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와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100시간

나흘 남짓 함께 있었던 걸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한 두 잔 마셨다고 그 위스키를 다 알 수도 없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윈저의 증류소에서 하정우와 100시간을 함께 보냈다.

스코틀랜드의 공기는 한국과 같다. 얼핏 강원도 횡성 같기도 했다. 서울에서 런던, 그리고 런던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애버딘은 스코틀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그런데도 조용하기가 새벽녘이다. 애버딘에서 다시 차를 타고 2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한 곳은 디사이드 Deeside . 디Dee 강을 끼고 있어서 이름이 이렇다. 좋은 물이 있는 동네에 좋은 술을 만드는 증류소가 있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정우와 에디터가 스코틀랜드에 온 이유는 위스키 브랜드 ‘윈저’의 핵심이 되는 증류소를 방문하고 둘러보기 위해서다. 사실 윈저는 그동안 국내에서 ‘싼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바bar보다는 룸에서 더 많이 팔리는 술로도 알려졌다. 윈저의 브랜드 매니저 김양수 과장은 “윈저가 국내에서 크게 성공해 중국에도 론칭해요. 윈저가 속한 글로벌 주류 대기업인‘디아지오’에서도 윈저의 품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요. 그에 비해 이미지가 좋지 않아 그동안 걱정이 많았죠.” 그래서 술을 좋아하면서 이미지도 좋은 남자배우와 함께 위스키 증류소를 둘러보는 일정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배우로서 인정받고, 멋진 남자로 자주 거론되는 하정우라면 기존의 윈저 이미지를 바꿀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증류소에 가기 전에 차로 디사이드를 둘러봤다. 조용하다 못해 풀 뜯는 소도 정지한 듯한 인상을 주는 동네였고, 끝도 없이 산과 나무가 이어졌다. 산은 울창한 나무숲이 아니라 꺾어질 듯 키 큰 나무가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땅은 건조한 느낌이 전혀 없이 눅눅하고 푹신해 보였다. ‘이끼 같은 게 땅에 깔려 있는 건가?’생각했는데, 차량 운전을 담당한 스코틀랜드인이 ‘피트peat’라고 일러줬다. 그제서야 위스키의 ‘피트 향’이 난다고 했던 테이스팅 노트가 생각났다. 주로 그을린 나무냄새를 이야기할 때 썼고, 아일레이 위스키인 라프로익 같은 걸 마실 때 피트 향이 훅 올라왔던 것 같다. 피트는 섬유소, 이끼, 낙엽,해초류가 한데 모여 화석이 된 땅이고 이걸 삽으로 푹 퍼서 위스키 제조 과정에 사용한다고 했다. 동석한 ‘윈저’의 브랜드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보리가 발아하는 걸 멈추려고 굽는 과정에서 피트를 사용해요. 피트 연기가 보리에 스며들기 때문에 위스키에 당연히 피트 냄새가 배는 거죠.”과연 위스키의 모국이다. ‘로열 라크나가’증류소에 도착했다. 현지 사람들은 ‘로열 로흐으크라가’라고 발음했다. 이 증류소는 윈저에 들어가는 여러 위스키 원액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를 생산하는 곳이다.

‘로열’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빅토리아 여왕이1848년 이 증류소에‘왕실 보증서’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디사이드에 있는 여왕의 별장‘발모랄’성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 곳에 여왕이 우연히 들렀다가 위스키 맛이 좋아‘인증’했다는 뜻이다. 맛도 맛이지만, 작고 기품 있는 증류소의 모습에도 감동했을 것 같다. 화려한 명성에 비하면 소박한 접대실에서, 만난 지 거의 36시간 만에 하정우와 정식으로 인사했다.

소주를 더 좋아할 것 같지만, 위스키도 자주 마시나? 그렇다. 위스키는 브랜드를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사서 마시는 편이다. 시바스리갈, 조니워커, 발렌타인을 많이 마시는데 중요한 자리에 방문하거나 누굴 초대할 땐 한 21년 정도가 좋은 것 같다. 백화점에서 사는 것보다 남대문이나 신사시장에서 사는 게 싸다.

남대문은 워낙 모조품이 많아서…. 맞다. 그래서 신사시장에 더 자주 간다. 위스키 21년을 15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오랫동안 보따리장사를 해 온 분에게 부탁해놨다가 사곤 한다.

술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역시나’다. 위스키 미니어처도 많이 모은다. 옛날엔 그런 거 하는 사람들 보면 뭐하는 짓인가, 했었는데 한 두 개 살 때마다 되게 재밌다.

어떤 위스키를 좋아하나? 발렌타인. 여러가지 마신다.

누가 또 물어보면 윈저나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조니워커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하하.

위스키는 어떤 맛을 좋아하나? 좀 단것? 그렇다. 너무 스모키한 건 별로다. 사실 위스키의 향은 디테일하게 알기가 힘든 것 같다. 와인이랑 좀 다른 것 같아서.

윈저의 마스터 블렌더인 더글러스 머레이가 옆에서 대화를 거들었다. 위스키의 풍미를 잘 구별 못 하겠다는 하정우에게 여러 브랜드 위스키를 꾸준히 마시다 보면 맛을 알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곤 블렌딩의 미학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윈저도 그렇고, 우리가 쉽게 마시는 위스키는 모두 블렌디드 위스키다. 증류소에서 나오는 원액을 여러 개 섞어서 원하는 맛을 만드는 것이고, 더글러스 머레이는 그것을 총괄하는 전문가다. 흔히들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좋은 술이라고 여기기 쉬운데, 블렌딩에 들어가는 그 날카로운 감각과 원액의 수를 생각한다면 쉽게 단정할 순 없다. 마스터 블렌더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물었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클라이언트가 어떤 맛의 위스키를 만들고 싶은지 알아듣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니까. 하나의 위스키를 만드는 데 총 1년 반이나 걸린다.”

더글러스 머레이는 하정우를 위스키가 가득 찬 찬장 앞으로 데려갔다. 위스키의 맛을 구별할 수 있도록 맛의 차이가 극명한 원액을 시음해보기 위해서다. 첫 번째는 링크우드Linkwood라는 이름의 위스키. “푸른 벌판, 잔디밭의 상쾌함이 느껴질 겁니다. 레몬을 한 겹 벗겼을 때의 맛과도 비슷하고요. 물을 살짝 넣으면 색깔과 맛이 바뀝니다. 어때요?”하정우가 답한다. “스무더Smoother!”두 번째로 맛본 위스키는 달위니Dailuaine로 단맛이 확실한 위스키였다.“아까보다 잔에서 흘러내리는 모습이 두껍죠. 좀 더 달아서 오렌지 주스 같기도 합니다. 어떤 게 더 좋나요?”하정우의 선택은 두 번째 것.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위스키의 맛도 단맛이 가미된 것이다. 윈저도 그렇다. 거칠고 스모키한 위스키는 아주 전통적인 위스키 맛을 선호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좋아한다.

윈저에서 새로운 블렌딩과 새로운 병 디자인으로 출시하는 ‘윈저 XR’엔 더글러스 머레이의 사인이 들어 있다. 마스터 블렌더가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다는 마지막 마침표다. 머레이는 하정우에게 “당신은 엄청나게 큰 영화 포스터에 얼굴이 실리지만 난 이렇게 작은 병에 사인이 들어간다. 그러니 스스로 이 병이 너무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두 크게 웃었고 로열 라크나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한 잔씩 마셨다. 하정우는 증류소 내 기념품 가게에 가서 시음잔과 ‘로열 라크나가’위스키를 샀다. 위스키 전문 서적도 한 권 산 뒤, 더글러스 머레이의 사인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걷는데 숙소의 방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Glen Turret, Glendronach, Glen Scotia, Glen Ord. 모두 위스키 이름이었다. 물어보니 글렌Glen은 스코틀랜드의 계곡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물 맑고 산 깊은 이곳에서 만든 위스키의‘갓 뽑아낸’맛이 궁금했다. 기대감으로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로열 라크나가의 핵심인 오크통 저장고로 향했다.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저장고에서 소젖 짜듯이, 스포이드 같은 걸로 위스키를 끌어 올렸다. 한두 방울이 오크통 밖으로 흘렀는데 향이 확 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코를 벌름거렸다. 하정우가 먼저 한 입 마셨다. “우오오!”만난 지 60시간 만에 하정우의 가장 큰 목소리를 들었다. 오크통에서 바로 나온 위스키는 향이 확 퍼지면서 가슴을 타고 들어갈 것 같고, 알코올도수 50도가 넘어서 혀의 양쪽 끝이 꽉 조였다. 물론 맛있다는 뜻이다. 약간 상기된 하정우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스키 잔을 돌렸다. 술을 잘하는 사람도, 전혀 못하는 사람도 모두 맛에 놀랐다. 이 증류소의 공장장인 도널드 랜윅이 망치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오크통의 원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기 위해 오크통 바닥을 두드릴 때 쓴다고 했다. 위스키의 증발은 매년 2%씩 정확한 편이라, 망치로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숙성 기간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망치로 이 통 저 통 두드리면서 술에서 술로 이어지는 인터뷰를 다시 시작했다.

스코틀랜드는 처음인가? 영국 자체가 처음이다. 유럽 시골은 다 조용하고 한적한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축구에 미치는지 알 것 같다.

위스키에 미치는 이유도 알 것 같지 않나?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어르신들 농사 끝나고 약주 한잔 하시는 것처럼. 체코 까를로비 바리 영화제에 갔었는데 거기도 그랬다.

증류소 구경은 어땠나? 위스키 증류소를 본 것도 기억에 남지만 위스키 장인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본인이 하는 일을‘예술‘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이 멋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쯤 되지 않나? 그들을 보니 위스키하면 왜‘스카치’위스키인지도 알 것 같고.

집에선 위스키를 어떻게 마시나? 물반술반.

제대로 된 방법이다. 밖에선 폭탄주도 먹고 하지만 집에 있을 땐 술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잔은 잘 갖춰서 마시는 편인가? 원래 잔 모으는 걸 좋아한다. 커피잔 같은 것. 컵에 대한 집착이 조금 있는 것 같다.

뭐라고? 접시랑 컵은 매일 보는 거다. 혼자 살아서 집에서 거의 음식을 해먹는다. 다른 사람들과 생활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집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찾게 된 것 같다. 웃긴 얘기지만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잔은 내가 다 가지고 있다. 어제도 기념품 가게 가서 잔 두 개 샀다.

그렇다면 잔 쇼핑은 주로 어디서 하나? 이천 도자기 마을에 아웃렛이 있다. 얼마 전에 찻잔을 두 개 샀는데, 아우, 정말 느낌 있는 걸로 사왔다.

당신의 술잔 컬렉션이 탐난다. 근데 와인잔은 하도 깨먹어서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술 마셔도 끝까지 정신 차리고 안 깨려고 하는데, 설거지 통에서 쌓이다 보면….

주량이 센가? 한 번도 필름 끊겨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좀 심심하긴 하다.

한 번 끊겨 보면, 아침이 무서워진다. 유일하게 확 취하는 술은 고량주다. 금문 고량주는 58도 짜리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술을 좋아한다. 윈저와 함께 이곳에 올 만한 명분이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참 느낌이 좋은 여행이다.

어떤 느낌이 좋았나? 온도, 환경이 주는 따뜻한 기운.

위스키를 마시고 나면 늘 그렇다. 맞다. 술 종류마다 기분이 다르다. 소주를 마시면 공격적 성향이 나오고, 레드 와인은 역시나‘다운’되고, 화이트 와인은 즐거워지는 것 같고.

어떨 때 술을 마시나? 상처를 받고 실연을 당했을 땐 술을 안 마신다. 술이 사람을 구차하게 만들 때가 있으니까.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본능이 자꾸 나온다. 늘 즐겁게 마시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술자리가 유난히 많다. 어떤 땐 너무 심할 정도로.

싫은가? 내가 먼저“술 먹자”라는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철칙을 세웠다.

술 먹자고 말하는 사람이 많나? 유난히 작품을 이어서 하다 보니까 그렇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팀하고 마시다가, 촬영 끝나면 만남이 없어지고, 또 그러다가 다음 팀이랑 마시고.

술 먹으면 평소보다 훨씬 유쾌해지는 것 같다. 내가 예민한 것 중에 하나가‘연기를 어떻게 하면 잘 할까’, 또 하나는‘개그가 절대 녹슬지 않아야 할텐데’다.

사람들이 너무 하정우의 연기만 보고 있었던 거군. 당신이 워낙 정신없이 일만해서 그렇다. 작년엔 영화가 줄줄이 개봉됐었다. 작년 하반기까지 정말 바쁘고 피곤했다. 그때 건강 염려증이 생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다.

보는 우리도 그런 느낌 있었다. 낯빛도 안 좋았던 것 같고. 몸보다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어느 것도 공급을 못 받았던 것 같다‘. 인풋’없이‘아웃풋’만 계속 만들었다. 일본에 가서 찍은 <보트> 때가 정말 힘들었다. <추격자>, <비스티보이즈>, <멋진하루>가 연이어 개봉되고 또 혼자서 계속 홍보활동을 했다. <보트> 촬영이 끝나고는 바로 홍상수 감독님 영화 찍고 또 바로 <국가대표> 합숙훈련하고. 지난 주에 겨우 <국가대표>가 마무리됐다.

이젠 어떻게 살 건가? 요즘 같은 경우는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다.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지 이젠 알 것 같다.

일상으로? <서른살에게 묻는 심리학책>을 보니까‘난 특별한 사람’이라는 본능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한다고 하더라. 연예인은 그게 진짜 크다‘. 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걸 꺼뜨리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이 있다. 그래서 이젠 애초에 그걸 기대하지 않고, 도리어 더 일상으로, 더 김성훈(본명)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축구팀도 만들어서 친구들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축구도 한다. 그리고 제일 큰 건, 여자친구를 사귀게 돼서 내 생활에 집중할 수도 있게 됐다. 일반적인 서른 두 살에 집중하며 살려고 한다.

그럼 김성훈으로 함께 술 한 잔? 원더걸스가 좋은지 소녀시대가 좋은지 같은 수다나 떨면서. 난 원더걸스가 나오면 원더걸스가 좋고, 소녀시대가 나오면 소녀시대가 좋더라.

술은 윈저 17년이 어떤가? 느낌 있는데?

SHARE
[GQ KOREA 피처 에디터] Eat, Drink,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