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나, 축구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2010.06.22이충걸

E.L.

몇십 년에 걸쳐 공을 찼다. 열두 살 땐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찼고, 스물두 살 땐 미군 막사 사이 좁은 공터에서 찼고, 서른두 살 땐 회사 야유회에 가서 찼다. 나름 잘 찼다. 골도 넣었다. 그 후론 축구 멍청이가 되었다.
나라 전체가 웅장함과 망상 사이에서 함성을 지르는 거대한 스포츠 바가 되고 나니, 위조된 초대장을 지참할 수도 과도한 감격을 동봉할 수도 없다. 조국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노골적인 설명이 국가國哥와 국기 속에서 펄럭이면, 머리가 편두족처럼 납작하게 짓눌려버린다.

축구는 분명 자유 체제와 사회 체제가 혼합된 들끓는 기호다. 그런데 목이 찢어져 죽을 만큼 대한민국과 박지성을 연호하는 게, 가장 구식처럼 보이면서도 또 진짜 현대적인 행동양식 같은 건….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처럼, 월드컵 4강에 드는 건 절망스럽도록 엄밀치 못한 과학이다. 하지만 축구에 필연적으로 만연하는 전쟁의 특징은 월드컵 때 합법적 지위를 갖는다. 세상이, 운동 선수들이 피 흘리는 보병대 역할을 하는 격전장이 될 때, 축구는 완전히 도덕을 뛰어넘는다. 상대팀이 이 편 정강이를 걷어차 들것에 실려 나가자마자 골을 먹거나, 골키퍼와 단둘만 남은 단독 찬스에서 득점 기회를 날려버린 경우라면, 그런 특성은 더더구나 쭉 유지된다.

한편, 요즘의 어지럽고 잡다한 문화 속에선 축구만이 국가 정체성의 심오한 무엇을 말한다. 오직 축구만이 정치적 정확함의 범주 내에서 나라별 선입견에 대한 논쟁을 허한다. 국가대표팀을 자국 단결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국가적 게임은 국가적 특성을 반영하므로. 그런데, 국민이 마땅히 존중할 만한 정부를 가져야 하듯이, 시민 역시 마땅히 자랑할 만한 스포츠를 가져야겠지만… , 한국 축구야말로 근대사의 불가사의 같았다.

어떻게 10점짜리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꽂거나,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토루프를 한 번에 뛰는 정금 같은 재능이 없는데도, 누가 센터포드로 선발됐는지, 또 누가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는지 하나같이 궁금해할 수 있을까? 골결정력 부족에 대한 같은 지적을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지구력 있게 들을 수 있는 걸까? 경기에 지고 또 져도 원통한 마음을 견디며 다음을 기다리는 국민 한 사람마다의 자조하는 저 미소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영화나 돈, 인맥이나 스포츠처럼 삶의 이것저것들이 이루어낸 성취물을 통해 힘을 얻는다. 즐겁게 만들어주는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과 잘 지내는 게 옳다. 그런데, 올림픽은 분명 어떤 신체추구권을 습득한 누군가를 경외심으로 쳐다보는 것 같은데, 월드컵은 똑같이 세계 스포츠라는 향해의 출범이되 뭔가 구성분자가 달랐다. 한 민족의 평생을 들었다 놓는 호화 텔레비전 쇼이자, 광장이나 판잣집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의 춤 같았다. 현대의 축구 게임은 전적으로 기업의 스폰서십, 에이전트, 국민적 기대 또는 비난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엄청난 대륙 간 이동, 팀과 선수간의 상업적 역학, 지구인 전체가 관객이라는 무량한 티켓, 20대 초반 신흥 스포츠 부자들의 난립, 월드컵 성적만으로 그동안의 명성이 전혀 상관없게 흥하고 쇠하는 감독들…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스포츠라는 여흥의 단순한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관중 한 사람이 내뱉는 탄식이 5백 명 오페라 관객들의 탄성보다 크게 들리는 건 무엇 떄문일까. 부유한 도심이 아닌 빈곤한 외곽성, 개인적 야심이 아닌 공공의 가치, 닦인 장래가 아닌 움츠리지 않는 정직성, 불필요한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말하려는 열망, 승부의 측면을 넘어 휴머니즘 호소에 이르는 여정이야말로 축구의 순수인 것이다.

그렇지만, 축구에 관한 나의 생각은 그냥 단순하다. 어떤 단어들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즐겁고, 어떤 이름은 흥분한 상태에서 크게 소리치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뿐이다. 리즈 유나이티드의 루치아노 베치오와 아스톤 빌라의 파비안 델프의 이름에 흐르는 시 같은 감미로움, 성대를 건드리면서 입천장에 혀를 굴릴 때 참 기분 좋아지는 이탈리아의 알렉산드로 알토벨리, 어감만으로 괜히 축구를 잘할 것 같은 핀란드의 유시 야스켈라이넨이나 세르비아의 셰프키 쿠키…. 브라질의 이고르 드 카마르고의 이름을 명료하게 발음할 땐 옛날, 소련의 기계체조 선수 옥사나 오멜리안칙처럼, 요리인지 약품인지 섹스인지 알 수 없는 뉘앙스가 풍긴다.

축구는 분명 모두가 하나이며, 하나가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덩치 큰 존재가 된다는 걸 힘 있게 각인시킨다. 물론 세상엔, 오묘한 학술적 분석을 할 정도의 자칭 전문가도 있고, 4강의 징조를 포착해내는 것만으로도 황홀경에 빠지는 타칭 오다쿠도 있다. 반면, 돼지 오줌보로 처음 공을 차본 빈민촌 어린애도 있고, 축구엔 먼지만큼의 관심도 없이 카카가 기지촌 고양이 이름인 줄로만 아는 채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할머니도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다 모여서 이런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SIGNATURE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