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이니까 괜찮아

밥 먹듯 싸우고 언제 그랬냐는듯 웃는다. 남들은 모른다. 우리만 안다. 동갑이라 그렇다. 우린 그런 사이다.

전영록, 이홍렬(55세)

이홍렬과 전영록은 한양중학교 동창이다. 이홍렬은 3반, 전영록은 4반, 창밖엔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훔쳐보던 비키니… 추억은 따로 남았다“. 너는 수영장 낀 반이 아니었지? 우린 수영장을 끼고 있었어.” 전영록이 자랑한다“. 우리도 다 봤지. 나는 그때부터 밝혔었어. 쉬는 시간마다 봤지.”40년 전이다.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다. “그때 친하지 않았던 게 아쉬워. 돌아가도 지금처럼 친해질 순 없었을 테지만. 영록인 대스타의 아들이었거든.” 전영록은 가수 백설희, 영화배우 황해 선생의 아들이었다. “그때도 개그맨이 되고 싶었으니까, 대 스타의 아들이 아는 척해줬으면 했지. 근데 영록이가 얌전했어요. 티를 안 냈어.” 전영록이 담배를 피우다 추임새를 한다. “초등학교 때 애들이 ‘네 아버지가 영화에서 사람 죽이던데’ 이러면서 막 돌을 던졌거든. 악역을 주로 하셨으니까. 중학교 때는 아무한테도 안 알렸죠.”

여기서부턴, 모두 이홍렬의 말이다“. 어느 날 대기실에서 만났는데 나보고 ‘우리 중학교 동창’이라고 그러잖아. 안 믿었지. 영록인 이미 톱스타니까, 근데 집에 가서 졸업 앨범 보니까 진짜 있어. 옆반에 코 뭉그러지고 안경 쓴 애가 있어. 영록이지. 내가 MBC <청춘 만만세> 할 때야. 그땐 영록이가 방송에서 ‘개그맨 이홍렬이 내친구’ 라고 하는 게 도와주는 거였어요. 힘이 실리는 거지.” “뒤에서 걷는 사람에겐 먼저 스타된 사람이 항상 스타예요. 영록인, 내가 볼 땐 항상 스타지. 2007, 2008년에 디너쇼 할 때도 ‘내가 영록이하고 같이 하다니 ’‘그 전영록이 내 친구야, 동창이라니까’ 생각했어요. 지금도 얘랑 동창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있어. 얘한텐 ‘오빠, 오빠’그러고 난 아저씨라니까.

다 얘기했지 이제? 내가 다 할게. 그러면 되지, 뭘 물어봐. 또 뭐가 있을까. 질문 안 해도 돼요. 아, 나는 얘랑 같이 그런 노래를 만들고싶어요. ‘여보게 친구, 우리 이렇게 잘 살았는데 무슨 욕심이 있겠니. 수다 속에서 젊음을 찾아보자.’ 그런 거.” 마침내, 전영록이 말했다. “야, 우리 그거 하자. 가사 적어서 나 줘. 나만들 수 있어. 방송용 말고, 그냥 우리 둘이 부르게.” 전영록의 여덟살 난 늦둥이 딸을 보고 “손주 본 거 축하한다”며 놀렸다는 얘기, 그때 같이 힘썼으면 나도 귀여워 죽겠는 딸이 있을거라는 너스레, 운동으로 다진 몸 담배로 망치지 말라는 당부, 아무래도 팔씨름을 이길 수가 없다는 투정. 전영록이 딱 한마디를 보탰다. “야, 이거 얼마 전에 부러졌던 팔이야….” 오십대 남자 둘이서, 내내 이런 식이었다. 에디터/정우성

한민관, 노우진(30세)

‘달인의 수제자’ 노우진이 말한다. “전 삼십대가 되니까 오히려 좋아요. 이젠 내 개 그 생활에 집중해야겠구나, 이게 하나하나 내 재산이구나 하는 책임감을 갖게 돼요.” ‘노 브레이크 엔터테인먼트 대표’ 한민관이 중얼거린다.“책임감이 있어야지, 애도 있는데.” 노우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에디터가 되묻는다. “아, 아이가 있나요? 결혼 안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둘은 미안해 하며 웃는다.“농담이에요. 이번엔 당하시네. 이런 거예요. 저희 둘 사이는.”

4년 된 친구 둘과 에디터 사이의 대화는 반 이상이 줄타기였다. 분장실에서부터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비하하고 힐난했다. 요즘 차고 넘치는 ‘막 말’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친해서 욕을 입에 달고 대화하는 남자 아이들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보는 게 맞다. 거기에 욕 대신 지나치게 진지한 걸 참지 못하는, 개그맨 특유의 근성이 들어갔을 뿐이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냥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다. “개그맨들은 웃기기 위해서 공격적일 때가 많아요. 어쩌면 서로 그렇게 장난을 치면서 연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한민관이 답한다. “마음이 맞아서 친해졌고,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개그맨 아닌 친구에게 했다간 분명히 싸울 일이겠죠. 먼저 삐치면 지는거예요.”

동갑이지만 노우진은 한민관보다 KBS 공채 1기 선배다. ‘깍듯하게 깐다’란 말이 어울릴까? 한민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지킬 건 지키는 거죠. 원래 노우진 선배가 술자리나 사적인 자리에선 말 놓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이란 게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해요. 그게 싫어서 말을 잘 안 놔요. 그래서 우진이 같은 경우엔…”노우진이한민관을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듯 가리킨다“. 이런 게 바로 제대로 된 농담이죠.”그저 안심한 표정들이 웃고 있었다.에디터/문성원

김경주, 조까를로스(한 명은 34세, 다른 한 명은 50세즈음이라고 우김)

불나방 스타 쏘세지 클럽 리더이자 보컬인 조까를로스는 떠올린다. “시인이라고 해서 도사 같은 사람이 나올 줄 알았어. 근데, 나랑 완전 비슷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다니까.” 그를 놀래킨 시인 김경주는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다. ‘츄리닝바람’이란 모임을 만들어, 공연기획도 하고 연극 대본도 쓴다.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던 청소년 문학잡지 <풋>에 인디 문화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불나방스타 쏘세지 클럽의 공연을 보고 그들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관점에서, 가사가 정말 시적이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웃겼어.” 여기서 조까를로스가 한마디. “우리는 무조건 유머야. 안 웃기면 안 돼.”김경주의 고백이 이어진다.“사실 까를로스한테 부러움과 질투가 있어. 나도 고등학교 때는 밴드를 했거든. 다시 음악을 하고싶은데, 모르겠어,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음악은, 왠지 욕심 같아.” 하여 그는 까를로스를 짝사랑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음악 못지않게 음악적인 시를 쓴다. 음악을 시의 모티프로 활용하는 시인은 많았지만, 시가 곧 음악이었던 시인은 많지 않다. 그의 두 번째 시집 <기담>은 다양한 한 곡의 음악 같다. 이 말은 비문이다. 그의 시 역시 익숙하고 전형적인 ‘시’로 읽히진 않는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를 뿐이니까. ‘다른’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막상 홍대 인디 문화를 접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틀에 갇혀 있는 거야. 난 무지하게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룰 같은 게 있더라. 그래서 생각했지. 반칙을 하자!” 그의 노래는 별나다. 주류사회를 비꼬는‘야비한’ 목소리와 가사를 듣고 있으면,인생 좀 삐딱하게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게 겉만 멀쩡한 놈들보단 낫다.

이쯤에서 궁금한 거 하나.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과 비슷하게 ‘노는’ 밴드가 생긴다면? “그럼 또 다른 노래를 해야지.” 듣고 있던 시인 가라사대 “오늘 보니까 우리가 키도 그렇고 체형도 그렇고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그들은 만화 보던 어린 시절을 훌쩍 지나 만났다. 하지만 과거 언젠가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같은 만화에 열광했었다. 친구는 닮아간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애초부터 닮아 있다. 일단 둘은 그렇다.에디터/ 이우성

전우치, 강레오(34세)

둘은 똑같은 오토바이를 앞 뒤로 줄지어 타고 스튜디오에 왔다. 앞서서 소리치며 달려왔을 것 같은 전우치는 프리랜스 음식전문기자다. 조용히 뒤따라왔을 확률이 높은 강레오 셰프는,그래도 오토바이 색깔은 다르지 않냐고 다부지게 말한다. 둘은 서른 넷 동갑내기이며 부모보다 더 자주 보는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다.

“친하게 지낸 지는 2년밖에 안 돼요. 제가 셰프 열 명을 인터뷰하는 특집기사를 쓸 때 처음 만났거든요.” 전우치가 말한다. 강레오는 당시 영국 고든 램지 레스토랑에서 헤드 셰프로 일하다 한국에 온 기대주였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매번 답답했어요. 주방 인원 5명으로 고든 램지 레스토랑 같은 걸 열어보자는 말도 안 되는 제안도 많았고요.” 그런 강레오에게 전우치는, 요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제대로 알아듣고 날카롭게 받아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우치에게 강레오는, 어떤 취재를해도 똑 떨어지는 답을 내놓는 황금 취재원이었다. 그렇게 함께 기사 기획도 하고, 방송출연도 했다. 만나면 할 이야기도 많고 먹어보고 싶은 음식도 많아, 합정동 일대에서 밤새도록 술도 퍼 마셨다.

“사실 친하긴 한데, 우리 싸우기도 엄청 싸우지 않았나?” “싸웠지. 쌍욕해가면서.” “요리에 대해 의견이 안 맞으면 처음엔 막 다퉜어요. 둘 다 성격이 불 같아서 이래요.” 에디터를 보며 전우치가 말했다. 도대체 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었다. “아까도 여기 스튜디오 올라오다가 이자카야가 하나 보여서 ‘여기서 이자카야가 잘될까?’, ‘맛은 괜찮을까?’ 뭐 그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하는 거죠. 질리지도 않아요.” 동갑내기라서 빨리 친해졌고, 동갑내기라서 많이 싸웠고, 동갑내기라서 오래도록 친구일 것 같은 둘은 실제론 주방 도구 들고 이렇게 칼 싸움 하진 않는다. 서울에서 최고로 실력 좋은 주방을 찾아갈 뿐이다. 에디터/ 손기은

류병학, 이준익(50세)

미술평론가이자 독립 큐레이터인 류병학과 이준익감독은 세종대학교 회화과 동창이다. 1979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직업은 화가라고 생각하는 스무 살들이었다.예술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수업 시간에 비가 오면 같이 비를 맞고 돌아다녔다. 데이트도 같이 했다. 제대 후엔 자퇴를 도모했다. 자퇴 기념 전시회론 미도파백화점을 캔버스로 덮어버리자고 했었다.

이준익이 말했다.“1천 호가 되든 2천 호가 되든 미도파를 덮어버리자는거였지. 근데 그거 허락을 안 해줄 것 같애.” 류병학이 받았다. “서울시청 가니까 종로구청 가라고 하고, 구청가니까 또 시청 가래. ‘씨…그냥 마로니에길에서 하자’ 마음을 먹고 계획을 거창하게 한 거죠.”
전시는 류병학 혼자 열었다. 이준익감독이 빌딩 수위를 생업 삼을 때였다. “시간이 없었어요. 먹고 살려니까. 근데 이 친구가 약속을 지킨 거야. 진짜 했어. 1천 호짜리 캔버스를 합정동 절두산 공원에 펼쳐 놓고 그걸 다 그렸어.” (이준익) “무지막지했지. 마로니에 거리가 1백 미터 이상 되는데, 열다섯 작품 정도 걸었어요. 호롱불도 만들었지. 근데 그날 비가 왔어. 비 ‘졸라’와서 전시가 완전 박살났지. 스물넷이었어.” (류병학)

듣고 있던 이준익이 물었다.“그때 난 뭐하고 있었지?” “자네는 야구공에 선수 얼굴 일러스트해서 백화점에 판다고 구단 쫓아다니고 그랬지.” “하여간 과대망상증 환자였어. 그 전시를 같이 못한 게 아직도 죄책감으로 남아있어요.”

85년, 류병학의 독일 유학 환송회 즈음에도 이준익은 수위였다. 선물 살 돈이 없어서 화선지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일필휘지로 썼지. ‘피와 눈물과 땀, 그리고 영광’ 그걸 쓴 기억이 나.” 두 번째 선물은 류병학이 기억했다. “내가 독일에서 몸이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이 감독이 또 뭘 써 준 게 있어요.” “참 잘 썼던 것 같애. 엽서에 앞뒤로 단편소설을 썼죠. 그림까지 그려서.”(이준익) “ 한 남자가 첨탑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종루 꼭대기엔 종이 있는데, 종 불알이 없었어요.” 이준익이 받았다. “종이 소리를 못 내는 거지. 그래서 내가 종 불알이 됐어. 얘가 밑에서 탕 치면, 내가 종을 치다 머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하여간 살벌했지. 자기가 불알이 되겠다고 그랬어. 나 보고 그걸 치라고. 앓다 일어나서 그걸 봤는데, 찡하더라고.”

독일에서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로 활동하던 류병학이 한국에 머무른 지는 1년 반이 됐다. 박수근의 ‘빨래터’위작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게 류병학이었다. 소송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두 사람은 동거 중이다. 이준익이 말했다.“언뜻 잘못 보면 둘이 사귀는 것 같지? 근데 진짜 여자랑 사는 것보다 편해. 신경 안 써도 되고. 투정이 없어.” 다시, 류병학이 받았다. “우리는 싸운 적이 없어. 지금 ‘빨래터’ 때문에 독일에 갈 수가 없잖아요.” “재판 끝날 때까지 같이 사는 거지. 안 끝났으면 좋겠어. 10년 끌었으면 좋겠어.” 이준익 감독이 출판사를 경영했던 1994년, 마지막 출판작은 류병학의 평론집 <이우환의 입장들들>이었다. 이준익은 “그건 개인적 우정이 공적인 파트너십으로 확장되는 지점” 이라고 말했다. 미도파를 덮어버리자고 시작했던 전시를 같이 못한 죄책감으론, 지금도 영화를 찍는다. “창작 활동에 대한 그때의 죄의식이 결국 영화 찍는 에너지로 치환된 거죠.”(이준익) “공부만 해서 전혀 모르던 사회를 이 감독한테 배웠지. 이 감독은 몸으로 다 체험했거든.”(류병학) 예술가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다만 담담하다.그건 그냥 일상이라서, 누가 종이고 누가 종지기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류병학이 기획한 전시엔,이준익의 작품도 있다.에디터/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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