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SBS의 승부차기

2010.07.21GQ

남아공 월드컵 독점 중계는 SBS의 무리수였지만, 생존을 위한 승부수이기도 했다.

2006년 5월 30일이었다. SBS의 안국정 사장은 KBS의 정연주 사장, MBC의 최문순 사장과 함께 스포츠 합동방송 합의사항이란 문서에 날인을 했다. 2010년, 2014년 월드컵과 2010, 2012, 2014, 2016년 동계와 하계 올림픽 중계권 협상을 한국방송협회한테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합의문서 3항에 보면 “KBS, MBC, SBS는 방송권과 관련한 어떤 개별 접촉도 하지 않기로 함”이라고 쓰여 있다. 한달 뒤였다. SBS는 MBC와 KBS 몰래 월드컵과 올림픽 독점중계권을 사들였다. 월드컵은 1억 4천만 달러를 줬다. 올림픽은 7,250만 달러를 줬다. 문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이었다. 애초부터 SBS는 스포츠 합동방송 합의사항이란 걸 지킬 뜻이 없었단 얘기다. 그땐 여의도가 소란스러웠다. 이내 잊혀졌다. 안국정 사장은 물러났다. 정연주 사장은 쫓겨났다. 최문순 사장은 국회의원이 됐다. 합의서에 날인한 당사자가 현직에 없는 진실 공방은 김 빠진 맥주였다.

4년이 지난 지금 SBS의 월드컵과 올림픽 독점 중계권은 방송가의 뜨거운 감자다. 동계 올림픽의 여왕은 김연아였다. 숨겨진 금메달리스트는 독야청청 중계했던 SBS였다. 월드컵 내기의 승자는 팔 여덟 개 달린 문어 파울이었을지 모른다. 월드컵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역시 중계방송을 독점했던 SBS였다. SBS는 월드컵을 홀로 중계 방송한 덕분에 1천억원의 광고 수익을 독식했다. FIFA에 준 돈엔 못 미친다. 하지만 더 큰걸 얻었다. SBS는 월드컵 중계로 마침내 ‘3등’ 방송사에서 벗어났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SBS는 만년 넘버 쓰리였다. SBS는 KBS, MBC와 함께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공동 중계했다. SBS는 KBS와 MBC와 똑같은 돈을 나눠 내고 중계권을 사왔다. 결과적으론 SBS만 손해였다. 한국 대표팀의 첫 번째 경기였던 토고전 중계방송에서 MBC의 시청률은 30.9퍼센트였다. SBS는 절반 밖에 안 되는 15.9퍼센트였다. 두 번째 프랑스전에선 MBC는 30.4퍼센트였지만 SBS는 3분의 1 수준인 10.9퍼센트였다. 같은 돈을 내고 중계권을 사오면 방송 3사 가운데 SBS가 밑지는 구조였단 뜻이다. 이번에 그걸 깼다.

월드컵에선 스페인이 우승했다. 월드컵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SBS한테 35억 원 정도의 과징금을 물릴 참이다. 한국방송협회가 중재한 합의를 깬 대가다. KBS와 MBC는 같은 이유로 SBS를 고소했다. SBS와 KBS는 아예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KBS가 예능 프로그램인 <남자의 자격>에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경기 장면을 조금 썼단 게 이유다. SBS는 FIFA 규정까지 들어가면서 KBS의 정중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KBS는 짧게 쓴 것 갖고 SBS가 야박하게 군다면서 일단 전파를 탔는데 뭘 더 어쩌겠냐는 태도다. 이 정도는 감정싸움에 불과하다.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다. 축구 중계권 정도를 놓고 벌이는 실랑이가 아니다. 방송사의 생사가 달린 싸움이다. 월드컵을 독점 중계한 덕분에 SBS는 새삼스럽게 샅샅이 해부당하고 있다. SBS의 주인은 SBS 미디어홀딩스란 회사다. SBS 미디어홀딩스의 주인은 태영건설이다. 태영건설이 SBS 미디어홀딩스를 통해 방송사인 SBS를 지배하는 구조다. 1991년 태영건설이 정부한테서 민영 방송 허가를 얻어냈을 때만 해도 태영건설은 대주주이긴 했지만 30여 개 회사와 지분을 나눠 가진 형태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SBS는 태영건설의 완벽한 자회사다. 귀뚜라미보일러와 대한제분 같은 기업 투자자와 국민연금기금, 한국투자신탁, 한국투자증권 같은 금융투자자가 SBS와 SBS 미디어홀딩스의 지분을 크고 작게 나눠 갖고 있긴 하다. 하지만 태영건설의 지배력은 확고하다. 2009년엔 금융지주회사법도 개정됐다. 덕분에 태영건설이 SBS 미디어홀딩스를 통해 SBS를 지배하는 구조가 법적으로 완전히 가능해졌다. 지난 20년 동안 SBS는 어정쩡한 상업 방송이었지만 이제 본격적인 상업 방송국이 됐단 뜻이다.

상업 방송 SBS의 첫 번째 작품이 올림픽과 월드컵 독점 중계다. 2006년 6월 SBS는 KBS와 MBC의 등 뒤에서 FIFA와 IOC를 상대로 방송 중계권 협상을 했다. KBS였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공기업인 KBS는 2억 달러짜리 협상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MBC도 불가능하다. MBC 역시 사장이 주인은 아닌 반공기업인데다가 강성 노조까지 버티고 있어서 이런 식의 올인 경영을 하기가 어렵다.

SBS가 월드컵과 올림픽 중계권을 사들이는 방식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오너 기업만 할 수 있는 공격 경영이었다. SBS는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를 위해서 거의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시켰다. 균형 편성은 권위 있는 지상파 방송사의 금과옥조다.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만 반복 편성하는 건 상업성에 함몰된 케이블 방송사들이나 하는 짓이다. SBS는 그 선을 넘었다. SBS가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보여준 단면이다.

문제는 중계권 획득 과정과 올인 편성이 그동안 관심밖에 있었던 SBS의 속살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는 데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같은 진보적인 시민단체들은 SBS의 무리수가 사적 소유가 된 방송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보고 있다. SBS는 이탈리아의 미디어 셋과 비교된다. 미디어 셋은 이탈리아의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회사다. 세 개의 민영 방송을 운영하고 있고 이탈리아의 KBS인 RAI의 지분까지 갖고 있다. 이탈리아는 방송이 사적으로 소유되면 어떤 여론 왜곡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베를루스코니는 외교가에선 툭하면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만 이탈리아 국내에선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 그의 방송사들은 이탈리아 방송 시장의 90퍼센트를 지배한다. 베를루스코니의 난행은 이탈리아 국내에선 정치 쟁점화되지 못한 채 잊힌다. 언론이 물고 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명문 축구 구단인 AC밀란을 갖고 있다. 베를루스코니가 스포츠 중계를 상업 방송의 주축 콘텐츠로 삼는 건 당연하다. 그는 축구 같은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만큼 한 방에 시청률 장사를 할 수 있는 상품이 또 없다는 걸 안다. 베를루스코니는 상업 방송과 축구로정치 권력까지 차지했다. SBS는 상업 경영과 축구로 단숨에 방송 시장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이쯤 되면 단순히 스포츠 중계 얘기가 아니다. 한국 방송 시장은 민영 방송 시대를 앞두고 있다. 아주 빠르면 2010년 해가 바뀌기 전에 새로운 종합 편성 채널 사업자가 선정될 수도 있다. 사적으로 소유된 방송사들이 방송 시장을 선도하는 시대가 된단 뜻이다. 이제까지 방송은 늘 공공재였다. 방송사들은 나라한테서 전파를 빌려 쓰는 임대 사업자들이었다. 방송사들한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라와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국민한테 공정할 의무가 있었다. 이젠 다르다. 방송사는 시청자가 아니라 주주한테 책임을 져야 한다. 공익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사익을 위한 방송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시청률을 얻으려면 보편적인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균형 있는 방송을 해야 한다. 그러나 상업 방송한텐 보편적인 시청률보단 광고주와 주주를 위한 시청률이 더 유익하다.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보단 회사 돈 1천억원을 털어 넣은 월드컵 중계방송의 시청률이 높은 게 SBS한텐 더 이익이다. <나쁜 남자>보단 월드컵 독점 중계를 옹호하는 뉴스 보도가 담긴 <8시 뉴스>의 시청률이 높은 게 더 유리하다. SBS의 올림픽과 월드컵 독점 중계는 상업 방송 시대를 앞두고 SBS가 쏘아 올린 선전포고다. SBS는 갈 길을 정했다.

하지만 SBS가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종합 편성 채널이 생겨나서 SBS 같은 상업 민영 방송이 여럿이 되면, 불리해지는 건 SBS다. KBS가 수신료를 올리는 대신 KBS1TV가 지금 그런 것처럼 KBS2TV의 광고마저 없애버리면, 시청률이나 광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방송사가 된다. 대신 KBS가 차지했던 광고 시장은 새로 태어날 민영 방송의 몫이 된다. MBC는 상업적인 공영 방송이지만 SBS에 비하면 역사도 길고 여러 모로 경쟁력도 키워왔다. 반면에 SBS는 치열한 방송 시장에 그대로 노출된다. 게다가 불리한 처지다. SBS는 엄밀히 따지면 수도권 방송이다. SBS가 KBS나 MBC처럼 전국 방송을 하려면 강원도의 GTB나 부산의 KNN, 울산의 UBC 같은 지방 민영 방송들과 제휴해야 한다. SBS의 전국 시청률에서 지역 민방이 차지하는 비율은 50퍼센트가 넘는다.

새 민방의 주체가 SBS의 태영건설보다 돈도 많고 힘이 셀 수도 있다. 거론되고 있는 보수 언론사들은 하나같이 신문과 방송을 아우른다. SBS한테 불리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SBS가 확보한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은 2010년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16년 브라질 올림픽까지다. 2016년이면 종합 편성 채널이 등장해서 자리를 잡는 시장 전환기다. 신생 방송사는 자체 제작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중앙일보> 정도가 자회사인 IS플러스코프와 <하얀거탑>을 만든 안판석 PD를 앞세워 드라마 자체 제작 능력을 키워내고 있을 뿐이다. 역시 한 방은 스포츠 중계다. 월드컵이나 올림픽만 한 게 없다. SBS는 2016년까지 중계권을 독점해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견제하는 데도 성공했다.

SBS가 중계권을 사들이고 4년 동안 SBS와 KBS, MBC는 간헐적인 여론전을 벌여왔다. SBS는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을 내세웠다. 독점 중계를 하게 되면 방송 3사가 천편일률적인 스포츠 중계만 해대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단 주장이었다. KBS, MBC는 SBS의 이기심 탓에 외화가 낭비됐다고 맞섰다. SBS는 방송 3사가 공동 중계를 했을 때보다 두배가 넘는 가격으로 중계권을 사들였다. 사실이지만 하나같이 궤변들이다. 월드컵 중계권을 누가 가져갈 것이냐는 방송 기업들끼리의 경쟁이란 걸 다들 알고 있다. 시청자 입장에선 독점중계를 하든 공동 중계를 하든 더 좋은 중계방송만 볼 수 있다면 그만이다. 축구는 이미 보편적인 공공재가 됐다. 골프처럼 볼 사람만 보는 경기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의 경기를 볼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 방송 3사는 공공재인 전파로 공공재인 축구를 중계해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방송사들은 더 좋은 중계방송을 추구하기보단 과점적 담합에 안주하는 데 더 익숙하다. 2006년 5월 30일 방송 3사의 합의라는 것부터가 공공성이란 허울을 뒤집어쓴 담합이다. 시청자들은 이미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독점 중계를 경험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선 서로 다른방송사의 서로 다른 진행과 해설을 비교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방송 3사가 모두 FIFA한테서 제공 받는 같은 화면을 틀어대면서 음성 해설만 다르다고 차별화된 방송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순이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다른 선택권이 없으면 길들여지는 존재들이다. SBS 단독 중계에 대한 비판은 시끄러웠지만 진원은 대부분 경쟁방송사나 언론사들이었다. 다급해진 KBS와 MBC는 이제 SBS를 직설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MBC는 SBS가 FIFA의 상술에 놀아나고 있단 주장을 편다. FIFA는 중계권료를 높이려고 나라마다 방송사들의 담합을 깨느라 애를 쓴다. 하지만 약속을 맨 먼저 깬 건 MBC였다. 지난 2001년부터2004년까지, MBC는 박찬호 메이저리그 독점 중계방송으로 큰 재미를 봤다. 방송 3사의 담합을 깨고 MLB와 접촉한 성과였다.

해외 스포츠 중계권은 방송사들 입장에선 누가 먼저 줍느냐의 싸움이다. 드라마나 뉴스, 예능이나 다큐멘터리와 달리 방송사의 열과 성이 들어가는 제작물이 아니라 이벤트 중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방송사의 역량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이 더 과감하게 배팅하느냐에 달렸다.단지 이번 승자가 SBS였을 뿐이다. 그리고 SBS는 이번 승리가 꼭 필요했다. 갈수록 상업화돼 갈 한국 방송 시장에선 상업 방송다워지는 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KBS는 국영 방송이고 MBC는 공영 방송이다. KBS는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한다. MBC는 정부 기관인 방송문화진흥위원회가 사장을 선임한다. 그런데 SBS의 사장은 태영건설의 윤세영 회장과 윤석민 부회장이 앉힌다. SBS는 KBS, MBC와 함께 공중파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 방송 시장에서만큼은 태영건설이 청와대나 방송문화진흥위원회와 맞먹는 권력을 쥐고 있단 뜻이다. 하지만 그 권력은 시한부다. SBS를 위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SBS는 독점 중계로 많은 맹점을 드러냈다. 올림픽과 월드컵 독점 중계는 한국 방송 시장 상업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SBS는 첫 경기의 승자다. 하지만 16강전에 올라갈 거란 보장은 없다. 월드컵은 끝났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에디터
    신기주(FORTUNE KOREA 기자)
    스탭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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