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ing

차라리 하자고 해요

2009.04.22GQ

남자들은 한결같다. 한결같이 헛물만 켠다. 빙빙 돌려 말해도, 결국 오늘 밤 같이 있자는 얘기면서.

열다섯 살부터 남자들의 유혹을 감내해온 여자가 있다.‘ 유혹’은 오히려 고급한 단어였다. ‘추근대다’‘추파를 던졌다’는 말이 맞다. 학원, 교회, 동아리에서 만나는 숱한 오빠들…. 본격적이진 않았다. 어렸으니까. 술 마실 나이가 안 되니 정신 잃을 일도 없고, 연애와 섹스에 대한 환상만 있을 때라 추파도 ‘환상적’으로 던졌다. 십대 후반이거나 이십대 초반이었던 남자들은 말했다. “지금은 네가 어리지만, 나중엔 우리 둘이 결혼하자. 기, 기다려줄래?” 그땐 결혼이 환상이었다. 남자들은 풋풋했다, 80년대까지는.

“십대 후반에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는 남자들이 많았어요. 그 말을 계속 하는 거야. 그야말로 ‘사랑과 우정 사이’였어요. 그 남자들이 성숙해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그때부터 분위기를 알았죠. 남자들이 여자한테 다가오는 숱한 말과 진부한 태도들.” 대학생이 되면서, 만나는 남자마다 (섹스하자고) 안달을 했다. 모든 추파는 본격적이 됐다. 상투적인 ‘미녀’의 잣대를 댈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이 여잔 좀 달랐다. ‘예쁘장’, ‘ 귀여움’, 혹은 ‘섹시함’을 겸비하고 있진 않았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 여자가 당신 옆을 지나가도 굳이 돌아볼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지적知的이다. 보이는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섬세한 오만을 자극하는 여자랄까.

“산도르 마라이의 책을 훔친 적이 있어요, 도서관에서.”

“누구요?”

“산도르….”

“삼도르 마사이?”

<열정>, <유언>을 쓴 헝가리 작가, 에디터는 울컥했다. 아직 안 읽은 책을 간파하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도전의식이랄까. 그래서, 기껏 꺼낸 이름은 랄프 왈도 에머슨이었다. 그랬더니 리처드 브라우티건도 좋다며 신이 났다. ‘에머슨은 위대하지만 너무 알려졌어…. 근데 브라우티언은 또 누구야!’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미국의 송어낚시>를 쓴 작가였다. 미국의 진보주의, 생태주의, 콜라주 구성…. 이여자와 인상적으로 대화하려면, 1900년대 이후 영문학 취향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읽고 반해서 혼자 책이랑 연애하다가 작가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곤 확 식었잖아요, 호호호.” 브라우티건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설가는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에디터는 몰라서 침묵했다. 무식을 한탄했다. 대신 커피와 초코 브라우니를 생각했다. 여자를 보면서는 앙큼하기보단 순진한, 여우보단 토끼, 고양이보단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말을 섞을 땐 또렷하게 눈을 맞췄는데, 순간순간 주위를 훑어봤다. 다른 데 앉아 있을 때도 그러다 에디터와 눈이 맞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얼굴과 태도에는 지금 ‘이 공간에서 흡수할 수 있는 모티프는 모조리 흡수하고 쓰겠다’는 글쟁이의 본능… 으로 치부하기엔 미묘하게 섹시한 뉘앙스가 있었다. 오른쪽을 둘러볼 땐 오른쪽 어깨가 살짝, 왼쪽을 둘러볼 땐 왼쪽 어깨가 또 살짝 올라갔다. 갸름한 턱은 어깨 밑으로 반만 묻혔다. 위쪽으로 길게 구부러진 속눈썹마다 호기심이 걸려 있었다. 여자의 호기심은 순수했고, 에디터의 호기심은 불순했다. ‘마사이의 책을 훔쳤다면, 혹시 토니 모리슨이나 스콧 피츠제럴드는 어때? 이따, 새벽 2시에 같이 책을 훔치러 가는 건 어때요? 마지막 배가 끊긴 울릉도엔 희귀 초판본만 모아 파는 헌책방이 있대.’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다 민망해서 실실 웃었다. “이십대엔 여행 가자는 사람이 또 그렇게 많았어요. 청량리역 마지막 기차의 로망, 차 있는 남자들이 서해안 가자는 호기. 지겨워.” 책 훔치러 가자는 그 얘긴 속으로만 생각하길 잘했다.

“제가 쉬워 보여요? 남자들 때문에 짧은 치마도 못 입어요. 클럽에 가도 한두 시까지 놀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고, 뉘앙스가 섹시한 옷도 좋아하는데, 그런 옷도 일부러 안 입어요. 포기한 게 많아요.”

“알 것 같네요. 저도 세정 씨(가명)가 스키니진이랑 반투명 면 티 입고 걸어 다닐 때 섹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섹스 하자는 얘긴 아니에요.)”

어떤 모임에서든, 한 명 이상은 추파를 던져 왔다. 겹치기도 했다. 한 모임에서 세 명이 각각 따로 만나자고 연락이 왔는데, 세 명은 친구였다. 서로는 몰랐다. 취향이 맞아서 대화가 즐거운 남자들은 부담도 없었지만, 밤이 되면 달라졌다. 취향은 빌미였다.‘ 속 깊은 이성 친구들’이 원하는 건 결국, 감색 란제리보다 더 깊은 무엇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동시에 느껴진 건 (에디터도 남자라는) 반성과 (수컷들에 대한) 경멸이었다.

“이십대 후반엔 외국 갔다 온 남자들 많잖아요. 연수든 유학이든. 그럼 꼭 저를 계도하려고 들어요.‘ 네가 한국에서만 살아서 즐길 줄을 모른다. 나를 거부하다니 라스베이거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그게 런던이든 바르셀로나든, 외국물 먹고 온 자기가 나보다 앞섰다는 거죠. 그게, 정말 멋진 줄 아는 걸까?” 아니면 뒤집어씌운다.

“저보다 어린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였어요. 삼십대 중반, 좋아하는 어른이어서 의심 않고 만났는데, 맥주 두 병 마시더니 갑자기 진지해져요.‘ 후우….’한숨 쉬고, 심히 고민하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죠.‘ 네가 날 흔들었다. 유혹은 네가 먼저 했다. 네가 나를 바라는 것같으니, 내가 결단을 내려주겠다. 열 살 어린 여자 친구와는 곧 헤어지겠다.’ 제가 말을 갖고 들었다 놨다 한다면서 뭐랄까,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기생이랑 서신 교환하듯. 저를 고급기생 취급하는 느낌? 하지만 그런 품위는 없이 혼자 들이대고 혼자 무너지는 경우죠.” 혹은, 포기를 모른다. 여자의 거절이야말로 수컷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섹시하다, 유혹하는 거냐, 그러다 거절하면‘지금까진 장난한 거냐’ 그러면서 임전태세가 돼요. 될 때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그게 재미라고 여기면서. 그럼, 전 일어날 준비를 해요. 관계는 거기서 끝이죠. 취향이 맞고, 대화가 통하는 남자들이 나중엔 꼭 그렇게 돼요. ‘까불지 마시라’는 말을 듣기 전엔 절대 포기 안 하죠.” 거기가 거기다.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여자한테 통하는 말이 아니란 걸, 백 마디 말 보단 어떤 태도가 여자의 마음을 움직인단 걸, 남자들은 어설퍼서 모른다. 여자 마음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군대에서 배운 걸까? 그개체수가 의외로 많다는 게 이 여자의 부담이다.

“‘네가 아직 나의 진가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많아요. 그땐 공작새처럼 뭔가 펼쳐놓기 시작해요. 수컷 본능이죠. 그것도 한시간 안에 결판이 나면 좋은데, 2년 넘게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스물셋 넘어서는 경계에 남자를 안 걸어 놨어요. 내가 섹스하고 싶은 사람은 한 명인데, 다른 남자들이 다 나랑 자고 싶어하면 인생이 피곤해지니까 확실하게 선을 긋는 거죠. 인격도 좋은 남자들이 그렇게 주기적으로 발광을 해요. 성추행 수준이면 차라리 뺨 때리고 일어나겠는데, 발광을 ‘젠틀’하게 하니까….” 안다. 이쯤 되면 남자들도 여자 탓을 하고 싶어진다. 미니스커트에 성추행의 책임을 묻는 남자들도 있는 나라니까. ‘품행이 단정치 못해서가 아니냐, 남자랑 둘이 술은 왜 마시냐’는 고릿적 편견들. 천편일률적이어서 궁핍한 유혹의 방편들.

“전 보수적인 편이에요. 섹스는, 남자 친구하고만 해요.‘ 캐주얼 섹스’는 즐기지도 않아요. 그런 소신이 있는데, 말할 기회도 없어요. 남자들은 죽어도‘당신과 섹스하고 싶다’는 얘긴 안 하니까. 어쩜 그렇게 빙빙 돌려 지겹고 꾸준하게, 포기도 모르고 ‘뻐꾸기’를 날려대는지.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전 당신과 잘 생각 없어요’그러는 것도 웃기잖아요. 당하고 있자니 괴로워요 진짜. 제가 야하게 생겼어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기엔 요모조모 매력적인 얼굴이어서“, 그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진중하게 말했었다. 나쁜 친구랑 어울리다 호기심에 절도한 사춘기 딸을 달래는 기분으로….

이 예쁜 여자랑 말이 잘 통하든, 술자리에서 웃을 때마다 내 팔을 잡았든, 그러다 허벅지에 손을 올려놨든, 심지어 서로 사랑해서 사귀기로 했든, 남자들은 공통적으로 서투르다. 새벽 1시에 둘 다 취한 채 모텔 골목을 빙빙 돌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하는 소심함이 오히려 익숙하다. 여자들도 그렇다.

에디터는 여자의 외모를 칭찬하는 데 익숙하지만 굳이 참는다. 오해 받을까봐. 저 여자가, 유혹받고 있다고 지레 생각할까봐. 섹스를 중심에 두고, 남자와 여자는 서툴러서 맴돌기만 한다. 말없이 오해만 깊어진다. 누렇게 얼룩진 이불 한 장과 보리차뿐인 여인숙 앞에서 서성대는, 지방 도시가 낯설기만 한 어린 커플들처럼.

“저 되게 힘들어요. 이상하게 들릴까봐 어디 가서 말도 못해요.남자들한텐 쉬워 보이고, 여자들한텐 재수 없어 보이잖아요. 남자 친구한테도 말을 못해요. 의처증 걸릴까봐.”

“그럼 어떤 남자면 오케이하겠어요?”

“제 결론은 이래요.‘ 이제 그만 좀 주절대고 멋있어지면 어때?’ 저 사람은 잠자리에서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생기는 남자가 속도를 맞춰 다가오면, 여자도 거부하긴 어려울걸요?”

“멋있는 남자, 그건‘예쁜 여자’보다 더 모호하잖아요.”

“인간적으로 대화하다가 취하면 수컷 본성 드러내는 남자, 그게 제일 구려요. 자기가 섹시한 걸 아는 남자들은 절대 안 그러죠. 자신감이 있으면 꼭 그날 밤이 아니어도 구질구질하게 한숨 쉬고 매달리고 빙빙 돌진 않겠죠.”

“예를 들어 봐요.”

“알 파치노, 클라이브 오웬. 그들이 섹스를 구걸할 것 같진 않잖아요. 결국 이미지겠지만… 최소한의 품위는 지켜달라는 거죠.”

제시카 고메즈와 킬리 하젤의 몸에 열광하는 남자들만 잔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 밤은 깊어 갔다. 알 파치노라…. 갈 길은 서로 멀었다.

    에디터
    정우성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