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마음이 어리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2010.01.21이충걸

E.L.

평생 ‘독특하다’ ‘어려 보인다’ , 두 마디만 듣고 산 것 같다.(지겨워, 꿈도 악몽도 꿀 수 없는 말···.) 내 대답은 이렇다.

내가 독특하다 못해 기괴하다 한들 누구보다 도덕적이다. 어려 ‘보인다’ 는 건 어리다는 것과 같니? (그래서 관계를 맺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윽고 ‘어리게 입는다’ 는 말이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젊어 보이려고 필사적일 때 더 나이 들어 뵈는 거 아냐···? 사람들은 타인의 몸, 직업, 사회가 자기를 봐주길 원하는 모습으로 옷을 입는다. 나도 누군가 날 믿을 수 있고, 원래보다 날씬해 보이도록 꽉 죄는 옷을 자주 입는다. 그때 비어져 나온 살이 차에 치어 죽은 짐승 같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렇다고 워싱 들어간 찢어진 청바지나, 인식표를 단 가죽 보머 재킷을 입으면 안 되나? 물론 나이 든 로커는 싫다. 난 스키니 진 못 입는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입는 미소니 스웨터를 입으란 말이야? 하긴, 서른여덟 살 남자가 후드 티에 배트맨 티셔츠를 입고 활보하는 건, 짧은 톱에 데님 미니스커트, 어그 부츠까지 제 딸애 옷을 몽땅 뺏어 입은 마흔일곱 살 엄마와 같을 테다. ‘중년 남자의 위기’는 펑크를 자기 걸로 알고 있으나 벌써 쉰셋을 넘긴 남자나, 귀고리를 중화시키진 못하는 청바지 차림의 예순 살 남자를 타고 넘을 순 없다. 그럼, 정확한 터닝 포인트는 언제지? 언제 이십 대의 옷차림을 벗어 던지고 나이에 맞게 입어야 하지? 아, 시간의 비율이야말로 남자들에겐 늘 결정적이다.

부조리한 의식의 반복을 넘어 아무리 세월을 보내도 원하는 걸 못 얻을 때, 나이는 더 이상 성인이 되는 굉장한 단계가 아니다. 공허라는 절벽에서 붙잡을 수 있는 나뭇가지도 아니다. 나이가, 인생의 강에서 치는 발헤엄 정도이며, 물살 따라 행복하게 흘러가면 된다 해도, 거기서 더 나이 들면 그 본성은 온전히 용두사미가 된다. 퇴락하는 나이는 현재를 되새기게 하는 사악한 이유라서. 그래서, 쉰 살 먹은 한 남자는, 백화점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곤 잠시 멈춘다. ‘아버지가 지금 여기 왜 서 계신 거지?’ 그리곤 방법을 찾는다. 더 나이 들 수 없어서. 남자로 태어난 이상, 걷는 것부터 시작해 평균대처럼 균형 잡고 서는 것, 철도 끝 도랑에서 가재 잡는 것, 모든 걸 경쟁해 왔건만, 어느 지점부턴 노화를 늦추는 경쟁이 새로 불붙는다. 남자의 관성이나 초연함을 수긍하는 것관 상관없다. 이 시합의 본질은 위험으로부터 시발된 거라 규칙이나 지시는 없다. 이윽고 밀려오는 세월을 꽉 쥐기 위한 과감한 걸음과 처량한 전략 끝에 나이를 속인다. 나이가 죄인 시대의 나이 든 여자에게, 처녀처럼 보이고 싶다면 처녀와 같은 나이여야 한다는 발상은 불가피하다. 그래도 주름 제거 수술에 속긴 힘들다. 가끔,의사 손으로 뺨을 잡아당겨 귀 뒤에 붙박아두는 수술을 받은 여자들은 남편 불알을 물어뜯어 볼 속에 감춘 다람쥐 같다. 그렇게 공제된 몇 년으로 얼마나 속일 수 있을까. 사십대 중반이 확연한 여자가 “몇살로 보여요?” 라고 물을 때마다 측은하다 못해 죽여버리고 싶은데.

나이 먹는 것을 막고 싶다면 규율을 따라야 한다.(그래픽 티셔츠와 컨버스화의 풍부함을 껌 씹듯 다룰 수 있다면 상관없다.) 암튼 이 문제에 대한 번뜩이면서도 단순한 해결책은 나이를 높여 말하는 것이다. 원래 나이보다 다섯 살쯤 높여 말하면, 다들 나이에 비해 아주 젊다고 생각할 것이다. 숫자상의 나이와 실제 나이의 격차가 클수록 불멸의 연인이 된다. 손대면 불사의 묘약이 스며들 것 같은. 올해 마흔살이 됐다면 내년에 얼른 마흔다섯 살이 되고, 생일엔 춤으로 밤을 꼴딱 지새워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거야. 중년이란 나이는 희미해질 테고, 앞엔 점점 더 더러워지는 노인의 수십 년 세월만 남겠지. 요점은 단순하고 확고하다. 자기 기만은 아무도 유혹할 수도 속일 수도 없다.

···나도 이 나이까지 반사회적이고 경솔하며 아주 개인적인 판테온에서 살았다. 비밀스럽지만 쓰레기 같은 모토로 짜인 미숙한 삶은 특정 기억과 암기로 구성돼 있고, 삶의 방식이란 60년대 유행가나, 파커의 후기 재즈같이 ‘내가 아는 분야’ 일 뿐이다. 후기 현대사회의 도덕적 구조 같은 건 모른다. 그냥, 머리통 속 플랑크톤의 양상이다. 그래서, 나의 진정한 결핍은 어른으로서의 연습이란 걸 생각한다. 인생이 그토록 약하고 어느 정도 유한한지 아는 어른. 인간의 야심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아는 어른. 전 우주적인 그 상황을, 실은 모든 이가 공유한다는 걸 알면 참 편안해질 것 같다. 그땐 어려 보이는 게 무슨 상관일까. 백만 년 뒤엔 마흔이건 쉰이건 죄다 꼬마들일 텐데.

    에디터
    이충걸(GQ KOREA 편집장)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