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ing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2010.10.06정우영

말도 섹스도 해야 맛이다. 하고 싶을 때 안하면, 문제가 생긴다

깔고 앉은 카디건은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먼저 손을 잡은 건 여자였다. 열린 창문으로 아카시아 냄새가 콧등 아래 선을 긋고 지나갔다. 지금은 10월이었다. 어딘가 잘못되었지만, 탐구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일. 직선처럼 분명한 일. 남자는 택시 기사에게 문을 닫아 달라 하지 않고 여자에게 카디건을 벗어주었다. 여자가 추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오랫동안 손잡은 게 어색했는지, 아니면 아카시아 냄새를 더 맡고 싶었는지, 남자는 몰랐다. 삶의 어떤 순간에서 답을 얻지 못한다 해서 목적지에 못 닿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을 대신하는 자기장이 있다. 그들은 한강 잠원 지구로 택시를 돌렸다. 남자가 한강에서 맥주 한잔 더 하자고 한 게 나침반의 빨간 바늘이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나침반이나 겨우 볼 줄 아는 형편없는 탐험가였다. 그들은 각자의 무릎을 감싸고, 한강은 참 시원하구나 하는 감흥만 간신히 유지하는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현대고등학교를 끼고 우회전할 때 남자는 자신이 재능 없는 개그맨이라는 비유를 생각했다. 웃기려고 발버둥칠수록 냉담한 관객 앞에서, 개그맨 자질이 없다는 절망만 떠안는 개그맨. 미셸 슈나이더는 우정을‘어렵지 않게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 정의했다. 남자는 그녀와 자신이 우정보다 못한 관계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다시 무대에 올랐다. 손등으로 여자 허리께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신방 훔쳐볼 구멍을 창호지에 내는 조심스러움으로 했겠지만, 사실은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이거나 코를 간지르는 짓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여자들은 이상하게도 그걸 다 알았다. 모른 척할 뿐. 하지만 현명한 여자는 아는 만큼 티 내지 않았다. 농담은 그럴 때 필요했다.

“이 카디건 비싼 거예요? 아까워요? 큭큭.”

남자의 눈이 커졌다. 재능 없는 개그맨은 구박 받을 때 가장 웃긴다. 오늘 그녀와 잘 수 있다면, 남자는 카디건 따위 그 자리에서 불태워도 좋았다. 여자는 다른 때보다 오래 기다렸다. 고백할 때가 벌써 지났다. 이번이 다섯 번째 만남이고, 이미 여자는 두 번째 만남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매번 처음 만난 사이처럼 굴었다. 남자는 배우가 아닌 관객 같았다. 집에 가서 블로그에 공연 리뷰를 작성할 테고, 몰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숭배만 했다. 강아지처럼 쳐다볼 땐 껴안아주고 싶다가도, 버릇 나빠질까 봐 걱정이 앞서 그러지 못했다.

관음증이 만질 수 없는 걸 욕망할 때 일어난다면, 관객은 자신을 만지지 못하는 존재로 한정한 상태다. 그녀의 친구에겐 관객을 정의하는 말이 사뭇 달랐다.“하여간 여자가 먼저 말하게 만드는 것들은 다 개새끼야.”그러나 남자는 꼬리도 제대로 못 흔들었다. 가벼운 농담을 건네면 당황하기 바빴다. 여자는 무사한 한강의 밤 덕분에 몸도 마음도 추웠다. “춥죠? 그만 일어날까요? 카디건은 털어서 입고 가요.” 아, 말해주지 않아도 이 남자가 아는 건 온도밖엔 없을까?

남자는 모카 구두를 신었다. 걸을 때마다 시멘트 바닥 밟는 뾰족한 소리가 났다. 여자는 그게 초침 같았다. 그만 양을 세도 좋다는 뜻인지, 남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의기소침한 개그맨 같으니라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을 알아차리자 여자는 그가 좀더 미워졌다. 미련함을 끈기로 바꿔 말한 대도 그것을 재주라고 생각지 않는다. 결혼이 샹들리에처럼 아름답게, 하지만 불안하게 머리위에 떠 있는 나이. 할머니는 벌써 오년 전부터, 가죽이 찢어진 소파처럼‘쟤는 언제 치우냐’고 말했다.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남자는 이제 소파를 제자리에 놓고, 그 위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다섯 번을 만나면서 한 번 밀어본 적도 없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심하긴 심했다. 남자가 말했다.

“혹시, 우리 집 가서 맥주 한잔 더 안 할래요?”

“지금 집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네. 뽀뽀하고 싶어요.”

‘야’ 할 때 꼭 ‘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 여자는 팔짱을 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만 돌려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여자가 기다린 건 사귀자는 말이었지 섹스는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이 결혼적령기를 놓친 원인을 교제보다 빠른 섹스 때문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좋았다. 이 남자의 경우, 여자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것만으로 기뻤다. 신은 이 남자에게 마라톤의 재능은 못 줬어도 멀리뛰기의 재능은 준 것이다.

맥주는 테이블 위에 뚜껑도 따지 않은 채였다. 남자가 컵을 가져오려고 일어났을 때, 여자도 따라 일어나 뒤에서 안았다. 여자가 특별히 참지 못해서라기보다 그의 등짝이 그녀를 불렀다. 남자는 컵을 잡았다 내려놓았다. 설거지를 줄이는 바지런한 생활 태도. 남자는 키스를 했고, 그녀의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 순서가 여자에겐 탐탁지 않았다.

이 멀리뛰기 선수에게 부정 출발 경고를 줄 수도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그가‘뽀뽀’라고 발음했던 입으로 가슴을 빨아주었으면, 그녀의 가슴을 보고 감탄해주었으면 했다. 그녀의 속살에서 처음으로 발견하는 게 찐득한 애액이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요’ 도 해보기 전에 ‘빨아줘요’ 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실제 흥분한 것보다 더 크게 소리 냈다. ‘그곳’에서 남자의 손이 연주하는 질펀한 음악이 시작됐다.

여자가 부끄러워할수록, 남자는 더욱더 자기 무대처럼 날뛰었다. 이제 남자는 무릎을 굽히더니 그곳에 입을 가져갔다. 남자들은 하루 종일 관객처럼 굴다가도, 섹스할 때만 되면 주인공이 된다. 여자는 겨우 남자의 재킷과 타이만 벗겼다. 기고만장한 개그맨 앞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말조차도 그랬다.

“저기, 불 좀 끌까요?”

“하하, 부끄러우세요?” 말하지 않으면 정말 모르는 일.

여자가 먼저 방으로 향했다. 남자는 동선을 따라 온 집 안을 소등하면서 따라갔다. 여자는 목까지 끌어당겨 이불을 덮었다. 남자는 촛불을 켤 셈인지, 콘돔을 찾는 것인지, 침대 옆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동안 여자는 이불 밑에서 옷을 벗었다. 남자가 이불을 들었을 때 보여주고 싶은, 혹은 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군대에서 ‘앉아 쏴’ 란 명령을 들었을 때보다 더 재빠르게 이불을 젖히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리고 남자의 손은 다시 ‘그곳’ 이었다. 남자는 바람을 잔뜩 넣은 낮은 톤으로 말했다.

“가슴 빨아줄까요?”

“뭘 물어보고 그래요.”

“섹스 할 때 야한 말도 하고 그러는 게 흥분되잖아요?”

여자는 웃었다. 기가 막혀서. 늘 침대 위에선 불안한 여자에게 칭찬보다 흡수가 빠른 말은 없다. 더러운 말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남자는 가슴이 벅찼다. 처음으로 관객이 뭘 원하는지 알아맞힌 것 같았다. 남자는 가슴을 향해, 병장이 부를 때의 이등병처럼 달려들었다. 관등성명은 대지 않았다.

남자는 복종보단 반항에 관심이 많았다. 남자가 가슴을 깨물고 핥고 비트는 동안 여자는 집 나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안은 엄마처럼 복잡한 심사였다. 일단 그 집에 퍼질러 앉아 낳았으니, 별 수는 없다. 여자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탄성을 냈다.

“아, 좋아요.”

“넣을까요?” 상대방의 침묵과 거짓말은 상상력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선 같은 것 인지 모른다. 성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일처럼, 참말은 짐작은 가지만 멀리 있는 무언가다. 여자는 좀 더 거짓말과 침묵을 믿어보기로 했다.

“저기 그만 물어보고, 아니 그냥 말 안 하면 안 될까요?”

“왈왈.” 남자는 지금 그게 귀엽다고 하는 걸까? 여자는 자신의 친구가 가진 강아지 감식안에 대해선 미처 몰랐다.

“옷이나 좀 벗으시죠?”

남자는 단추를 뜯어낼 듯이 셔츠를 벗더니, 팬티와 팬츠는 한 번에 잡고 내렸다. 순식간에 남자의 ‘그것’ 이 눈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오늘 어느 때부턴가 자신에게 ‘품위’가 사라졌음을 눈치챘지만, 자각은 매번 늦었다. 하지만 남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남자의 경험에 따르면, 여자는 지금 안달 난 것이 분명했다.

“헤, 크기도 하지.”

그만 여자의 입에서 말이 헛 나왔다. 이 남자의 그것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걸까? 그것의 크기가 섹스에서 결정적이라는 게 그녀의 무의식이었을까? 여자도 남자처럼 첫 번째 관계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지금 그 집을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기대와 같은 밤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꼭 절망할 건 없다. 그들은 침대 위에 있고, 세상 어딘가에는 자기장이 있으므로.

    에디터
    정우영
    스탭
    Illustration/ Fingerpainting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