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가 좋아요, 박찬욱이 좋아요?

어떤 감독들의 영화는 취향만으로도 호오가 갈린다. 그중 두 감독이 4월과 5월에 새로운 영화를 내놓는다. 기다리며, 이렇게도 즐긴다.

나는 홍상수가 박찬욱보다 더 좋다, 라고 이 글은 시작해야한다. 하지만 ‘나는 홍상수가 박찬욱보다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가 더 옳을 것이다. 홍상수는 좋아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감독이다. 대학시절 <강원도의 힘>을 극장에서 봤을 때는 기가 막혀서 구역질이 났다. 서정을 거둔 에릭 로메 영화. 남자들은 여자를‘따먹기’위해 존재했고, 여자들은 약삭빠르게 ‘따먹히기’위해 존재했다. 물론 그의 영화에는 그런 옹졸한 해석보다 더 깊은 결이 숨어 있었지만, 어쩌겠는가.당시엔 고작해야 스무 살을 갓 넘은 남자애였다. <생활의 발견>부터 홍상수의 영화는 재미있어졌다. 인간들의 궁색함을 조소하다 보니 내 꼴의 궁색함이 가소로웠다. 선배 기자가 말했다.“홍상수 영화는 어른 남자들에게 매년 보내는 선물이야.”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 따위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됐다. 자족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더럽도록 진짜처럼 재현하는 예술과 마주하는 용기랄까. 반면 박찬욱의 영화는 좋아지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잘재단된 장르영화였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아연질색할 부조리극이었다. 박찬욱은 첫 만남에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문제는 <올드보이> 이후부터 박찬욱 영화가 젠 체하는 예술가의 자기변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역시 홍상수와 비슷한 예술가다. 하지만 그 속의 인간들은박찬욱이라는 기계장치의 신에 의해 움직이는 마분지 인형처럼 영 힘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박찬욱의 <박쥐>를 그보다 더 흥분된 마음으로 기다린다. 전자는 여전할 것이다. 후자는 어쩌면 실망시킬 것이고, 혹은 깜짝 놀라게 만들지도 모른다. 제발 좀 그래줬으면.
김도훈 (<씨네21> 기자)

박찬욱과 홍상수 감독 중에서 좋아하는 이와 싫어하는 이를 구분해달라고 하는 건 좀 박절하다. 두 사람의 작품 세계가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서로 대치점을 그을 만큼, 세계관의 근본적 차이를 나타낼 만큼 상극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아 어느 쪽도 놓치기 싫은 플레이보이처럼 두 사람 다 만남을 계속하고 싶은 것이다. 줏대가 없다고?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우리의 내부를 동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다.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고 가슴이 아련했다.‘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유행가 가사 같은 제목은 세계와 인물에 대한 홍상수의 태도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그의 영화는 지식인 남성의 환멸스런 짝짓기 오디세이의 비도덕적인 모험이며 보기에 거북살스러운 비도덕행위 보고서의 유머 버전이라고 간주된다. 홍상수는 수직적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그런 감독이 아니다. 캐릭터를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영화의 등장인물이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결함이 많은, 모순투성이의, 욕망에 솔직한, 그럼으로써 외계인스러운 특징마저 갖추게 된, 복기해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일정하게 닮아 있는 인물들을 그리면서 홍상수는 우리에게‘잘 알지도 못하면서’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철저하게 해부한다. 부정으로 점철된 인간이해인 것 같지만 궁극에 긍정에 도달한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정화된 심정도 느낀다. 박찬욱의 신작 <박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시나리오와곧 출간될 소설을 읽었다. 박찬욱이 잘 만들 수 있는 유형의 소재일 것이다.‘빠다’냄새가 나는 흡혈귀 소재, 팜므 파탈과 흡혈귀의 만남을 이상하게 비틀어 몰고 가는 스타일, 거창한 관념을 즉물적인 폭력과 욕망의 구현으로 뭉개버린 다음 스타일로 관객을 얼얼하게 만드는 전략이 이 영화에 스며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박찬욱 역시 우리를 동요하게 만드는 영화감독이다. 홍상수와 달리 그는 현재 돈과 명예를 다 부여잡은 잘 나가는 감독이지만 세상과 예민하게 불화하는 종자임은 부정하지 못한다. 이 시대에 우리를 동요하게 만드는 감독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장렬한 파국의 스펙터클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술의 소명이 아닐까. 나는 홍상수, 박찬욱 두 감독의 세계를 다 좋아한다.
김영진(영화평론가)

기다리고 있는 건, 박찬욱의 <박쥐>보다는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유지태가 성현아에게“머리를 어떻게 했네요?”하던 것과 <극장전>의 엄지원이 김상경에게 “당신이 사랑하긴 뭘 사랑합니까?”했던 것. 끝내주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건 홍상수밖에 못한다고 감탄한다. 찌질이들이 나와서 온갖 궁상을 떨어도 역시 홍상수 영화가 좋다. 그런데 홍상수보다 박찬욱이 좋다. 홍상수에 대한 마음은 킴 존스가 만드는 옷은 좋지만 킴 존스는 별로,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홍상수는 뻔뻔스럽다. 돈이 없어서 배우들을‘공짜’로 출연시키고, <밤과 낮>을 오르세 미술관에서 ‘공짜’로 찍을 때 유학생들이 ‘공짜’로 도와줬다고 말한다(그나마 다행인 건, 그걸 자랑은 안 한다). 늘 그게 그거 같은 스웨터만 입고 부스스하게 나타나니 낮술 마시고 자다가 방금 전에 깬 남자 같기도 하고 너절한 룸펜 같기도 하다. 반면 박찬욱은 세련된 여우다. 시상식에 갈 땐 좋은 수트를 골라 입고 ‘스타일’이 뭔지 안다. 이 부분에선 작정한 것 같은 김지운보다 훨씬 고수다. 정유 회사와 텔레비전, 자동차 광고에 출연하고, 필요하면 유감을 표현한 매체에도 인터뷰를 한다. 상업적이란 공격을 받으면 돈 많이 벌어서 제대로 된 영화 만들 거라고나긋하게 말한다.‘포토제닉’한 데다 말을 잘하니 인터뷰를 읽고 나면 호감이 생긴다. 그렇다고 아주 말랑한 건 아니어서 얼핏 까칠하고 적당히 거만하다. 한마디로 매력이 뭔지 안다. 마이크 앞에서 졸고 있는 홍상수를 봤을 때 드는 답답한 마음이 윙 칼라 셔츠에 실크 보타이를 제대로 맨 박찬욱을 볼 땐 확 풀린다. 홍상수의 영화는 누구에게든 자꾸 권하고 싶지만, 홍상수를 누군가에게 소개시키기란 조마조마하다. 박찬욱은 다르다. 안심이 된다. 질문이“홍상수의 영화가 좋아요? 박찬욱의 영화가 좋아요?”였다면 대답은‘홍상수의 영화’다. 그러나 이 질문엔 박찬욱이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강지영( 패션 디렉터)

홍상수의 영화는 세련됐고, 박찬욱의 영화는 촌스럽다. 둘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홍상수가 더 좋은가? 하면 사정은 꽤 복잡해진다. 과거엔 홍상수라는 감독을 증오하기까지 했다.‘그런’한국남자들을‘세련된’ 방법으로 캐릭터화했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은 홍상수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의 서울과 한국을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줘야할 것인가에 대해 홍상수를 제외하면 어떤 감독도 확실한 답을 내지 못했다. 정말 어려운 문제기 때문이다. 풍경의 클리셰 따위도 찾아볼 수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그걸 넘어서는 걸 보여줄까? 홍상수는 클리셰가 없는 나라에서 자신만의 클리셰를 만들어냈다. 이윤기의 <멋진 하루>가‘홍상수영화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한 건, 인물 때문이 아니라 서울을 보여준 방식 때문이었다. 실제 풍경을 보여주는 것과 실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을‘만들어’보여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홍상수는 후자를 통해 전자의 효과를 낸다.<극장전>의 종로와 <밤과 낮>의 파리가 똑같아 보인다는게 바로 그 증거다. 결과적으로 서울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도시인지를 아름다운 방법으로 확인하게 된다. 박찬욱의 영화를 볼 때면 머리가 풀어진다. 그는 언제나구원이나 용서 같은‘촌스러운’주제를 국제적인 감각의 화면으로 만들어낸다. 화면이나 인물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억지로 집어넣는 것도 촌스럽지만 귀엽다.‘영화를 좀 본다’는 사람들이 그를 촌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촌스럽고 좋다. 잘 쓰는 문학동아리 선배를 볼 때 느낄 법한 편안함이다. 홍상수는 세련됐지만 피곤하고, 박찬욱은 촌스럽지만 편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래서 누가 좋으냐 하면, 홍상수다. 최근작인 <밤과 낮>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지독함이 줄어들고 헐렁함이 늘어나면서 딱 즐길 만한 수위였다. 그리고 편안한 촌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불편한 세련됨에 대해 말하는 게 더 낫다.
에디터/ 문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