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는 사이에

여자 친구가 여행을 가자, A는 해방감에 몸이 달았다. 옆엔 맘껏 만질 수있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A와 B는 2년 동안 연애했다. 둘은 영화를 보고 같이 울거나, <침묵의 세계> 같은 책을 돌려 보면서 전원을 꿈꾸는 커플이었다. 세심하게 배려하다 서로 상처 받곤 했지만 크게 다투진 않았다. 몸은 질리지도 않았다. 결혼, 연봉, 집, 축의금 같은 얘기는 교통 경찰처럼 따라붙었다. 3년 동안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대개 행복했지만, 노래방 새우깡을 혼자 다 먹는 것 같은 권태도 있었다. 그러던 중, A의 여자친구 B가 여행을 떠났다. 날짜 변경선 너머에 몇 주간 머무른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지는 건 처음이라서, A는 몰래 부풀었다. 취해서 다른 여자 목소리, 새 몸, 다르게 신음하는 리듬에 몸이 달았다. 죄책감은 접어두었다. 결혼한 것도 아니니 불륜일 리 없고, 그 나라에도 남자는 있고, 서로에게 하룻밤은 바람도 아니라고 오래된 부부처럼 자위하면서.

한국이 아르헨티다와 축구했던 날, A의 리비도는 절정이었다. 눈높이 아래 드러난 젊은 여자들의 배는 희고 납작했다. 빨간불 뿔로 틈도 없는 시청 앞 잔디밭에서 서로 만지고 핥는 밀교 의식같은 음탕함. 다른 몸에 대한 무책임한 가능성…. 서울은 거대한 클럽이었다. 흥분과 자유가 가시기 전에, A는 어떤 여자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을 잡고, 이태원에 있는 술집을 예약했다.

여자 후배를 다시 만난 건 5년 만이었다. 그녀는 4개월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다. 5년 전에도, 둘이서 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원룸에서 두 병재 소주를 마시고, 반만 남은 버본 위스키에 오랜지 미닛 메이드를 섞어 마셨던 그 때. A는 대학교 3학년, 후배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녀는 모니터 앞에서 번역에 열중하고 있었다. 짦은 반바지 아래로 오른쪽 복사뼈를 왼쪽 허벅지 밑에 괴고, 가끔은 떨기도 했다. 눌린 허벅지에는 탄력이 있었다. 입으론 버본 위스키 묻은 얼음을 사탕처럼 굴렸다.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는 묶었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A가 먼저 만취했다. 새벽 두시 였다. 침대 맡 쿠션을 베고 잠들 때, 여자 목덜미 냄새가 났다.

“다했다! 나도 잘래, 이제. 오빠, 오빠? 안 가요?”

선후배끼리 ‘오빠’ 소리는 7월 말 장마처럼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이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는 게 어색하진 않았지만, 취해서 모텔에 갈 사이도 아니었다. 긴장한 사람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집에서, 이런 식으로 취했던 적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고, A가 회상했다.

“걔랑 나 사이에 얽힌 수많은 인물이 1초에 삼십 명 스치는 거야. 걔는 내가 누굴 만나고 좋아했는지 다 알았어. 나도 마찬가지고. 가 학교 사람들이었거든. 그래서 침대 밑에서 잠든 척 했지. 섹스 한 번 하자고 지저분하게 얽힐 일 없잖아?”

그녀는 A를 깨우다맨발로 화장실에 갔다. 타박타박 소리가 들렸다. 새벽 두 시까지 에어컨을 틀어놓아서, 습기라곤 없었으니까. 그녀가 민소매 티셔츠를 벗어 화장실 앞에 던져두는 소리를 들었다. 곧 바지도 벗어 던졌다.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수증기가 세어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거품을 내서, 몸 닦을 닦는 소리를 상상만 했다. 170센티미터에 가까운 후배의 몸을, 물줄기는 날렵하게 훑어내겠지.
A는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잠들지 않았으니까 꿈도 아니었다. 물줄기 소리가 끊었을 때, A는 실눈을 떴다. 군데군데 물방울 모양으로 젖은 파란색 팬티가 보였던 것도, 젖을 발로 걸을 땐 타박타박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도, 그때는 모른척 했다.

“너랑 자고 싶어서 씻고 나온 거라는 생각 안 했니? 걘 준비했던 거야. 그건 여자한테도 실례라고.” 내가 말했다. A가 말을 이었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나를 깨우러 온 거야. ‘오빠, 오빠? 많이 취했어요? 잠이 와요? 지금?’ 내가 뭐라 그랬게?”

“‘응, 졸려.’ 그랬겠지. 너같은 싱거운 애가 또 어디있냐?” 나는 소주를 마시도, 미역냉국으로 입을 가셨다.

젖은 머리카락으로 A의 코와 귕 언저리에서 말 하던 그녀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A는, 그녀가 몇 번이나 뒤척였는지를 헤아리진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물방울 모양으로 젖은 엉덩이, 그 아래로 안정적인 허벅지, 긴장된 종아리…. 크지 않은 가슴은 브라를 입지 않아서 부드러워 보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할 때, 그녀가 A를 불렀다.

“오빠.” A는 잠에 겨워 신음 (하는 척) 했다. 그녀가 또렸하게 말했다. “올라와서 주무셔도 돼요.”

나는 긴장과 탄식을 동시에 했다. 이제부턴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래서, 그래서?” 괜히 애가 타서 물었다. A가 말했다.

“상체만 일으키고 후배 종아리를 잡으면서 말했어. ‘너, 오빠 너무 믿는거 아니니?'”

“그리고 잤어? 했어? ‘오빠 믿지 마.’ 그러고 해야지!”

A는 웃기만 했다. 후매의 탄력있는 종아리를 잡고, 몸은 그래도 침대 밑에 두고, 코로는 그녀의 향수, 샴푸, 몸 냄새를 맡으면서 잠들었다고 했다.

멀써 5년 전이었다. 오늘은, 한국이 4대 1로 졌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듣자고 만난 자리였다. “사실 그날도 걔내 집까지 갈 생각은 없었어. 졌으니까 기분도 꿀꿀하잖아? 근데 이사를 했대. 새로 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 내려준다기에 갔지.”

저녁은 둘 다 걸렀다. 우동와 꼬치를 주문하고, 소주와 맥주를 섰어 마셨다. 2사에선 와인 한 병을 비웠다. 맥주와 소주가 띄운 몸을, 와인이 다시 가라앉혔다. 그건 발효된 포도의 속성일까? 어디서든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 그날 마신 스페인 와인에 있었다. 바래다 주는 길에 후배가 말했다. “오빠, 잠깐 들어왔다 가요.”

지금 어디냐고 물어볼 여자, 술은 그만 마시라고 걱정할 여자, 집에는 언제 들어 가냐고 독촉할 여자는 태평양 너머에 있었다. A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5년 전을 반복하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젖은 엉덩이, 170센티미터의 나체, 5년 동안 숙성된 여자의 몸을 생각했다. 집에선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져볼 틈이 없었다.

그녀가 A의 어깨에 기댄 게 발단이었고, A가 팔로 그녀를 감싼게 전개, 그녀가 A의 귀를 핥았던 게 위기, A가 고개를 돌려 키스한 게 절정이었다. 이후는 절정만 이어지는 희곡이었다. 듣기엔 지루하고 둘이서만 짜릿한 얘기. 몸에선 비누대신 살 냄새가 짭쪼름했다. 입에선 맥주와 소주와 와인 냄새가 훅 풍겨왔다. 와인병 밑에 남아 있던 침전물이 서로의 혀돌기마다 끼어있는 것 같았다. 혀와 혀가 만날 때 힘이 들어갔다. A가 말했다. “전혀 주저하지 않았어. 다 벗엇을 때 서로 부끄럽지도 않았고.” A는 아직도 나체로 안고 있는 것 같은 붉은 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대창 1인분을 추가했다.

“소리도, 냄새도, 몸이 떨리는 리듬도 ‘달랐어.'”
“그럼 된 거 아냐?” A는 말이 없었다. “너…. 또 안하고 나왔어? 후배 몸에 170센티미터짜리 사리 생기겠어….” A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녀는 부릎 사이에서 눈을 맞춘 A에게 (그 찰나에) 사랑과 연애를 운운하기 시작했다. 그 간의 외로움과, 관계의 시작을 암시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주기도문을 욀 일이지.

한편, 날짜 변경선이 제어하는 건 시간 뿐이었다. A의 여자친구가 목성에 있다 해도, 관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채 잠시 방임했던 하루였다. 시청에서 숱했던 납작한 배들이 부추긴 ‘판타지’의 친밀한 현실이었고, 5년 전의 심리적 보상이었다. ‘어젯밤 일은 실수였다.’ 고 말하는 뻔한 남자가 되기는 싫었다고, A가 말했다. 섹스는 삽입 직전까지만 가벼웠다.

“부담스럽고 촌스럽잖아. 거기까지만 했어. 이불을 덮고 배를 쓰다듬어줬어.”
“그놈의 배…. 설마, 미안하다고는 안 했지?”

여러모로 여자 후배가 아쉬워할 상황이었다. A의 섹스는 사정으로 끝나겠지만, 해가 뜬다고 후배의 마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A는 그래서 사과했다. 그대로 안고 잠들어서 동이 틀 무렵, A는 그녀 혼자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둘이 덮었던 이불은 발 아래 있었다. 여자는 맨발로 걸어가 혼자 샤워하고 속옷을 갖춰 입었다. A는 후배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나체로 숨을 쉬었다.

비는 그쳐 있었다. 불판엔 내장에서 흘러나온 곱이 눌어붙어 있었다. 괜히 휴대전화를 보고 있을 대, 이문동에 사는 어떤 선배는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스물다섯 싱그럽고 무르익은 수밀도 같은 젖가슴…. 솟이 꽉 차서 따숩고 부드러운 가슴이 그리워 외롭다.” 이 선배가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언제였더라? 답 문자는 이렇게 보냈다. “그러자면 스물하나는 되야죠.ㅋㅋ” 다시 문자가 왔다. “위태롭다. 이만 자자ㅎㅎ. 좋은 밤 야한 꿈.”

취한 채 무릎을 열었지만 필요한 건 관계였던 스물아홉 여자, 다 벗은 여자를 안아주기만 하고 그냥 나온 서른한 살 남자, 스물다섯 복숭아 같은 젖가슴을 상상만 하면서 잠을 청하는 서른 데살 남자가 밤 열한 시에 서울에서 잠들었다. 낮과 밤의 다른 나라에 있는 어떤 여자가, 일곱 번째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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