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여행자와 저자의 부적절한 관계

2009.07.27장우철

대형서점 여행 코너는 흘려쓴 손글씨 제목으로 홍수다. 표지엔 자전거, 하늘, 골목길, 빨래 사진으로 난리다. 행선지는 오대양 육대주도 모자란데, 왜 다 똑같아 보일까?

여행은 모두의 이상이다. 그러나 누구나 휙, 떠나진 못한다. 다른 사람의 여행에 관심을 두는 건 그 때문일까? ‘내가’ 떠날 수 없으니까. 예전엔 ‘나도 가려고’ 여행 서적을 읽었지만, 요즘은 ‘나는 못 가도’여행 서적을 읽는다. 일종의 대리 체험이다. 그러니 책 속의 여행은 응당 신비롭고 여유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하늘, 구름, 바람,골목길, 자전거, 그림자….그런데 여행 서적이 모인 코너에 가면 정신이 혼미해진다.첫째는 도대체 이 많은 여행이 기록하는 것은 뭘까 하는 의문 때문이고, 둘째는 왜 모두 비슷비슷해 보일까 하는 황당함 때문이다. 표지만 보면 한 사람이 다 썼나 싶을 정도다. 집히는대로 한 권을 들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자전거로 여행했다는 제목이다. 지구본으로도 반 바퀴는 돌려야 할 것 같은 거리인데 자전거로 갔다고? 차비가 없었나? 다른 한 권. 어느 도시의 지붕 밑을 걸었다는 제목이다. 지붕 위를 걷진 않았다는 뜻인가? 또 다른 한 권이 있다. 작은 휴식을 꿈꾸고 싶다는 제목이다. 큰 휴식을 꿈꾸면 여행이 좀먹나? 이런 삐딱해진 시선의 근원은 같다. 저마다의 소중한 취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감성에 호소하려는 책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마땅히 좋다면 자전거를 타고 지구본 반 바퀴가가 아니라 열두 바퀸들못 돌까.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면 지붕 밑이 아니라 가시밭길인들 즐겁게 걷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어디서 무슨 여행을 하든 다 똑같아 보인다는 거다. 심지어 사진도 똑같다. 찍은장소는 다른데 내내 그 사진이 그 사진이다. 탁자 위의 빈 컵이나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 사진 같은 게 나오지 않는 여행 에세이가 과연 있을까? 책이 그런 지경이니 독서 역시 천편일률이다.

세상의 모든 동경을 담아 떨리는 감성으로만 여행을 헤아리는 독서. 낯선 곳에서 읊조리는 허드렛소리만 떠다니는 독서. 그런 상황을 수확하는 가장 대표적인 낱말이 바로 ‘거닐다’이다. 가만 보면 모두 거닐고 있다. 뒷골목을 거닐고, 시골길을 거닐고, 유럽 어디를 거닐고, 가만히 거닐고, 문득 거닐고, 낮잠 자다 말고 거닐고, 자전거 내려서 거닐고…. 그 말은 일련의 여행 에세이 성격을 단박에 통합시킨다. 허우대를 위한 제스처거나 여유롭게 보이려는 알량한 수법이거나. 딱딱한 사무실 의자로부터, 내일까지 해야 할 일로부터, 지긋지긋한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동떨어진 채 다만 유유자적 걷는 일. 여행자는 필연적으로 많이 걸을 수밖에 없다지만 대체 뭘 그리도 거닐고 거닐어야 하는 걸까? 혹시 저린 무릎에 붙일 파스 같은 건 필요없는지 묻고 싶다.물론 어떤 글이든 취사선택은 불가결하다. 말하고싶은 것만 말할 수 있다는 건 저자의 권리다. 하루 종일 맑은 날씨였대도, 하필 해가 잠깐 숨었던 흐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죽을 고생을 했어도 말끔히 삭제시킬 수 있다. 한없이 즐거웠어도 단 한 톨의 슬픔을 남긴채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말할 수 있다. 그 선택이 어떤 기준으로 진행되는가에 따라 책도 독자도 갈린다. 쨍하게 찍힌 노을 사진과 어슴어슴 찍힌 노을 사진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도 갈린다. 다른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어 갈리는 건 아니다. 여행 에세이는 한 종류밖에 없다. “기존 여행 서적들이 정보 위주로 된, 그러니까 실제로 그곳을 가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었다면, <끌림>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는 독자들의 범위가 일반적인 에세이가 차지하던 범위까지 확장된 겁니다. 여행에세이를 사지만 거기서 독자들이 읽고 싶어하는 건 여행 자체가 아니라는 거죠.” 성공적인 여행 에세이를 많이 내는D 출판사 편집자의 간결한 설명이다. 이해는 비교적 쉽다.여행지에 관한 세세한 정보들은 빠르고 정확한 업데이트가 생명일 텐데, 그건 인터넷을 따를 자가 없으니, 굳이 어떤 정보를 책을 통해서 취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두 번째는 직접 여행을 떠나는 대신 책을 읽는 간접 체험이 더욱 감성적으로 풍부한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경기가 안 좋아도 여행 에세이는 잘 팔린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행에 관한 동경을 느끼기만 하면 그만인 책이기 때문이다. 요즘 여행 에세이를 사는 독자들에게,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소재다.“꼭 특별한 경험을 전할 필요는없습니다. 오히려 독자들은 일상적인 것들을 더 편하게 읽으니까요. 여행지는 낯설고 평소에 못 들어본 곳일수록 좋지만, 거기서 전하는 얘기는 어디서나 흔할 것 같은, 읽는‘나’와 비슷한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거죠.” 축약하면 이렇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얘기를 따뜻한 감성으로 전한다.여행 에세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는 김동영의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는 보다 확실하게 독자를 파고든 경우다.이 책이 여느 여행 에세이와 구분되는 점은 저자가 여행 에세이를 즐기는 독자층과 같은 또래며, 그것을 책의 중요한 콘셉트로 삼았다는 점이다. 스물아홉 살에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긴 여행을 떠나 이런저런 일들을 겪는 이야기는 지금 대한민국 1등 문화 소비자인 그 또래 독자들에게 거의‘내 얘기’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여행 에세이는 자기개발서의 영역으로까지 무리 없이 안착하는 중이다.여행 에세이는‘여기’서 하면 평범한 말들이 낯선 ‘저기’에서 할 때 달라지는 효과를 노린다. 속임수나 거짓말은 아니다. 한강에선 없던 마음이 과연 세느강에선 자연스러울수도 있으니까.

탈탈 털어도 보푸라기 하나만큼도 안 나던 분위기가 ‘거닐다 보니’나올 수도 있고, 예전엔 미처 몰랐던 깨달음이 생기기도 하며,‘ 여기’서는 진부했던 생각이 ‘저기’서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여행이 여행자에게 주는 완전한 축복이다. 그러니 소중한 책갈피처럼 고이 간직해도 좋을 것이다.하지만 거기까지라야 한다. 여행자 신분에 머물러야 한다. 여행자가 문장을 가꿀 줄 모르는 저자로 변하는 순간, 모든 게 변질되기 시작한다. 입이 딱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읽는 사람이 외려 부끄러운 격언 퍼레이드는 가장 일반적인 변질이다. 사랑은 무엇이고, 열정은 어떤 것이며, 만남은 그게 아니라 이런 것이고, 소통은 진정 여기 있으며, 느낌은 정녕 무엇이라는 등의 억지들. 그 수에 빤히 넘어간 독자들이여행 에세이 붐을 만들었지만, 스스로 그 덫에 갇혀 있음도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행 에세이는 그렇게 계속 반복되며 행선지만을 더 낯선 곳으로 바꾸고 있다.여행을 소재로 한 텍스트는 그 역사가 깊다. 일찍이 정복의 시대와 탐험의 시대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부터 박지원의 <열하일기>며 정철의<관동별곡>,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 시대를 초월한 글들이 여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구가 둥근 줄도 몰랐던 시대로부터 유아적인 격언을 남발하는 요즘까지, 여행은 변함없이 매력 있지만 그것을 다룬 글까지 매력적이긴 힘들다. 그토록 거닐었던 이들도 힘들었겠지만.

    에디터
    장우철
    포토그래퍼
    장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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