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누구를 위한 알 권리인가

2010.01.21GQ

‘알 권리’ 라는 말은 주로 언론이 보도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자주 등장한다. 누가 그들에게 국민의 권리를 대신하라 했는가.

스포츠서울엔 특별취재팀이란 게 있다. 연예인 매니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거래가 불가능해서다. 스캔들거리가 있으면 언론사와 매니저들은 싫든 좋든 한번쯤은 담판을 벌이게 된다. <스포츠서울> 특별취재팀은 곧장 쓴다. 새해 벽두를 소란스럽게 만든 김혜수와 유해진 열애 보도를 맨 먼저 터뜨린 것도 <스포츠서울>이었다. 보도가 나가던 1월 1일 <스포츠서울>의 뉴스부장은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스포츠서울닷컴> 취재팀은 2009년 말, 한 달 넘게 김혜수- 유해진 커플의 조심스러운 사랑을 지켜봤다. 우리는 연예 매체 중 유일하게 증거가 없는 추측 보도나 이니셜 보도를 지양해왔다.” 이렇게도 썼다. “스타의 사생활 보호부터 시작해 파파라치라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독자의 알 권리를 빌미 삼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일을 모두 보도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싶다.”

글쎄, ‘지켜봤다’와 ‘훔쳐봤다’ 사이에 어떤 기술적 차이는 없을 것이다. 훔쳐보면 ‘파파라치’고, 지켜보면 매체의 본분에 충실했다는 뜻일까? 파파라치는 개인이다. 이번 취재는 언론사가 조직적으로 파파라치 취재를 기획, 진행한 경우다.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일을 모두 보도하진 않았다고 했다. 이건 으름장이다. 안썼다고 그만도 아니다. 취재에 참여한 사진 기자들은 보도는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알아버렸다. 그들한텐 알 권리가 없다. <스포츠서울>은 독자의 알 권리를 내세웠다. 독자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어 하니까 언론으로서 취재할 의무가 있다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다. 명분은, 또다시 국민의 알 권리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엔 이런 내용이 있다. “기자는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가진 언론의 최일선 핵심 존재다.” 기자수첩에도 쓰여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기자의 취재 행위에 합법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논리다. 기자와 언론사는 개인이나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건을 파헤치는 게 아니다. 국민은 어떤 사항에 대해 알아야 할 마땅한 권리가 있다. 그런데 국민은 생업에 바쁘다. 대신 알아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언론이고 기자다.

하지만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권리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21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있다. 21조 2항에선 언론과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21조를 해석한 결과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호하는 이유는 언론사와 출판사가 장사할 권리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언론과 출판은 국민한테 정보를 전한다.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곧 힘이다. 모르면 모르고 당한다. 알면 아는 만큼 얻는다. 여기서국민의 알 권리가 등장한다. 알 권리는 처음엔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시민 참여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무게감이 더해진 인간의 기본권이다.

이렇게 중요한 알 권리가 헌법에 글자로 박혀 있지 않은덴 이유가 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범주를 정하는 게 불가능해서다. 법은 되도록 해석을 거부해야 한다. 헌법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알 권리를 명문화하면 오히려 해석의 혼란이 생길 수 있다. 대통령의 오후 일정은 경호 기밀이다. 국민이 알 권리를 내세워 알려달라고 떼를 쓰면 분쟁이 생긴다. 대통령 일정을 알려달라고 헌법 소원을 낼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알 권리를 법으로 정하는 대신 언론과 출판의 법 해석을 맡겨놓았다. 언론과 출판 기관의 자유로운 취재를 허용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옹호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말이 언론사가 내키는 대로 들춰내고 찍어대고 써버리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다. 언론사의 진가는 사실 보도가 아니라 가치 보도에서 나온다. 국민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보도 목적이 정의로운가,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진 않은가, 라는 가치 척도에 맞춰서 취재 대상을 정하고 보도 여부를 결정하는 게 언론의 진짜 역할이란 말이다. 특종 보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문제 삼을지를 고민하는 게 먼저란 뜻이다.

대한민국 언론이 이 역할을 안 하고 있어서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어서다. 지금 언론 보도로 일어나는 수많은 평지풍파는 언론이 권리만 주장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사실 보도만 하면 그만이 아니다. 왜 보도해야 하는지를 세상이 납득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언론은 중립적 가치 판단 기관일 수 없다. 언론은 기업이다. 헌법적 권리를 대변하는 기업은 언론이 유일하다. 그래서 언론사는 종종 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어서다. 국민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보단 무엇을 알리는 게 언론 기업의 이익에 적합한지가 판단 근거가 되기 일쑤다. 알아야 마땅한 사실이지만 언론의 이익과 어긋나면 말하지 않는다. 알리는 일 자체가 개인의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데도 언론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면 보도해버린다. 이 때 국민의 알 권리는 방어논리로 전락한다.

장자연 사건이 불거졌을 때다.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이름들을 언론이 공개해도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어느 언론도 이름을 제대로 공개하지 못했다. 그때 시민사회에선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리스트의 이름들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9년 4월 14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고려대학교 법대 박경신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 ‘홍길동은 성 상납을 받은 바가 있다’ 라고 말할 때는 실명을 쓸 수 없고 ‘홍길동은 좋은 회사의 CEO다’ 라고 말할 때는 실명을 쓸 수 있다는 원리는 어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원리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권력 기관으로서 언론은 다른 권력 기관과 보조를 맞춘다. 국민의 알 권리를 옹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국민에게 알려질 내용을 특정 이익 집단의 입맛에 맞게 선별하는 또 다른 이익 집단이 된다. 그래서 오히려 언론의 힘이 커질수록 국민한테 전해지는 정보의 양과 질은 적어지고 나빠진다.

이건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대리인의 문제다. 국민한테 알 권리가 있는 건 분명한데 국민이 직접 행사하긴 어렵다.언론이 권리 행사의 대리인이 된다. 대리인은 양도된 권리를 남용하기 쉽다. 책임은 없고 권리만 있어서다. 지금 한국 언론의 모습이다. 요즘 기업들은 접견실을 1층 복도에 따로만들어놓고 외부인의 사무실 출입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다. 산업 스파이 때문이 아니다. 기자들 때문이다. 기자들이 CEO 인터뷰를 요구하면서 사장실에 불쑥 들어오거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지만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사무실 책상에서 슬쩍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내세우는게 국민의 알 권리다. 반대로 국가적 안녕을 명분 삼아 국민의 알 권리를 언론 스스로 무시해버릴 때도 있다. X파일 사건이나 북핵 송금 문제, 대선 자금 문제나 황우석 사건, 광우병 사건 같은 큰 사건이 있으면 언론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대리인이 권리를 가진 국민의 동의도 없이 권리를 포기해버린 꼴이다. 더 나쁜 경우는 언론사가 알 권리를 무기로 개인을 괴롭히는 경우다. 연예인들이 주요 사냥감이지만 일반시민도 자유롭지 못하다. 특종 경쟁이라도 붙으면 보도에 사정조차 두지 않는다.

사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것도 별반 신성한 게 아니다. 모두가 모든 걸 다 알아야 권리가 보장되는 건 아니란 얘기다. 서울 어느 곳이 재개발되는데 언론이 먼저 재개발 사실을 보도해버리면 보나마나 땅 투기가 일어난다. 국민이 알아서 문제가 되는 경우다. 어느 기업이 비밀 신기술을 개발했는데 신기술이 적용된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신기술의 내용을 언론이 보도해버리면 기업은 연구개발비를 날릴 수도 있다. 광화문광장에서 핵폭탄을 터뜨리려는 테러리스트를 ‘NSS’가 포위했는데 언론이 보도해버리면 시민은 공포에 질리고 테러리스트들은 도망갈 수 있다. 알 권리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알 권리의 한계를 가늠하라고 권리를 언론한테 맡겼더니 대리인들이 남의 권리를 부도수표처럼 남발하는 꼴이다.

대한민국은 1990년대가 돼서야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국가다. 민주화의 토대가 되는 언론과 출판과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성취된 것도 2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이전엔 국민의 알 권리는 논쟁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알릴 의무와 알 권리의 경계가 아직 모호하다. 이제 그 권리의 남용을 얘기할 때가 됐다. 21세기 자본시장에서 언론은 더 이상 헌법적 공익 기관이 아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언론 기업이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스스로를 국민의 대변인이면서 권력 감시의 투사로 묘사한다. 기자의 진실이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듯 포장한다. 국민가운데 누구도 언론한테 김혜수와 유해진의 밀회 현장을 훔쳐봐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알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언론도 안다. 알면서도 모른 체할 뿐이다.

글 / 신기주(FORTUNE KOREA 기자)

    에디터
    신기주(FORTUNE KOREA 기자)
    포토그래퍼
    김종현
    아트 디자이너
    박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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