섹시한 문장을 아직 읽지 못했다. 에디터는 오늘 이렇게 베껴 쓴다.“ 나는, 그 여자의 3년을 빼앗아 주었다.”‘3년’은 대개 지겨웠다. 누군가 앗아간대도 아까울 것 없었다. 중학교 3년? 학교와 학원이 다였다. 고등학교 3년엔 독서실이 추가됐다.인생에 3년짜리란 대개 그랬다. 공부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자 때문이기도 했다. 섹스가, (법률상) 십대를 위한 건 아니니까. 여자와 술은 대학이 허락한 자유이자 권리였다. 거기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스물아홉 전후 3년은 하기 나름 아닌가? 몸을 구속하는 건 자의식뿐이다. 이십대 후반의 이 예쁜 여자가 3년째 섹스를 안했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짚신도 짝이 있는 건데, 이 여잔 말하자면 마놀로 블라닉‘킬힐’같았으니까. 짚신짝을 기다리는건 이런 여자의 몫이 아니었다. 귀찮은 남자들을 힐로 찍어 쫓아내는게 어울린다면 어울렸겠다. 중고등학교의 구속과 지리함을 이 여자의 3년과 비교하는 건 그래서 죄악 같았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을 거라는 어떤 확신 때문에.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도‘한 번 해도 괜찮을 놈’을 못 만난 이 도시의 척박함 때문에. 중고등 교육 과정이 그런 것처럼, 섹스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처음 만났을 때 우린 스물여섯 살이었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었다. 대기업 사원과 기자였다. 집이 같은 동네라서 친구가 됐다. 3일전에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밤 열 시에 전화해도 시간이 허락하면 맥주를 마시는 사이였다.

2007년 2월 어느 날도 그랬다. 에디터는 친구와 전작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 안에서 여자에게 전화를걸었다. 다짜고짜였다. 그만큼 편했다.“우리, 맥주 마시자.”“지금?”“지금. 그 바에서 봐, 15분 후에.” 여자는‘추리닝’에 코트를 걸치고 나오기도 하고, 회식을 마치고집에 가는 길에 들르기도 했었다. 예쁜 건 후자였다. 완벽한 화장에, 가끔은 짧은 치마를 입거나, 가슴이 파인 스웨터를 입기도 했으니까.그런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애석하게도 전자였다.“야, 아무리 동네라도 이러고 나오냐? 성의가 없어 성의가.”“너 만나는 데 성의 차리고 나와야 돼? 술이나 마셔.”조용하고, 조신하고, 참한 게 대한민국의 구태의연한‘여성성’이라면 이 여자가 한국 여자는 아니었다. 가끔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치기도 하고,‘ 이 새끼가, 저 자식이’를 쉽게 하는 여자. 예의 없다기보단 당차고, 맹랑하기보단 명랑한 여자였다. 합기도가 2단이랬지만, 그래도 귀여워 보일 때가 있었다. 집에 있는 책꽂이엔 만화책만 이백권이라고 자랑했었다. <홍차 왕자>부터 <창천항로>까지, 장르도 안가렸다. 대화는‘연애’로 흘렀다. 2007년엔 그게 화두였다. 둘 다 싱글이었다. 각자 만나던 애인과는 비슷한 시기에 헤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일말의 호감이 있었는지는, 기다리면 알게 된다.“휴우, 남자 만난 지 1년이 넘었다.” 여자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난 셔츠 단추를 두 개 풀고 있었다.의도는 없었다. 송승헌 같은 가슴도 아니니까. 한 개는 답답했고, 딱 두 개 만큼만 호방해 보이고 싶었을 뿐. 개인적인 기호였다. 이 여자가 몰래 단추 끝을 흘끔거리기 전까지, 옷보다 그 속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하기 전까진 그랬다. 우리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다 동네에 있는 개천을 따라 걸었다. 돌다리를 건널 땐 손을 잡았다. 퇴근 후에 샤워했을 때만 풍길 수 있는 여자의 샴푸 냄새가 간지러웠지만, 이날은 황순원의 <소나기>적인 밤이었다.“ 집에 가기 싫다”는 에디터의 말에 여자가 잠깐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우리 사이에 일말의 호감이 있었는지를 들으려면 당신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2년만 더.

“맥주 마시자.”그날도 이런 말로 시작했었다. 난 2년 전처럼 전화를 걸었고, 지금은 2009년 3월이다. 밤 11시 40분이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집으로 초대했다. 시간 참, 빨리 간다.“너 진짜 재수 없다. 네가 좀 나오면 안 돼?”“내 옷 봐라, 이러고 어딜 나가겠니? 맥주는 사왔어?” 오늘은 이 여자가 전작이 있었고, 내가 집에 있었다. 여자는 치마를 입었고, 나는‘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여자는 회식 날이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고 했다. 첫 번째 맥주를 땄을 때, 여자의 푸념이 시작됐다. 머리에선 삼겹살 냄새가 났다.“팀장이랑 선배가 명예퇴직을 신청해서, 넷이 하던 일을 둘이 하고 있어. 힘들어 죽겠다.나도 그만둘까봐.”‘글로벌’경제 위기가 여자의 명랑을 우울로 바꿨다. 회사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모은 돈으로는 아버지 사업에도 보태고, 중고 마티즈를 샀다고 전화까지 해서 자랑했던 여자였다. 우울이 다시 연민으로 바뀌는 덴 딱 한마디만 더 필요했다.“휴우, 남자 안 만난 지도 벌써 3년째다.” 섹스 얘기란 걸, 알면서 물었다.“풉, 여자들하고만 일하냐, 너?” 여자는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좋은 남자가, 씨가 말랐어.”이 말에 왜, 에디터가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나이스’하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오빠처럼 머리를 쓸어주었다. 술자리의‘나이스’는 언제나 ‘느끼’와‘배려’의 경계 어딘가에서 다감하다. 여자는 내 손이 머물렀던 시간만큼 눈을 감았다.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그때 틀어 놓은 노래가 존 콜트레인이었나, 심수봉이었나…. 어쨌든 담백한 위로였다. 난 침대에 앉아있었고, 여자는 안락의자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었다. 마주본 채 시간이 흘렀다. 무릎을 살짝 덮는 치마 사이로 검정 스타킹이 탄력 있었다. 정적에 숨이 막혔다. 치마 속으로, 다리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3년은 두터운 시간이라서, 스킨십과 섹스의 경계는 스타킹같이 얇을 수 있었다. 역설은 관능적이었다. 음악은 안 들렸다.“따르르르릉∼.”이 시간에 전화하는 선배는, 내일 아침에 만나면 꼭 때려줘야지 생각했었다. 별일도 아니었다. 허탈하게도, 그냥 외로워서 했다고. 난바쁘다고 끊었다. 세상엔 왜 외로운 사람뿐일까?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산모는 외롭지 않을까? 그러다, 외롭지 않은 어머니도 없을 거라는 확신 속에서 침대를 봤다. 여자가 혼자 누워있었다. 어머니와 아기를 생각하던 성스러운 상념 가운데, 이토록 섹시한 반전이랄까.“미안,선배가 외롭단다.”이불을 덮고 누운 여자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내 왼손 밑엔 이불도 있었고, 여자의 스웨터도 있었고, 3년간 달은 몸도 있었다.“그래서, 유혹해온 남자는 없었어?”“1년 정도 됐을 땐 급해지더라. 사람도 발정기가 있나봐. 근데 지금은… 남자들 유혹이라는 게, 다 허세야. 허풍이고. 지겨워. 다 똑같은 말만 해대.‘이 남자랑 자고 싶다’생각하다가도 그 진부한 멘트들을 듣는 순간에 마음이 다 식는다. 그렇다고‘원 나잇’을 하자니 그거허탈한 건 다 알잖아, 이제….”이말에도 왜, 에디터가 죄책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담백하게’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의 담백함은 언제나‘쑥맥’과‘선수’의 경계 어딘가에서 응큼하다. 다시 머리를 쓸었다. 손등은 볼에 닿았다. 여자는 웃지 않았다. 대신 긴장했다. 이 명랑한 여자가 처음 보이는 조바심이었다. 입술과 목덜미에 키스했다. <무진기행>을 생각하면서, 손으론 허리를 안아 들었다. 스웨터를 올렸을 땐 배를, 검정 팬티스타킹을 무릎까지만 내렸을 땐 허벅지 안쪽을…. 이날은 끝까지 가야 옳았다. 여자에겐 그럴 당위가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기도 좋았다. 에디터는 진부한‘뻐꾸기’를 날리지도 않았고, 바닥엔 맥주 캔 세 개가 있었다. 핑계가 좋은 밤이었다. 그런다고 단숨에 앗아질 조바심도 아니었다.“하아… 그만….”몇몇 여자들은 분노했었다.“남자들은 왜 ‘싫다’는 말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그 말에 되려 도전적이 되거나“, 넌 말론 싫다고 했지만 온몸으로 날 유혹하고 있었어!”라고 어이없이 되치는 남자들도 신물이 난다고. 오해에도 정도가 있고, 짐승이 아니라면 말은 통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이날도 그랬다면, 에디터의 왼손이 여자의 흰색 면팬티와 오른쪽치골 사이로 들어갔을 때 엉덩이를 들어주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섹스에 소극적인 사회에서 여자가 취할 수 있는 일말의 적극성이었다.마지막 허가였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그만이라며?”“……” 여자에겐 3년 만이었고, 에디터에겐 우연이었다. 흔치 않은 밤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밤이었다. 여자는 1년 뒤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남자 만난 지가 4년이다. 좋은 남자가 씨가 말랐어.”다만 익숙한 방 안에서, 서두르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 몸이 그렇게도 떨릴 수 있다는 걸 새삼 알았을 땐 이미 새벽이었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