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은 없다

지금, 국적으로 자동차의 성격을 짐작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독일 뉘르부르크엔 전설적인 서킷, 뉘르부르크링이 있다. 노르트 슐라이페란 이름의 북쪽 코스가 특히 악명 높다. 코너가1백72개나 된다. 코스의 높낮이 차이는 300미터에 달한다. 직선로만2킬로미터 이상 뻗었다. 20킬로미터 넘는 코스를 한 바퀴 도는 건 일반도로 2000킬로미터를 주행하는 것과 맞먹는다. 이처럼 가혹한 조건 때문에뉘르부르크링은 고성능 차의 산실로 손꼽힌다. 뉘르부르크링 랩타임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성능과 내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도전인 까닭이다. 때문에 일반 소비자는 메이커가 주장하는 제원표의 숫자보다 공인 계측으로 검증된 뉘르부르크링의 랩타임을 더 신뢰한다. 따라서 유럽의 고성능 차 업체는 오늘도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눈썹 휘날리도록 뉘르부르크링을 달린다. 몇 년 전부터 뉘르부르크링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온차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거다. 닛산은 GT-R을 개발하면서 임시본부까지 차렸다. 캐딜락도 CTS를 뉘르부르크링에서 갈고 닦았다. 결실은 뿌듯했다.닛산 GT-R은 포르쉐911 터보의 랩타임마저 꺾었다. 캐딜락 CTS-V는 양산V8 엔진을 얹은 세단 가운데 가장 빠른 랩타임을 끊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과 미국의 자동차 업체가 독일의 산골짜기를 찾아 뺑뺑이 도는 모습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닛산 GT-R은 인기가 일본열도에 한정된 지엽적 스포츠카였다. 유럽과는 인연이 없었다. 캐딜락의 이미지는 오바마 대통령의 프레지덴셜 리무진으로 간추려진다. 캐딜락에 어울리는 스포츠는 레이싱이 아니라 골프였다. 자동차엔 본고장의 성향이 반영된다. 바로 전 세대 모델까지만 해도 일본 내수용 GT-R의 계기판은 시속 180킬로미터가 끝이었다. 세금 때문에, 덩치도 빠듯했다. 과거 캐딜락의 서스펜션은 자잘한 요철쯤 넙죽 삼킬 만큼 부드러웠다. 스티어링은 섬세한 조작감과 거리가 멀었다. 배기량과 덩치는 넉넉할수록 좋았다. 서킷에서나 통할 긴장과 절제완 거리가 멀었다. 미국차는 물렁하고 일본차는 경제적이란 식의 이분법은 오랜 세월 유효했다. 일본차는 가까이서, 미국차는 멀리서 봤을 때 아름답다는 주장도 설득력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각 브랜드만의 개성이나 특정 국가의 자동차를 상징하던 특징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슈퍼카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대중적인차 역시 마찬가지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규모의 경제가 본격화됐다. 내수만큼 수출 역시 중요해졌다. 각 제품이 겨냥한 시장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특정 소비자의 입맛만 챙겨선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게 됐다. 나아가 자동차 관련기술이 상향 평준화됐다. 성능과 안전이 대표적이다. 여러 브랜드를 저울질할수 있게 된 소비자의 눈높이 또한 덩달아 높아졌다. 일련의 변화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이상적인 차의 기준은 안방시장에서 전세계로 확장됐다. 일본차와 미국차가 독일의 뉘르부르크링이나 아부다비의 사막, 핀란드의 설원을 누비면서 성능을 담금질하는 건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유럽차가 중국의 지방도로에서 테스트하는 모습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각 브랜드의 성향이, 비슷한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다.

변화는 동시다발적으로 교차되는 중이다. 일본차의 덩치는 확연히 부풀고 있다. 인피니티의 신형 M은 BMW 5시리즈나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 스보다 길고 껑충하다. 배기량도 살찌웠다. V6 엔진의 배기량은 3.5리터에서3.7리터로, V8 엔진은 4.5리터에서 5.6리터로 키웠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유럽 시장을 감안한 하이브리드와 디젤도 선보인다. 미국차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BMW 출신 밥 러츠가 한동안 신차개발을 맡았던 캐딜락이 대표적이다. 디자인은 세련되고 하체는 탄탄해졌다. 주력 엔진은 V8에서 V63.0리터 터보로 바꿔가는 중이다. 라세티 프리미어의 미국 버전인 시보레 크루즈엔 1.4리터터보 엔진까지 얹을 예정이다. 엄격해진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에 맞추기 위한 해법이기도 하다. 유럽차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서유럽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다. 과거엔 유럽에서만 차를 팔아도 그런대로 먹고살았다. 푸조와 시트로엥, 르노 같은 프랑스 브랜드는 지금도 북미시장에 공식 판매망이 없다. 그러나 아주 이례적인 경우다. 이제 대개의 메이저급 유럽차 메이커는 미국이 없으면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지경이다. 따라서 유럽차에 미국 소비자의 취향이 반영된 지도 한참 됐다. BMW가 좋은예다. 지난 10년간 그 어떤 유럽 브랜드보다 이 같은 변화에 앞장서 왔다. 특히 디자인은 급진적인 변신으로 찬반양론의 뜨거운 불씨를 당겼다. 올해 데뷔한 BMW 신형 5시리즈는 역대 어떤 모델보다 부드러워졌다. 1990년대 미국 시장에서 위축된 판매에 위기감을 느낀 결과였다. 포르쉐가 골수 팬의 반발을 무릅쓰고 카이엔을 개발한 것 또한 북미 시장을 의식한 결정이었다. 카이엔 덕분에 포르쉐는 SUV 시장에서 한몫 단단히 챙길수 있었다. 나아가 미국인이 아껴마지 않는 V8 엔진이 없었던 기존의 핸디캡까지 극복했다. 올 초 포르쉐가 선보인 4도어 세단 파나메라 역시, 최대시장 미국과 신흥 시장 중국을 겨냥한 노림수였다.

20세기 말 자동차 업계를 수놓은 인수합병 열풍은, 각 브랜드의 정체성마저 뒤죽박죽 섞었다. 포드는 볼보, 재규어, 랜드로버, 애스턴마틴 등 유럽의 쟁쟁한 브랜드를 잇달아 인수했다. GM 또한 사브를 사들였다. 크라이슬러는 한때 람보르기니를 소유했다. 나아가 다임러-벤츠와 ‘세기의 합병’을 단행했다. 자동차 업계의 혈연관계는 더없이 복잡해졌다. 유럽 내에서도 짝짓기는 활발했다. BMW는 영국의 미니와 롤스로이스를 휘하에 거느렸다. 로버와 랜드로버는 샀다가 되팔았다. 폭스바겐은 프랑스계 이탈리아 브랜드인 부가티와 영국의 벤틀리를 손에 넣었다. 체코의 슈코다, 스페인의 세아트도 거머쥐었다. 아우디는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미국과 인도네시아를 전전하던 람보르기니를 인수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돌연 결합이 깨진 커플이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를 주도한 건 안방시장에 안주했다 존폐의 위기에 몰린 미국차 업체였다. 이들이 헐값에 토해낸 자국 및 유럽 브랜드가 새 주인을 찾아 나섰다. 또 다른지각변동이 시작됐다. 허머와 볼보는 중국에 입양됐다. 포드가 내놓은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인도 타타모터스의 품에 안겼다. 이렇듯 어지러운 브랜드 쟁탈전은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내리막 주행 안정장치는 랜드로버와 BMW의 SUV가 나란히 쓴다. 랜드로버 디스커버리의 지형반응 시스템은 포드 익스플로러도 쓴다. 크라이슬러300C엔 벤츠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이 살아 숨쉰다. 롤스로이스 고스트의 심장은 BMW고, 벤틀리 컨티넨탈 플라잉스퍼의 뼈대는 폭스바겐 페이톤이다. 각 브랜드 간 동맹과 협력 또한 각각의 정체성을 흐린 원인이다. 르노는 닛산과 자본을 나눈 혈맹 관계로 거듭나면서 뼈대와 파워트레인을 함께 쓴다. 푸조는 미쓰비시와 SUV를 함께 만든다. 1.6리터 휘발유 엔진은 BMW와 함께 개발했다. 그래서 207과 미니의 엔진이 같다. 포르쉐 카이엔과 폭스바겐 투아렉이 이란성쌍둥이란 건 공공연한 출생의 비밀이다.

경쟁사 간의 기술적 차별도 희미해졌다. 비용 절감을 위해 다국적 부품업체의 기술을 사서 쓰면서부터다. 독일차와 한국차가 같은 부품업체의 커먼레일(CRDI) 엔진 시스템이나 주행 안정장치를 쓴다. 포르쉐와 BMW는 같은 회사의 자동변속기를 쓴다. 현대와 볼보의 SUV는 같은 업체의 AWD(항시 사륜구동)시스템을 얹는다. 현대 제네시스와 롤스로이스는 같은 브랜드의 오디오를 쓴다. 변화는 이제 기획과 개발, 생산에까지 녹아들었다. 볼보 C30은 스웨덴이 아닌 영국 런던 가망고객의 설문조사로 밑그림을 완성했다. 토요타 캠리는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디자인하고 생산한다. 현대는 인도, 기아는 유럽 시장만을 겨냥한 전용 차종을 개발해 판매 중이다. 포르쉐는 터부시했던 디젤 엔진마저 얹었다. 재규어는 꿋꿋이 지켜온 실루엣을 등졌다. 자동차에서 저만의 개성이 사라져가는 건 아쉽다. 하지만 필연적인 수순이다. 제품은 시장의 요구에 따라 진화한다. 환경이 바뀌면 제품도 발 빠르게 변해야 한다. 자동차 또한 마찬가지다. 달라진 상황에 통할 장점만 악착같이 추려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우성 형질만 살아남을 수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법칙이다. 닛산과 BMW의 뿌리는 영국의 오스틴이었다. 영국 랜드로버의 시작은 미군이 남기고 간 지프였다. 포르쉐911의 밑그림이 된 건 폭스바겐 비틀이었다. 비틀의 생산시설은 미국 포드의 모델 T 공장을 벤치마킹해 완성됐다. 토요타는 미국차를 분해해 기초 기술을 익혔다. 포르쉐는 토요타의 생산기술을 받아들여 위기를 극복했다. 애당초, 오리지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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