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나이 먹어 좋겠다

2009.11.24이충걸

E.L.
어렸을 때는, 나이 들면 인생의 용적이 어마어마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고(그것으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을 만큼) 자신 밖의 세상과도 친숙하며, 숙련된 지식이 있고, 너무나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돈도 당연히, 엄청 많이 벌 줄 알았다.(하지만, 그렇게 ‘성공’하게 된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이 나를 소유하고 말겠지. 나중엔 잡아 먹고야 말 테지.) 막상 나이 먹고 보니, 한 해를 보탤수록 더욱 추잡한 팔푼이 에일리언이 되어간다는 걸 알았다. 어떤 날은 몽롱하고 아련한 동화 같다가도 바로 그 다음 날 이런 아비규환도 없는 게 세상 사는 게 맞겠지? 인생의 윤곽이 바뀔 일들 대신 일반적이거나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경고 투성이, 짜증 나는 사건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또 다른 사건들, 동시에 여러 개의 일이 겹치는 금치산 달력. 그래도 한 해를 망쳤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시간을 낭비했다는 걸 인정하기가 진짜 괴로워서이다.

시간이 아주 충분했을 땐,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여드름을 걱정하는 동시에 굶는 아이들을 동정할 수 있는 건 젊음의 뚜렷한 특성이니까. 시간이 별로 없다고 느낄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땐 종생토록 시간이 멈추길 치성드려본들 이미 늦었다. 일상에 고속 버튼을 눌러 행동하거나,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들을 미루는 것으로는 시계를 멈출 수 없다. 일곱 겹이나 된 턱 주름사이, 걷힐 줄 모르는 고민의 순간에도 시간은 시속 2천 킬로미터로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시간은 베개 밑에 숨어 있어서 잠잘 때도 시곗바늘은 돌아간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우주 공간을 통하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른다고 했다. 확실히 시간은 축구장에서 공을 차는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상대적으로 흐른다. 연봉이 내 백배도 넘는그 선수가 막내 동생뻘이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간이 쾅 하고 지나가는건 누구라도 가슴 아프게 겪었을 것이다. …시간이 이런 식으로 가 버리는 게 얼마나 웃기는지 모르겠다. 모든 게 하나도 일어난 일 같지않은데, 이렇게 몇 년만 더 있으면 버스를 공짜로 타게 될 거라니.

지금은 1년이 내 인생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지만, 스무 살이었을 때는 5퍼센트였다. 열 살 땐 물경 10퍼센트나 됐다. 이런 시간 개념엔 반박할 수 없다. 지금 내 나이론 무덤으로 향하는 원웨이 로켓을 타고 어른 시절의 4분의 1지점을 지났다. 유년으로부터는 영원히 떠났다. 그때까진 살아계시던 할머니, 중학생 때 내가 공부하던 낮은 책상, 30년 동안 미친 듯 성장한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대한민국은 다시는 볼 수 없다. 수백만 년 후라면 혹시 모를까.

그러나 교체될 수 있는 크립톤의 타임라인이 아직 폭파되지 않았고, 망상의 공간 건너편에서 슈퍼맨만이 어떻게 꿰뚫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결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느 틈에, 어딘가에서, 더 이상 애가 아니라고 신체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코믹한 신호들을 받고, 기억력 퇴보건 탈모건 치매건, 맞서야 하는 질병의 숫자가 매년 늘어난다고 해도.(나이 든 것과 나이 든 것처럼 행동하는 건 다른이야기다. 후자는, 전적으로 한 세대나 더 윗세대 남자의 매너리즘과 삶의 양식을 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지구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50번째 나이를 먹게 되면 강한 누구라도 볼보 트럭에 깔려 납작해져버리고 만다. 프린스도 쉰 살이 넘으면 탈장의 위험을 껴안지 안고선 더는 다리 찢기를 할 수 없고, 마돈나도 페경기에 적합한 염색약을 써야 한다. 그들과 동갑인 마이클 잭슨만이 문워크로 냉장고 앞에 가선, 어떤 알츠하이머 때문에 뭘 꺼내려 했는지를 까먹지 않게 되었지만. 하지만, 다 해어진 끝에서 한 해의 찰나를 들추다 보면 어떤 것들엔 끊기지 않는이음새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을 동정하는 손길로 그 부위를 만져볼 만큼 충분히 나이 든 건 아니지만…. 후회와 타버린 시간 사이의 추상적인 이음새에는 어떤 시간이 존재하는 걸까. 커서, 부모를 떠나 결혼을 한 다음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나이 들어 살짝 넘어지기만 해도환도뼈가 부러지는 숨 막히는 절차가 지난 다음, 마지막엔 뒤를 향해 되돌아오는 시간일까. 사고와 불연속성과 번복될 수 없는 환상 속의시간일까. 숟가락도 들어가지 않는 언 밥을 먹는 듯한 일 년이었다.맘도 춥고 뱃속은 더 시렸다. 올해가 다 지난 게 기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올해가.

    에디터
    이충걸(GQ KOREA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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