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지큐 에디터들을 소개합니다

E.L.

지큐 편집장은 에디터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강지영 지영은 직급으로야 나의 후배지만, 내겐 단연코 속 깊은 여자친구입니다. 늘 연병장에 선 학도호국단 단장 같은 소슬한 기개, 고루 발달한 좌뇌와 우뇌, 시작과 끝의 차가운 국경을 사랑하다가, 문득 면도날 같은 룩과 긴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가 대단한 대칭 미인이란 걸 새삼 느낄 때, 아이라인 하나로 홍채가 그렇게 그윽해질 수 있다는 것에 또 놀랄 때, 코피 터지듯 정강이를 아릿하게 만드는 여자 친구란 말이지요. 대한민국 패션 전반을 덮는 그 존재감은 깃대만큼 드높지만,기실 그녀가 구사하는 문장의 조곤조곤 질깃질깃 함량 높은 맛, 기사 자체의 정밀함, 사회학적 해학을 살펴보면 한 달 동안의 효용성만을 남길 뿐인 잡지의 숙명이 다만 애달플 따름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작가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이미 작가인 것도 모르고….

박정혜 정혜를 볼 때마다 ‘존경’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매순간 그르치는 법이 없는 품위, 만사의 경계를 정확히 긋는 사랑스러움, 산수유 같은 뺨과 분홍 립스틱 같은 잇몸을 볼 땐, 함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감사가 봄날 수증기처럼 피어오릅니다. 진정한 작가가 문장 끝에 구두점을 빼먹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에디터가 무슨 일을 하는 자인지를 늘 생각합니다. 겸손의 문은 빼어난 분별을 향해 고요히 열려 있습니다. 가끔 외국 컬렉션을 참관할 때, 그녀가 중국이나 일본 에디터가 아니라, 연인처럼 내 옆에 서 있다는 실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하지만 그 옆을 빨리 지나가기라도 하면 공중으로 불려갈 듯 깃털 같은 몸이라, 언제나 그 몸과 맘의 안부부터 묻게 됩니다.

박나나 나나는 콧등 위 미인이야, 라면서 나는 그녀를 놀리곤 했습니다. 흑연빛 갈매기 눈썹과 갈잎 같은 눈동자 때문입니다. 그녀가 치아 교정기를 빼자 더 이상 그 말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쁜 부위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와서입니다. 그녀에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조형 나나’. 나나가 만든 비주얼의 색채와 조형은 하나의 미술과 같습니다. 기술이 예술의 경외감을 대신하는 시절에, 에디터는 현세 모든 사조와 문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재해석하고, 급기야 토막을 내 무게를 다는 자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나나가 보여주는 비주얼은, 그녀가 필시 지금 가장 현재적인 작가이자, 현대가 좋아하는 에디터임을 채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나가 발칙하게 제 상사를 보며 아이 어르듯 눈을 한 번 꿈뻑 하면, 하초를 다 보인 양호 선생님 앞에서처럼 왜 그렇게 부끄러워지는 걸까요. 일명 ‘나나 미스터리’ 입니다.

박태일 태일은 과묵합니다. 생각을 묻고 대답을 듣기까지 장구한 세월이 걸립니다. 그래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의 과묵은 인색함이 아니라 다감한 머뭇거림 때문이라서입니다. 그는 여자 에디터가 만연한 잡지 시장에서 남자가 남자 복식을 탐구하는 가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언젠가 라면을 사면서 태일에게 물었습니다. “넌 꿈이 뭐니?” 그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역사적인 에디터가 되는 거요.”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에 빠진 수채화처럼 모든 게 사라져버리는 휘발성 패션 세상에서 역사성을 운위하다니요. 남자 패션 에디터라는 그 유난스럽고도 모호한 지점 위를 그렇게 견고한 확신으로 디딜 수 있다니요. 그 후음성의 깊은 목소리는 패션의 허황한 외곽 대신 시간의 샅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 더 비싼 삼계탕을 사주었습니다.

장우철 우철이 아직 대학생이던 98년,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직접 만든 잡지를 서울 시내 서점에서 팔던 완성된 에디터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대한민국 잡지 역사상 기사와, 사진과, 레이아웃까지 통치할 수 있는 초유의 피처 에디터입니다. 벌꿀 같고 젓갈 같은 문학적 기사, 스프레드 사진으로도 섭섭한 사진의 감도, 촬영 전 스스로 레이아웃하는 구조적 미감은 가히 발군입니다. 앤트워프에서 거제도 미역, 애니멀 콜렉티브에서 정난이까지 관심의 스펙트럼이 하도 천변만화해서, 그 자신, 논산판 브리태니커 사전 같습니다. 악동 같은 편집장이 자주 그를 괴롭히고, 뺏고, 약 올리지만, 그가 그토록 무던하게 견디는 건 긴 세월의 노고와 사랑 때문임을 나는 잘 압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 나누어야 할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정우성 우성처럼 문장과 단락, 구문과 낱말에 집착하는 에디터는 작가적 에디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기사의 한 단어마다 장고 끝의 일수인 셈입니다. 결국 에디터가 현상의 육하원칙을 전하는 건조한 메신저가 아니라, 문장의 스타일리스트가 된 요즘, 그의 존재감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동자승처럼 짧은 머리와 귀여운 두상, 온화한 얼굴과 치아, 서정적인 손끝과 어딘지 코믹한 몸놀림, 보자기 책가방을 메고 둑방길을 달려가는 시골 아이풍 천진한 옷차림 뒤엔, 매초마다 사물을 얇게 저미고 썰고 분류해 색인을 다는 도서관 사서 같은 민감함이 은폐돼 있습니다. 아, 머리를 그렇게 빡빡 밀지 말라고 했는데, 1센티미터도 못 견디고 싹 밀어버리는 반항심도 숨어 있군요. 하지만 그는 너무나 빨리 반성하기 때문에 도저히 오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문성원 성원을 처음 보았을 때, 고랭지 유기농 농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벽별을 보는 근면과, 땅의 소출에 감사하는 밀레식 정직. 그런데 요즘, 축이 아주 단단한 데다, 터가 넓고, 정교하기까지 한 성원의 기사를 보며, 그가 정작 너무나 야심만만한 헥타아르급 농부였음을 알았습니다. 기질로 말하자면, 그를 건축하는 키워드는 구조와 모순, 평화와 은둔, 잠재력과 폭발력, 그리고 그 자신은 생각도 못하는 엉뚱한 유머입니다. 나는 충분한 데시벨로 말하지 않는 그 여린 목소리와 살짝 벌어진 앞니를 좋아합니다. 파티션 위에서 내가 내려다볼 때 눈을 한 번 흘기곤 좌판을 두드리다 깊게 숨을 내쉬는 수줍은 수순을 좋아합니다. 이윽고, 정서적으로든 일 자체로든 과부하되어 그 얼굴이 빨개질 때, 모든 것에 전력투구한 사람의 붉은 열매를 봅니다.

정우영 우영은 문학과 스포츠, 연예와 섹스까지, 어떤 분야건 전천후로 다룰 수 있는 희귀한 에디터입니다. 그가 망라하는 분야마다 하나같이 인문학 깊이가 심화돼 있어, 그 출중한 에디터십 뒤에 얼마나 벼린 각고가 있었는지 천천히 헤아리게 됩니다. 그는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에디터에게 경청은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기술입니다. 누군가 공명하며 귀를 기울여 줄 때 마음이 열리고, 급기야 언어가 열릴 테니까요. 고급한 형광빛깔 옷들과 궁둥이가 꼭 끼게 입는 바지를 보면,하라주쿠에서 놀러 온 앤가 싶다가도, 부드럽고 침중한 목소리와 상대를 헤아리느라 충혈되는 흰자위, 사려 때문에 느려진 걸음을 보면,마지막 세트에, 주포의 어깨가 빠지건 말건 공을 띄워줄 수밖에 없는 세터의 신뢰가 어떤 건지 절로 알고야 마는 것입니다.

손기은 기은은 늘 바른 척추로 앉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품행이 방정한 신입 아나운서 같습니다.(술을 마시면 꼭 그렇진 않습니다. 동여맸던 절제의 올이 풀려 경쾌하게 튀어 오릅니다. 무가당인 줄 알았는데 총천연색 눈깔사탕으로 변하는 건 여자의 권리입니다.) 일상에서의 발성도 아주 정확해서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는 다른 피처 에디터들의 소심한 톤과는 참 다릅니다. 그녀의 관점은 지큐 피처 에디터들 거개가 가진 다소 ‘마이너적’ 이거나 ‘아웃사이더적’ 인 시선과 다른, 지큐 본래의 풍성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핸드크림을 바르는 연근 같은 손가락은, 지큐가 그래야 마땅한 원만하고 풍성한 문화를 연주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기사를 보며 자주 입천장이 드러나도록 웃는 건, 방금 돼지를 도축한 피 묻은 손을 행주로 슥 닦곤 바로 춘향가를 완창할 것 같은 푸줏간 여주인 류의 천연덕스러움 때문입니다.(해운대에서 바늘을 찾아오던 불굴의 기세, 병아리같이 작은 몸에 완전한 수치로 나뉘어져 있던 비율, 우리가 속한 은하수 끝에서 끝을 횡단하던 성단 최고의 스케일, 최자영도 생각납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잠깐 멈춰 서서 안부를 전합니다.)

에디터와 편집장의 일생은, 편집실이라는 한 공간, 한 달이라는 시간의 질서 안에서 보내는 팀 스포츠와 같습니다. 매달, 가족보다 잦은 대면, 친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성스런 존귀와 망할 누추, 습한 즐거움과 욕창 같은 불쾌, 복잡한 배려와 즉물적인 고려, 옅은 표면과 얕은 진실을 나눕니다. 그러나 훌륭한 교사는 자비로운 불의의 교훈일텐데, 편집장은 흠 투성이 인간입니다. 에디터들 또한 예순에 본 아들처럼 어여쁘다가도, 외손녀 기르는 것처럼 나를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도 편집장은, 책 만드는 일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아,라고 광야에서 가죽 옷을 입고 메뚜기를 씹으며 시끄럽게 외칩니다. 지큐 에디터들은 정독 도서관의 새벽 다섯 시처럼 조용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편집장이 뒤로 자빠질 만큼 자질이 뛰어난 청년들이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 쓰는 한국인들에겐 고개를 외로 저을 양주동 사전이며, 범절 밝은 어른들이 보기엔 그 자체로 동몽선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기치 아래 존중과 존경을 나눈다고 해도,그들 역시 날숨처럼 내 인생에서 빠져나가리라는 걸 아주 잘 압니다.잡지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수장시킨 채 젊음을 풀가동한다고 해도, 서로가 떠받드는 제단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순간이 오겠지요. 올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하는 동안만큼은 정금 같은 가치를 교환하고 있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달, 독자인 당신에게 지큐 에디터들을 소개합니다.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난 적은 없다 해도, 삼가 매달 당신의 공덕을 입어왔음을 감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들 또한, 대신할 수 없는 당신의 종이와 연필 친구들임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지큐 에디터들 사이, 그 친화한 확보 의식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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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편집장]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음. 잡지를 통해 문화와 스타일을 다루어온 그 시간 동안, 정작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허무하게 깨닫게 됨. 그래도 잡지 만드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해보지 않은 ‘여타의 것’들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