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라고 쓴다

촬영장 바닥에는 이성복의 연애 시가 가득했다. 엄태웅은 받아쓰기 하듯이 엎드려서 적었다. 무엇을 쓸지는 몰랐지만, 그의 앞에는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모든 의상은 니나 리찌
모든 의상은 니나 리찌

연애편지 써봤나?
고등학교 때까진 썼던 것 같다. PC 통신, 인터넷 이런 게 없었으니까.

잘 썼나?
뭐, 그때 연애편지 빤하지 않나? 보고 싶다, 사랑한다, 그런 말이었다. 멋있는 말을 조금 바꿔서 내 말처럼 하고 그랬는데, 제법 잘 썼던 거 같다. 딱히 연애편지를 잘 써서 누구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지만, 우리 때는 연애할 때 매뉴얼 중 하나였다.

‘제법’이랬는데,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대개 생각이 많다. 당신은 어떤가?
어렸을 때부터 생각은 꽤 많았다. 발전적이거나 유용하기보단 쓸데없는 공상. 누나가 셋이다 보니, 누나들이 남자한테 받은 연애편지 훔쳐본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여자들 반응이 괜찮았나 보다.
기본적으로 편지는 연습장에 미리 써봤고, 신경 쓸 때는 정말 긴 시간 공들여서 썼다. 밤에 쓰고 아침에 봤더니 너무 감상적이어서 못 준 적도 있다.

아무리 써도 마음을 다 못 담은 거 같아서 못 보내는 게 연애편지다.
맞춤법이 맞는지도 굉장히 신경 쓴다. 하하.

다양한 역을 했지만 엄태웅이란 배우를 각인시킨 작품들은 대개 순애보적인 캐릭터였다.
그건 역할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걸 잘 못하니까 그걸 보면서 좋아하는 거 아닐까? 그런게 정말 사랑인 거 같긴 한데, ‘그것만이’ 사랑인지는 잘모르겠다.

그런 게 가능은 할까?
장진영 씨의 경우를 보면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순애보 아니다. 누군가와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만났다 헤어졌다 그러고 있으니까. 근데 뭐 연애할 당시에는 순애보일 거다.

김현석 감독의 영화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도 그것이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린다. <스카우트>가 민주화 운동 시대의 그늘이었다면,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는 남자라는 자아다.
김현석 감독이 참사랑이 뭔지 잘 모르는 남자들의 심리를 잘 알고, 그런 이야기를 잘 그리는 것 같다.

당신은 사랑이 뭔지 잘 아나?
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내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 주워들은 것과 어디서 본 것들을 바탕으로 한 정의였다. 실제론 잘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대사처럼 어쨌든 조금 더 사랑하면 되는 일일 텐데, 어느 단계에선 딱 막힌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사랑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 같다.

배우는 어떤 면에서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김명민처럼 매번 다른 사람이 되는 배우가 진짜 배우라는 소리도 듣고 말이다.
아직 나를 비우는 것 같진 않고, 내가 갖고 있는 걸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비워보지 못한 것 같다. 더 가서 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나를 비우는 건 나에 대한 잘 알고 나서라고 생각한다. 나한테서 나오는 걸로 연기하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걸 끄집어내는 연기라면, 작품 선택이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그렇다. 하지만 어떤 계산으로 선택한 적은 없다. 회사와 상의해서 최고인 걸 했다. 내가 이러니까 이런 작품을 찾아야지는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좋을 텐데 그런 상황이 못 됐다.

처음 엄태웅을 제대로 각인시킨 <부활>에서 선택이랄 게 있었나?
선택하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었지. 행운이 따랐다. 박찬홍 감독 꿈에 내가 나타났다고 한다. 나 이전에 예정돼 있던 사람 섭외가 길어지면서 박찬홍 감독과 만났고, 내게 기회를 줬다. 이전에 해보고 싶다고 얘긴 했었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은 건데, 스스로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나?
1인 2역이었고, 1회부터 24회까지 내가 끌어가는 거여서 막상 맡고 나니까 덜컥 겁이 났다. 실제로도 촬영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힘들었다. 근데 그때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 이전에 내가 너무 쌩쌩했다. 시키면 뭐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게 좋았다.

사람들도 그런 점을 눈여겨본 것 같다. ‘달려든다는 것.’ 생명력이랄까? 동생 죽고 오열하는 장면은 대단했다.
연기에 어떤 여유나 테크닉도 없었고, 뭘 해도 터질 듯했다.

엄태웅이 그때 보여준 건 투수로 치자면 신인 강속구 투수 같았다.
그러니까 컨트롤이 잘 안 되는 강속구 투수였다.

<선덕여왕> 때는 좀 나아졌나?
<선덕여왕>은 너무 힘들고 우여곡절도 많은 작품이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줬다는 의미에서 고마운 작품이다.

무슨 곡절? 무슨 정신?
<선덕여왕>에 임할 때 굉장히 안일하게,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했다. 동시에 내가 이러다 된통 당하지,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에누리 없이 그렇게 됐다. 일종의 슬럼프였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약이 됐다. 본의 아니게 김유신이 성장하는 것처럼 나도 성장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내 안에서 많이 컸다.

지금은 어떨까? 젊을 때는 넘치는 힘으로 다 삼진 잡겠다고 달려들지만 나이 들면 조절하지 않나? 삼진 말고 범타 유도도 많이 하고.
<부활>할 때 그랬다. 전부 다 강속구, 직구 승부. 그럴 힘도 능력도 없는데 의지만 그래서 매 장면이 힘들었다. 그때 이정길선생님이 드라마는 흐름이 있다, 느슨하게 가다가 힘주고 그래야 너도 안 힘들고 보는 사람들도 안 힘들다 했는데, 그때는 뭔 소린지 몰랐다. 이제야 그 얘기가 뭔지 알겠다.

처음에 절박한 게 있지 않았나? 당신이 마르고 닳도록 오디션 보러 다닌 얘기는 유명하다.
사회인 야구하다가 바로 메이저리그나 프로 무대로 간 야구선수 같았다. 잘하고 싶었고, 내가 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 되고, 왜 안 되는지도 몰라서 불안했다.

그 ‘잘한다’에 흥행은 포함 안 되나? 잘된 작품이 드물어서 부담이 있을 법도 한데?
내가 주연한 작품이 흥행 안 되면 좀 미안하다. 하지만 흥행에 대해 부담스럽진 않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근데 아무리 잘된대도 연말 시상식 가고 어디 행사 가고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성격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불편하다.

유독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존중이 있는 듯하다.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헐렁헐렁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성격 맞는데 어떤 규칙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알게 모르게 취향이 돼버린 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

취향 하나 물어볼까?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딘가?
옥수동, 우리 집 뒷산. 안 바쁠 땐 항상 개랑 산책 가는데, 거기가 서울에서 제일 좋다.

‘개랑 함께할 수 있어서’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 거기선 개를 풀어놓을 수 있다. 어떤 시간대엔 개들도 뛰놀 수 있고, 나도 걸어갈 수 있어서 좋다. 개가 뛰어가는 걸 보면 굉장히 시원해서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개가 그렇게 좋나?
아기 때부터 개를 키웠다. 옆에 계속 개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제는 안 키워야지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또 안고 왔다. 개에게 의미 부여는 안 한다. 개랑 사람은 다른 존재다. 의식적으로라도 형이, 오빠가, 이런 말은 쓰지 않는다. 인간의 시각에서 보는 거고, 개 입장은 모른다. 개의 생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둬야 하는 것 같다.

엄태웅이 자신의 사생활을 존중하듯이, 자신이 싫어할 법한 건 개에게도 하지 않는 건가?
어떤 사람은 신발까지 신겨서 데리고 다니지 않나? 자기한테나 그게 사랑이다. 개에게도 사랑일지는 모른다. 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의 개에 대한 애정관이 연인 사이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나빴는데, 혼자 배려하고 혼자 정리하고 혼자 결정하고 그랬다. ‘연애가 왜 그렇게 끝났을까’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떻게 해야 다르게 시작할까’를 생각하는 시점이 있는 것 같다. 모두 자연스럽게 만났고, 만나야 해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왜 항상 끝은 똑같지?’란 고민이 있었다. 상황은 달라도 거의 비슷한 이유로 끝났다.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마치 그런 사람처럼 노력했다. 이제 그런 노력은 안 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섭섭해할까 봐, 너무 좋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게 못했다.

당신의 연기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스스로에 대한 고민의 연장인 것 같다.
내가 많이 이기적이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이나 나를 포기해야 하는 부분은 철저히 그렇다. 그걸 이기적으로 안 느끼고 안 불편해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주 어렸을 땐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타협했거나 속물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서 아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걸까? 어쨌든 지금은 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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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에디터] 책, 음반, IT를 담당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