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소녀시대의 소비 시대

2009.12.01GQ

아이돌은 한국경제가 낳은 최고의 문화 상품이다. 하지만 아이돌의 경제학엔 내부적인 모순이 있다.

명동 한복판엔 토종브랜드 스파오의 커다란 간판매장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 유니클로와 스페인의 망고 사이에 있다. 연말의 명동은오가는 사람들 천지다. 그들이 명동 상권의 소비자들이고 평범한 대중들이다. 다들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다. 아직 문도 안 연 스파오 매장의 바깥 벽을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소녀시대와 슈퍼쥬니어의 사진이다. 지난 10월 15일 이랜드는 스파오 출시를 알리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이때 사뭇 강조한 게 SM엔터테인먼트와 합작 법인을 설립한단 소식이다.SM의 아이돌들이 단순히 스파오의 모델로만 나서는 게 아니다. 스파오의 명동 매장이 문을 열면 그 안에 소녀시대 매장과 슈퍼주니어 매장도 생긴다. 스파오는 소녀시대로 모든 세대의 소비자들을 휙 끌어 모을 수 있다고 믿는다. 명동 거리에 나가 보면, 아주 틀린 기대도 아니다.

그런데 이번 합작에 열중하긴 스파오만이 아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아이돌의 새로운 수익 창구로 패션을 주목한 지 오래다. 음반 시장은 몰락했다. 음원 다운로드 시장이 살아나고 있다지만 1백만 장이 우습던 시절에 비하면 우습다. 인기는 있는데 환금성이 떨어져버렸다. 연기로 눈을 돌려도 돈 안 되긴 마찬가지다. 자칫하면 <맨땅에 헤딩>에 나온 유노윤호처럼 애국가 시청률에 헤딩하기 십상이다.

대신 SM엔터테인먼트는 아이돌을 소비의 아이콘으로만들기로 작심했다. 소녀시대는 세대와 성별을 초월한다.10대한텐 우상, 20대한텐 연인, 30대한텐 환상, 40대한텐 동생, 50대한텐 딸, 60대한텐 손녀다. 소녀시대의 시장 친화력은 면밀하게 다듬어진 결과다. 소녀시대가 <패밀리가 떴다>에서 시골 할아버지들과 덩실 춤을 춘다거나 윤아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가족 드라마 주인공을 데뷔작으로 선택한 건우연이 아니다. 덕분에 소녀시대는 삼양라면부터 신한은행을 거쳐서 LG 초콜릿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소비재 광고에 다 나설 수 있게 됐다. 스파오도 그중 하나다.

기업들 입장에선 고맙다. 신한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한국은행 CD 금리에 맞춰서 0.2퍼센트 낮아졌다거나,LG 초콜렛폰은 세계 최초로 LED 액정 화면을 사용해서 친환경적이라고 광고하는 것으로는, 대중이 돈을 쓰게 만들기가 어렵다. 여러 소비 계층과 폭넓고 두터운 인연을 맺어놓은 아이콘이 있다면 몇 억쯤 써서 그 이미지를 사주는 게 아깝지가 않다. 말하자면 기업은 상품을 만들고 SM엔터테인먼트는 상품의 얼굴을 만드는 분업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아이돌 산업은 지금 소비 산업과 연예 산업을 연결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아이돌 산업의 성장기가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소비 자본주의가 성장해온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건 필연이다. 소녀시대는 소비시대다.

한국의 아이돌 기업은 첨단 미래 산업이다. 스타와 광고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다. 아이돌이라고 새로울 건 없다.하지만 아이돌 산업과 과거의 스타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예전 스타는 태어났다. 변덕쟁이 대중이 누구한테 순정을 바칠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돌 산업은 연예 산업을 원자재로 확보하고, 제조하고, 조립해서, 판매하는, 제조업에 가깝게 바뀌었다. 바람 부는 날 압구정동에 나가면 웬만한 선남선녀들은 어디 기획사에 소속돼 있곤 한다.

중국이 자국 기업을 돌리느라 전 세계의 석유를 빨아들이고 있듯 연예 기획사들도 장안의 예쁜 애들은 다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을 모아놓고 훈련한다. 필요하면 성형도 한다. 제조 공정이다. 그리곤 무대에 서기 전에 팀으로 조립한다. 그리곤 유통시키다가 유효 기간이 지나면 다음 상품으로 교체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기획사들은 아이돌의 영향력을 이용해 대중이란 시장 자체를 훈육해왔다. <슈퍼스타 K>는 대국민 스타 만들기 오디션이었다. 마지막 결승전의 시청률은 8퍼센트가 넘었다. 우승자인 서인국은 정말 반짝 스타가 됐다. 하지만 서인국과 마지막까지 대결을 펼쳤던 조문근과길학미와 비교할 때 서인국이 지닌 자질은 아이돌의 스타성에 가깝다. 시청자 투표가 절대적이었던 <슈퍼스타 K>의 심사 과정에서 여자인 길학미가 먼저 떨어지고 음악은 잘하지만 덜 섹시한 조문근이 고배를 마신 건 지금 대중이 요구하는 스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좀 더 정확하겐 대중이 스스로 원한다고 믿게 만들어진 스타다.

사실 기업과 기획사의 입장에선 다양한 취향이 공존하는 시장보단 쏠림이 강하고 단순한 시장이 좋다. 덩치가 커진 한국 기업들한테 5천만 명 정도의 한국 내수 시장은 비좁다. 이런 시장마저 사분오열돼 있으면 고속 성장은 불가능하다. 연예 기획사한테도 하나의 우상에 충성을 바치며 잘생기고 매력적인 영웅을 숭배하는 시장이 좋다. 아이돌과 기업의 요구가 일치하면서 10여 년 동안 대중은 어떤 아이돌이 뜨고 그 아이돌이 상징하는 상품을 마구잡이로 소비하는 형태에 길들여져 왔다. 이제 대중은 조문근과 길학미를‘줘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아이돌 산업은 10대들의 불장난처럼 시작됐다. 최초의 아이돌 그룹이라는 H.O.T는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의 약자였다. 하지만 그때 태어난 아이돌들이 대중과 나이를 먹으면서, 이젠 20대와 30대 시장까지 정조준할 수 있게 됐다. 오락 프로그램 <놀러와>는 SES와 GOD 같은 아이돌 그룹들을 불러 앉혀놓고 먼 옛날 얘기나 되듯이 불과 6, 7년 전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치 원로가수가 걸어온 음악 인생을 회상하는 투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세대를 초월해서 이들의 회상에 빠져든다.

아이돌 산업은 아마 지금이 전성기다. 기획사마다 추구하는 바도 다르다. 원더걸스는 애써 미국 시장에 도전했다.원더걸스는 소녀시대가 아니다. 소비시대를 이끌 정교한 조립식이 아니다. 대신 음악으로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샤이니와 2PM도 노는 시장이 다르다. 전통적인 꽃미남 시장과 박진영, 비가 개척한 섹시남 시장이다. 기획사들은 대중을아이돌에 열광하는 덩어리로 만들고, 그 안에서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감지해 거기에 맞는 상품을 제공한다. 기업들이 흔히 시장을 분석하고 공략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완숙기에 접어든 아이돌 산업은 아주 빠르게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우연찮게도 대표적인 3개 기획사가 아이돌 산업의 취약점을 저마다 하나씩 보여줬다. SM과동방신기의 내분은 아이돌 산업의 원자재 확보와 제조 공정의 문제를 드러냈다. 대중 앞에선 거대한 스타여도 사무실안에선 비정규직인 게 아이돌이다. 아이돌은 자기 힘으로스타가 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재에 부가 가치를 부여한 건 기획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자재를 판 쪽에서 너무 헐값에 넘긴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불공정 계약 문제가 불거진다. 지금까지 몇 차례 이런 문제가 있었다.H.O.T.가 해체할 때도 그랬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언제나기획사였다. 아이돌 산업에선 원자재의 가치보다 부가 가치가 더 중요하단 걸 뜻한다.

JYP의 2PM은 아이돌을 제조하고 조립하는 과정의 문제를 드러냈다. 박재범은 한국이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 표현 방식이 저렴하다고 해도 그건 개인의 수준이다. 그런데 박재범이 미국 시민권자인 건 시사적이다. 남자 아이돌의 큰 걸림돌은 군대다. 미국 음악에 대한 흡입력이나 영어 구사력도 해외 진출을 위해선 중대하다. 기업들이 해외 유학파를 뽑는 이유와 똑같다. 한국 대중의 아이돌이 사실 한국 문화에 이질감을 느끼는 10대 청소년이라는 건 역설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돌 제조 공정에선 아주 흔한 일이다.

YG는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지드래곤의 앨범엔 표절로 의심할 만한 곡들이 있다. 지드래곤은 장래가 촉망되는프로듀서감으로 꼽힌다. 아이돌이 음악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음악이 없으면 아이돌도 없다. 춤출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필요한데 충분히 준비할 여력도 생각도 없다면 모사도 방법이 된다. 서태지의 지금에서도 알 수 있듯, 아이돌이 아이돌이 되는 데 필요한건 음악이 아니라 끊임없는 팬들의 환호성이다. 더구나 지드래곤의 표절 논란은 아이돌 기획사가 지닌 대중적 권능을 확인시켜줬다. 팬들은 표절 논란 자체를 못 들은 체했다.

어쩌면 아이돌은 한국 경제가 낳은 최고의 문화 상품이다. 효용 가치가 높다. 소비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한류의 선봉장이자 세대를 통합하는 공통분모다. 음반 판매에 몰두했던 과거의 레코드 회사들이 하나 둘 몰락해갈 때 아이돌 기획사들만 살아남아 천하를 호령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시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돌은 대중문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아이콘이다. 스타라는 인간과 대중의 마음마저 산업화해낸 첨단 경영의 승리다. 하지만 아이돌 산업은 하나 둘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자기모순이 쌓이면 대중과의 소통에서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아이돌 산업이 몰락한다면 그건 외풍 탓이 아니다. 미국 금융 산업이 그랬던 것처럼 자멸이다. 벌써, 빨간 불 몇 개가 들어왔다.

    에디터
    신기주(FORTUNE KOREA 기자)
    포토그래퍼
    김종현
    아트 디자이너
    박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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