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쓰고 싶습니다

올해 각종 국내 영화제에서 인상적인 영화를 내놓았던 감독 열 명에게 물었다. 어떤 배우와 함께 영화를 찍고
싶어요? 든 것이 없는 비닐봉지가 안에 뭔가 있는 척 어설프게 부풀어 올라, 더 미운 주름들을 표면에 남기는 걸 생각해보라. 이승효는 그런 주름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고현정
영화를 찍을 때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배우의 존재감이다. 누가 대신할 수 있는것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현정이 생각난다. 운 좋게도 그녀를 영화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녀가 보여준집중력과 연기의 폭은 나를 포함한 모든 현장 스태프의 시선과 행동을 고정시켰다. 그녀의 울림을 얻은 대사 한 마디는 미묘한 운율과 독특한 리듬감으로 인물의 여백을 채웠고, 극은 활력을 더해갔다. 하루하루 그에너지를 충만하게 느끼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그녀는 모든 순간을 고민하면서도 기꺼이 즐길 줄 알았고, 자신이 특정한 이미지로 소비된다는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 극복하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든 긍정과 부정의 질문 끝에 오롯이 그 자신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갖고 있던 배우에 대한 거대한 물음표에 하나의 답을 줬다. 그리고 언젠가 나누었던 사담에서 <오프닝 나이트>의 지나 롤랜즈의 연기에 대한 그녀의 얘기에 대단히 공감하면서 이 명민한 배우를 내 영화의 현장에서 만나고싶다고 소망하게 됐다. 고현정이라는 사람을 품고 있는 배우고현정을 언젠가감독과 배우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임오정(<거짓말>, 미장센 영화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작품상)

남상미
처음 본 것은 경찰관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달콤한 스파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였는데 너무 귀엽고 발랄한 모습이 첫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남성들 사이에서는 한양대 앞 ‘롯데리아 걸’로 배우가 되기도 전에 유명세를 탔던 남상미였다. 2004년 여름, 직장을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연구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결혼’에 관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어떤 여배우가 이역할을 하면 좋을까? 혼자서 미모의 여배우들을 대입시켜보며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서는 더 이상의 대입을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성숙함을 더해가고있고, 나는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로 영역을 확장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어디선가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며 성장 중인 열혈 여성 감독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만났을 때 폭발적인 화학 작용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 김은경(<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 전주국제영화제 KT&G 상상마당상 감독상)

노홍철
물론 그는 영화배우는 아니고, 배우를 하고 싶은 의향이 있는지도 전혀 파악할수 없다. 예능 프로에서 성실하고 일관성 있게 떠들어 ‘제끼고’있는 그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끔씩은 저 사람이 내 배우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게된다. 방정맞고 깜찍하고 시끄러운, 지금껏 구축된 이미지와는 별개의 이유 때문이다. 나는 일단 인물이 귀여웠으면 좋겠다. 그 말은 배우가 능숙하게 뭔가를 재현하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반응들이 얼굴에 보였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노홍철은 자극과 반응이 동시에 오는 사람 같다. 뇌와 얼굴근육들이 직통으로 연결된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능력을, 완벽하게 정돈된 능글맞은 수염 라인에 빛나는 인간 캐리커처( 및 그것이 벌어다 주는 돈) 밖의 무엇에다 써본다면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꽤 재미있지 않겠나 싶다.캐리커처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 만들어보는 거다. 결과가 전혀 예상되지 않는 일종의 모험이겠지만.
– 남궁선(<최악의 친구들>, 미장센 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작품상)

김윤석
연기자의 위력은 영화를 만들면서 계속 자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만드는이들이 열망하는 배우와 보는 이들이 반하는 배우는 다를 수 있지만, 연기력이 훌륭하고 매력이 있는 배우라면 둘 다 관심을 갖기 미련이다. 그리고개인적으로 발견했을 때 느끼는 쾌감 또한 둘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년의히어로는 배우 김윤석이었다. 영화 <추격자>로 명실공히 영화계 안팎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일부 영화 팬들에게 그는 이미 연기 잘하는배우로서 주목받고 있었다. 그를 처음 주목하게 된 영화는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였다. 사실적인 폭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부정의 눈망울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극의 캐릭터를 소화하는 그의 집중도와 능력은 이후 아침 TV 드라마속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극의 캐릭터에 동화되어 굉장히 사실적인연기를 끌어내는데, 그게 바로 그의 매력이다. 하지만 더 큰 매력은 얼굴 혹은 표정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정서적인 이미지다. 그의 멍한 표정에서 극의 흐름과 연관된 인물의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추측하고 몰입한다. 김윤석은 아직 보여줄 게 많은 배우다. 다소 거칠고 강인한 이미지너머로 해학과 멜로의 감정선, 그리고 복잡 다양한 수많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를 통해 인간의 미묘한 이중성을 표현해보는 상상을 해본다. 하루빨리 그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 행운의 시간이 오길 기대해본다.
– 박홍준(<소년마부>, 인디포럼 폐막작)

정유미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어눌하고 착한,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짝사랑하는 선배를 바라보던 정유미의 모습은 개인적인 발견 중 하나였다. 이후 <사랑니>, <가족의 탄생> 등 인상적이었던 한국영화에도 신기하게 그녀가 등장했다. 불안함과 청순함, 엉뚱함을 동시에 가진 그녀는 특별했다. 하지만 함께 작업한다면 변신시켜주고 싶다. 기타 줄을 우걱우걱미나리처럼 씹어 먹는 퇴폐적인 펑크 걸은 어떨까? 드럼에 다이빙을 하고 술과 약에 절어 있더라도, 어느 순간 그녀만의 매력이 나올 테니까.
– 백승화(<반드시 크게 들을 것>, 부천국제영화제 장르상)

차수연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에서 에바 역을 맡았던 에스터 벌린트를 좋아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매력은 심드렁한 모호함이다. 행위나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배우의‘존재감’이라고 생각한다. 차수연의 연기를 본 것은 <별빛속으로>가 고작이며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 몇 장을 본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차수연에게는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매력이 있었다. 정갈하지만 도도해보이는 인상의 하얀 신체는 스크린에서 더 빛나는 종류의 것이다. 클로즈업보다는 풀샷에서 더 어울리는 것도 그렇다. 언젠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영화를 찍을 계획이다. 용광로 같았던 그때의 하위문화를 담는 영화 안에서 그녀가 지금의 매력을 가진 채 망가져줬으면 좋겠다. 원래 관객들은‘예쁜 것’이 망가지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면서 숭고미를 발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 김보라(<유랑시대>,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하정우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몇 년 전 비디오방에서 본 <용서받지 못한자>에서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사실적이다 못해 ‘좀이상하다’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영화 특유의 불편하면서도입체적인 상황이 그의 연기를 통해서 그대로 발현되었다. <어떤 하루>, <비스티 보이즈>, <추격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의 모습 모두 인상적이지 않았던 적은 없었고, 훌륭한 캐릭터가 아니었던 적도 없었다.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조화다. 돋보이는 배우는 많다. 하지만 그가 나올 때는 하정우만 보이는 게 아니라 영화가 보인다. 그의 연기에는 배려가 있다. 그래서 그의 캐릭터는 절대적으로 영화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의 연기에는 절제가 있다. <어떤 하루>의 그는‘사람 미치게 하는 자식’이었다. 미워지려고 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려고 하면 사람 열 받게 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캐릭터였다. 그것은 절제가 만들어낸 힘이라고 생각한다. 미세한 힘들을 조절할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하정우는인기가 많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잡지에서‘“흥행을 하려면 20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된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제까지 주위의 20대여성 중 하정우를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다.그래서 하정우가 나오면 왠지 흥행할 것 같다.
– 조성희(<남매의 집>, 미장센 영화제 대상)

황정민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많은 사람이 그러겠지만, 영화나 드라마를보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단역이나 조연 배우들을 보면서 미래를 점쳐보곤한다. 점지한 배우 중 잘된 배우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도 인상적이었던 배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강수 역을 연기했던 황정민이다. 이 영화를통해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처음 인식했다. 그는 사자와 같다. 언뜻 보면 온화하고 게으름을 피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먹이를 포착하고 움직일 때면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개인적으로 낙차가 큰 배우를 좋아한다.낙차가 크다는 건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슴과 같은 연약함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연약함을 바탕에 깔고 있을 때 폭발적인에너지는 배로 느껴질 수 있다. <로드무비>에서 대석 역을 연기하면서 첫 주연작품임에도 단박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가공되지 않은보석 같은 투박함은 폭발적인 에너지에 비하면 문제가 아니었다. 황정민은 그이후 충무로의 핵심 배우가 됐다. 현재도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예전의 투박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황정민의 연기를 다시 보고 싶다. 12월에 개봉하는나의 첫 장편 영화 <사람을 찾습니다> 역시 투박하지만 캐릭터와 이야기에 힘을 가진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 이서(<사람을 찾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JJ-St★r상)

한석규
머릿 속에 자리를 잡고 멈춘 배우는 한석규다. 너무 완벽하지만 절대 재수 없지않은 배우. 실제로 처음 본 건 <텔 미 썸딩> 촬영장이었다. 지금 부인의 소개로미술팀 지원을 나갔었다. NG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다시 테이크를 가는 모습을보고 묘한 존경심이 들었다. 배우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그땐 그랬단 말이다. 카리스마 뒤로 살짝 보이는 편안함, 편안함 뒤에 자리한 카리스마. 무엇이 되었든 옆집 형 혹은 아저씨 같은 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조용하 다가가는 방법과 무슨 말을 해도 믿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 오영두(<이웃집 좀비> 공동연출, 부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이승효
최근 관심을 갖고 보는 건 <선덕여왕>이다. 영화계 불황의 반증인지, 쟁쟁한 영화배우들의 경합이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그중 누가 눈에 띄었을까? 질문을 뒤집어보는 게 더 빠르겠다. 누가 눈에 안 띄었을까? 알천랑 역의 이승효는 이 드라마에서 진정 하나의 풍경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눈에 띈 이유는 그가 신인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이다. TV를 안 보는 동안 빼먹은‘올드페이스’인 줄 알았다. 그는 쟁쟁한 배우들 가운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섞여있었다. 대부분의 신인은 연륜과 경험으로 무장한 선배 앞에서, 액션과 라인을 받아 넘기기에 급급한지라 정말이지 비지땀으로 연기를 한다. 마치 페더러와 맞붙은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가 우왕좌왕 정신을 못 차리듯 말이다.이 비지땀을 최소화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일명‘코드’연기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럴 땐 저런 표정, 저럴 땐 저런 표정이라는 교과서 식 반사 행동으로, 일종의‘감정의 안전 빵’을 찾는 방법이다. 든 것이 없는 비닐봉지가 안에 뭔가 있는 척 어설프게 부풀어 올라, 더 미운 주름들을 표면에 남기는 걸 생각해보라.이승효는 그런 주름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부풀 때도, 줄어들 때도 표면은 매끈했고, 속은 차 있는 듯했다. 신인 배우가 취할 법한 안전 장치들은 그의 모험심 속에서 찌그러져 사라졌다. 결국 그를 올드 페이스로 혼동한 건 TV와 단절하고 있던 내 잘못이 아니다. 신인답지 않은 신인인 이승효의 잘못이다.
– 김곡(<고갈>, 서울독립영화제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