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발명왕

지금까지의 ‘최초’가 여기 있다.




누름단추식 전화기-1948


구식 전화기 다이얼을 돌리는 일은 수고스러운 데다가 시간도 많이 걸렸다. 소방서 전화번호를 다 돌리기도 전에 집이 홀랑 타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미 교환수들은 개별 숫자를 신호할 때 전기적 파동 대신 음색을 사용하는, 보다 효율적인 누름단추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벨 연구소의 기술자들은 이 장비를 소비자들이 쓸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다. 웨스턴 일렉트릭 302 탁상전화기를 뜯어보면 안에 3인치 길이의 금속 리드가 10개 들어 있다. 단추를 누르면 정해진 리드가 튕기면서 고유의 소리를 낸다. 25개의 신제품이 펜실베이니아 주 메디아에 위치한 전화회사 직원들 가정에 설치됐다. 하지만 한 해 동안 이어진 시험운영은 실패로 끝났다. 전화기가 움직이거나 뭔가에 부딪칠 때 리드가 어긋났고, 전화를 걸 때 주변의 소리(심지어 말소리까지도!)로 인한 간섭도 심했기 때문이다. 1963년, 오류가 없는 디지털 음색을 내는 트랜지스터로 리드를 대체하고 나서야 누름단추식 전화기는 소비자와 만날 수 있었다.




아타리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 – 1976


아타리사는 혁신적인 신형 게임 콘솔을 개발할 때마다 정보 누설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 1976년 6월에 내려진 특허조정결정에 따라 마그나 복스사는 향후 12개월 동안 생산될 모든 신형 아타리 기기에 대한 권리를 가졌다. 그래서 아타리의 수석 기술자인 알 알콘은 자신의 자전거에서 이름을 딴 스텔라프로젝트를 캘리포니아 주 그래스 밸리 인근 산꼭대기에 홀로 떨어진 연구소로 가져갔다. 사이언 엔지니어링이 500달러가 안 되는 부품으로 단 3개월만에 만들어낸 최종 시제품은 곧바로 영상을 띄워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나중에 아타리사는 사이언이 붙인 형식번호를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 명칭에 사용했고, 결국 콘솔 자체의 이름도 2600으로 바뀌었다. 물론 아타리사는 1977년 6월에 열릴 CES까지 비디오 컴퓨터 시스템의 공개를 미루었다. 아타리사는 3천만 대가 넘는 콘솔을 판매했고, 1980년대에 아타리라는 이름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의 동의어가 되었다.




애플I – 1975


휴렛-패커드에서 근무하던 25세의 기술자, 스티븐 워즈니액은 여가시간에 MOS6502라는 신형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용 컴퓨터 언어 해석기를 만들고 있었다. 스티븐 워즈니액이 시중의 다른 키트보다 마더보드를 작고 간단하게 만들고 배선도도 무료로 배포했지만 호사가들은 여전히 조립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인 워즈와 아타리에서 일하던 스티브 잡스는 보드의 완성품을 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완성품에 애플i란 이름을 붙였다. 두 사람은 밤에 모여 잡스의 부모님 댁 차고에서 애플i을 조립했고 잡스의 여동생도 칩을 끼우고 보드 한 개당 1달러를 받았다.1976년에 그들은 2백 대를 생산해 개당 5백 달러를 받고 1백50대를 팔았다. 이는 원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저장이 불가능한 램이 장착된 것이 애플I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래서 뭔가를 저장하려면 직접 카세트 녹음기를 연결해야만 했다.




모토롤라 다이나택 – 1973


마틴 쿠퍼는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를 고작 90일동안에 만들어냈다. “필요한 모든 기술이 이미 우리 연구소 여기저기에 널려있었죠.”쿠퍼의 말이다. 그는 모토롤라의 부사장으로 ‘이동용 전지역 유효 송수화장치’의 개발을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 기기에 쑤셔 넣은 장치들을 보면 과연 이게 작동이 될까 궁금해질겁니다.” 기술자들은 대규모 집적회로를 쓰지 않고 수천 개의 저항, 콘덴서, 유도회로, 세라믹필터를 4.4파운드짜리 상자에 채워 넣어야 했다. 가장 큰 난관은 모토롤라의 연구진이 개발한 트라이셀렉터였다. 트라이셀렉터는 동시에 송화와 수화를 가능케 하는 장비였다. 그때까지 모든 이동통신기기는 송화 버튼을 눌러야 하는 워키토키 방식을 썼다. 불행히도 트라이셀렉터가 더블치즈버거만한 크기였기 때문에 쿠퍼와 팀원들은 이를 간신히 10분의 1로 줄였다. 맨해튼에 9백 메가헤르츠 주 기지국을 설치한 뒤, 쿠퍼는 6번가에 서서 전화를 거는데 성공했다. 어디로 걸었냐고? 벨연구소 말고 다른 곳이 또 있을까?




슈퍼 소커, 1989


로니 존슨은 프레온 가스 대신 물을 순환시키는 저렴한 열펌프를 기초로 보다 나은 냉장고를 만들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직접 제작한 황동노즐에서 발사된 물줄기가 욕실을 가로지르는 순간, 당시 나사의 제트추진연구소 소속 기술자였던 존슨은 좀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았다. 산탄총 방식의 공기 펌프와 몇 개의 조절 펌프는 작은 힘으로도 저격총 같은 사정거리와 정확성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장난감 회사에 이 발명품을 파는 일은 어려웠다. 7년에 걸친 실망의 나날 끝에, 존슨은 제조가 까다로운 플렉시 글라스제 ‘압력저장용기’를 2리터짜리 소다수 통으로 대체했다. 볼품은 없었지만 만들기는 쉬웠다. 1990년, 장난감 제조업체인 라라미사가 ‘파워 드렌치’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출시 첫해에만 약 2백만 개가 팔렸다. ‘슈퍼소커’로 이름이 바뀐 해당 제품군은 지금까지 2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무그모듈러 – 1964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한때 신시사이저가 사람들의 방을 가득 메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신시사이저의 ‘이펙트’는 처음 건반이 눌리고 전자음악 작곡가인 허브 도이치가 개념을 잡은 뒤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젊은 전자 기술자인 밥 무그는 도이치에게 보다 나은(그리고 더 간편한) 기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뉴욕의 트루먼스버그에 위치한 무그의 허름한 지하실에서 2주 동안 뚝딱거렸다. 구식 오르간에서 떼어낸 건반을 회로가 뒤엉킨 나무판에 붙이고 두 개의 오실레이터를 추가해서 전압과 파형을 조절 할 수 있도록 했다. 도이치는 무그에게 개념을 설명했다. “피아노 건반을 때리는 것은 ‘어택’이고 손가락으로 건반을 계속 누르고 있으면 음이 서서히 사라지거나 ‘디케이’하게 된다”는 식으로. 무그는 도이치를 가게에 보내 35센트짜리 초인종 단추를 사오게 했다. 그리고 발진기에 달아 도이치가 말한 개념을 구현했다. 무그의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는 큰 인기를 얻었다. 크라프트 베르크, 스티비 원더, 디스코 음악 제작자인 조르지오 모로더와 같은 대중음악가들이 무그 신시사이저로 70년대의 음악을 창조했다. 오늘날에도 다프트 펑크에서 닥터 드레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가들이 무그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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