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ing

나쁜 여자

2010.03.02유지성

여자는 스스럼없이 ‘다른 남자와 잤다’ 고 말했다. 그래도 여자가 싫지 않았다.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듯이.

우리는 길에서 만났다. 나는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1미터쯤 뒤에서 누군가 반투명 검정 스타킹에 뒤축이 새빨간 하이힐을 신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목이 뻐근한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원위치로 돌아왔다. 오후 3시를 닮은 입술, 하늘을 향해 치켜진 속눈썹은 그저 무표정만으로도 섹스를 자아냈다. 고급함과 저열함이 돌김 한 장 차이라면, 그 섹스는 고급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흐를 때, 내 추레한 옷차림이 마음에 걸렸다. 거뭇한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헌팅캡을 눌러쓴 채였다. 그냥 길을 건너기로 했다. ‘반투명 스타킹보다는 불투명 스타킹이 더 좋아.’ 궁색한 자기위안.

“저기요.”
차들이 멈춰설 즈음,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불 좀 빌려주세요.”
뻔한 “불 있으세요?” 도 아니었다. 움츠러드는 “불 좀…” 도 아니었다. 왠지 당당한 표정. 어딘가 품위 있는 자신감. A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빠는 어디를 빨아주는 게 좋아?”
“응?”
달콤한 회상은 조악한 질문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내 어깨 아래에 B의 갈빗대 사이로 삐져나온 겨드랑이 털이 보였다. 그녀와는 두어 달 전쯤 클럽에서 만나 종종 섹스를 하는 사이였다. “커피 한잔 할까?” 가 “섹스하자” 와 동의어가 된 그런 사이. B와는 꽤 오랜만이었다. 사실 A와 연애를 하는 동안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연애를 한 건 아니었다. ‘도덕적’ 이고 ‘애정 어린’ , 익숙지 않은 관계였지만 남들처럼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섹스를 했다. 연인은 아니었다. 어쨌든 주구장창 섹스 ‘만’ 하지 않는 관계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만날 정신도 겨를도 없이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지금 나는 다른 여자와 몸을 포개고 있다.

“몸에 털이 많구나?”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한겨울에 남자친구도 없는데 제모까지 해서 뭐하게. 오빠랑 안 한 지도 오래됐고.”
B가 뾰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음 상하진 않은 듯했다.
“넌 어디 빨아주는 게 좋은데?”
“등이랑 쇄골.”

조악한 질문에는 똑같이 조악하게 응수하면 그만이었다. 때때로 잠자리에서의 대화는 소마큐브를 푸는 것만큼 고뇌스럽다. 말 한 마디에 배꼽에서 끊길 여자의 혀끝이 대퇴부 사이까지 내려가기도 하니까. 식스팩이나 C컵 가슴이 해낼 수 없는 일을 ‘세치 혀’ 는 해낼 수 있었다. (혀는 참 많은 일을 한다!) 야동에서조차 ‘대화’ 를 강조하는 시대, 실전에서의 고민 없는 이야기는 죄였다. 끈적한 단어들이 침대 위를 나뒹구는 것도 싫지 않았지만, 나는 오가는 이야기 속의 숨겨진 교감이 더 좋았다. ‘문학적 섹스’ 따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 말이나 주고받기는 싫었다. 어찌 보면 배려 같기도 했다. 잘 맞는다는 것이 단지 두께와 너비의 문제는 아니었다. 넣어달라거나 빨아달라는 적나라함이 때로는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기도 했다. 내게는 세심하고 밀착된 섹스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말없이 허리를 감아 생선 뒤집듯 B를 반대로 눕혔다. 척추의 능선을 따라 혀를 감아 내려갔다.
“아….”
호흡에 맞춰 허리가 들썩였다. 그때 다시 A를 떠올렸다. A의 뒷모습은 우량 품종의 조랑말 같았다. 작고 단단한 체구, 적당히 그을린 피부, 조밀한 근육, 복숭아 모양의 올라붙은 엉덩이…. 사랑할 만했다. 멈췄던 혀를 서둘러 핥아 내려 B의 엉덩이 굴곡 아래로 빠뜨리는 동안, 나는 ‘그날’ 을 떠올렸다.

“손톱 좀 잘라. 따가워.”
메조키스트인 A의 엉덩이는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내가 때렸다. 등에는 한두 개의 상처가 나 있었다. 내가 긁었다.
“나 어제 다른 남자랑 잤어.”

만족스러운 섹스를 마친 뒤였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던 와중에 A가 말했다. 아무 망설임도 감정의 소모도 없는 듯했다. 어젯밤 뉴스에서 들은 남 일 전하듯, ‘털어놓다’ 보다는 ‘이야기했다’ 에 가까웠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A는 말을 이어갔다.

“2차를 갔는데… 치익…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 치익….”
‘사실’ 보다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아찔했다. 고막이 얼얼했다. 맹랑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안 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녀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런 당돌함이 처음은 아니었다. A는 거리낌 없이 지나간 남자와의 섹스를 이야기하곤 했다. “콘돔은 딸기 맛!” 이라고 발칙하게 외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은 별개’ 라는 말은 신념에 가까웠다. 언젠가‘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유혹당한 것은 나였다. 애널섹스와 전혜린을 번갈아 내뱉는 롤러코스터 같은 언어, 음탕함과 무구함을 오르내리는 신묘한 얼굴에 나는 위태와 경계 속에서도 쉽게 무장 해제되었다. 이날도 그랬다. 충격이 가시자 별안간 몸이 뜨거워졌다.

“한 번 더 하자.”
미워서도, 섭섭해서도,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경험하지 못했던 야릇한 자극이 밀려왔다. 상의도 벗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입 속에 내 성기를 밀어넣었다. 페니스는 최고로 딱딱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잤던 남자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섹스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어제 너와 잤던 여자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물론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더 짜릿하다. 너와 나는 평등하다. 아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물론, 내가 조금 더 잘할지도 모르겠다.

‘웃음이 났다. ‘그날’ 의 상상 속에서는 스리섬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자가 둘인 게 더 좋지만, 가학적인 섹스를 즐기기에는 남자가 둘인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럼 여자 쪽에는 평등한 게 아닌가? 며칠 전 받은 싸구려 성인방송이 생각났다.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였다.

B와의 섹스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녀가 펠라치오를 해주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크리넥스를 몇 장 건네주고 담배를 물었다.
“오랜만이다?”
B가 핀잔 투로 말을 꺼냈다. 아니, 물었다. 여자들은 왜 꼭 끝나고 나면 이유를 찾을까. 딱히 까닭이 없으니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은데, 오늘은 예외였다. ‘한 여자와 다섯 번 이상 자지 않는다’ 는 철칙까지 어기고 B를 만난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누구한테 미안할 일 좀 만들고 싶었어.”
“무슨 말이야?”
B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되물었다.
“A 알지? 그때 얘기했던.”
“응. 나랑 잔 거 보니까 아직 사귀진 않는 것 같은데?”
쫑긋 귀를 세운 모양새가 남의 연애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필부임에 틀림없었다.
“A가 다른 남자랑 잤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B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지금 유치하게 보복이라도 하는 거야?”

베게라도 집어 던질 기세였다. 그녀의 분노는 자신의 딱한 처지가 아닌, 못난 남성성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보통 그런 식이었다. 여자들에게는 ‘멋진 남자’ 와 하는 게 중요했다. 좋고 나쁜 것은 남자를 평가하는 데 그리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여자의 과오에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는 남자는 ‘멋진’ 섹스 파트너가 아니었다. ‘나쁜 놈’ 이라도 ‘멋진 녀석’ 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만날 설명하는 생물학적 근거가 다 그런 얘기였다. 그녀는“너 지금 나 갖고 논 거야?” 가 아닌, “너 그거밖에 안 되는 놈 이었어?” 라는 투로 힐난하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야.”

마음에도 없는 변명이었다. 그저, 얼른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B를 만나지 않을 테고, 내 목적은 이미 채워진 뒤였다. 창밖이 어둑해졌다. 종로 모텔촌에 서서히 붉은빛이 돌았다. B는 이미 떠난 후였다. 침대에 기대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7시에 보는 거지?”
“응, 얼른 밥 먹자. 배고파.”
저녁에는 A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좀 이따 봐.”
“밖이 추워 옷 잘 챙겨 입고 나와.”

그녀도 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B와 섹스를 한 이유는 간단하다 못해 단순했다. A를 향한 죄책감이 필요했다. 고대 바빌론식 복수는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애정 쪽에 더 가까웠다. A의 고백, 아니 진술에 대해서는 이미 그날 밤의 릴레이 섹스로 대답을 건넨 후였다. 나쁜 여자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기적인 남자가 되는 것이었다. 알량한 죄책감을 만듦으로써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더 애틋하고 충실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히도 이기심과 애정의 함수 그래프는 전형적인 우상향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조금 비정할 뿐 어렵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어쩌면 조금 이따 이 방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