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고르는 배우, 못 고르는 배우

가만 보면 얄미울 만큼 작품을 잘 고르는 배우가 있다. 한편 참 보는 눈도 없다 싶은 배우도 있다.

원빈의 스타성은 외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형>과 <꼭지>에서 촌스러운 마초였고,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더>는 장동건과 김혜자와 함께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극대화시키는 대신 강한 작품과 캐릭터의 아우라로 들어가면서 스타성과 작품성,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상승시켰다. <아저씨>는 그의 외모와 작품 선택 능력이 일으킬 수 있는 화학작용의 최대치다. 그는 그저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자신의 외모를 통제할 수 있는 배우다. 한편 강동원은 자신의 외모를 원하는 만큼 이용한다. <늑대의 유혹>과 <형사>에서는 여성 팬들을 홀리는 ‘비주얼’을 보여주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어수룩해서 믿고 싶어지는 순수한 남자가 됐다. 그는 잘생긴 배우의 연기 변신에 대한강박 대신 외모가 가진 강점을 작품이 요구하는 만큼 연출한다. <전우치>와 <초능력자>는 그의 출연으로 블록버스터의 무게 위에 여성 팬들을 불러 모으는 화제성을 얹을 수 있었다. 멜로부터 블록버스터까지, 작품성부터 화제성까지. 군 입대 전에 모든 걸 이만큼 해낸 배우는 없었다. 원빈은 <아저씨>를, 강동원은 <의형제>를 선택했지만 송승헌은 <영웅본색>의 리메이크 <무적자>를 찍었다. 일본에서는 <사랑과 영혼>의 리메이크 작품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또래 배우들이 30대 전후에 무게감을 얹을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사이, 그는 <가을동화>로부터 시작된 한류 스타의 그림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고르는 작품마다 한류 흥행과 연관돼 있거나, <에덴의 동쪽>처럼 착하고 바른 캐릭터다. <무적자>에서 약간의 캐릭터 변화가 있었지만 <숙명>처럼 폼 잡는 조폭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모두에게 변신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송승헌은 한 번쯤 과감하게 달라질 필요가 있다. 권상우도 ‘한류’가 발목을 붙잡고 있다. <숙명>에서 보여주듯 적당히 경박한 양아치 연기에는 여전히 권상우만 한 배우가 없다. 하지만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나 <신데렐라맨>처럼, 한류 팬들을 노린 90년대 트렌디 드라마 틀에 스스로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캐릭터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대물>은 좋은 놀이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강명석(<10 ASIA> 기자)

잘 고르는 배우로는 우선 송강호를 꼽는다. 나오는 영화마다 성공. 돈이 안 따르면 대신 명예가 따랐다. <괴물><밀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박쥐> <의형제> 등 그의 출연작은 하나같이 화제작이다. 2007년부터 3년 연속 칸 영화제 레드 카펫까지 밟았다. 남북 문제를 다룬 <의형제>도 그가 있어 햇빛을 본 영화다. 송강호가 “다음 작품은 이런 내용의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수소문하면서 몇 년 묵었던 시나리오가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좀 더 젊은 주자 중엔 원빈이다. <아저씨> 시나리오를 읽고 이정범 감독을 만나려고 아침에 강남의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는 에피소드에서 좋은 작품을 택하는 원빈의 집요함이 엿보인다. 작품을 잘 못 고르는 배우로는 우선 김태희를 꼽을 만하다. 그녀의 영화는 매번 맥을 못 췄다. 1백억원대 블록버스터 <중천>이 적자로 고꾸라졌고, 발랄함을 앞세운 <싸움>도 흥행 참패했다. 올 추석에 개봉한 <그랑프리>도 민망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김태희는 너무 작품을 고르다 결국 안 좋은 영화를 택한다는 게 영화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셈이다. 스타 파워에 비하면 영화 성적표는 꽤나 초라하다. 김명민은 ‘여자 김태희’라 할 수 있다.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 상승의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스크린에서는영락없이 힘을 못쓴다. ‘연기 본좌’라는 별명에 걸맞게 몸을 기꺼이 던지는 영화 속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결국 시나리오 선구안.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오히려 영화를 고르는 감별력을 떨어뜨린다는 의견도 나온다. 글/ 라제기(<한국일보> 기자)

서우의 필모그래피는 여우 같다. 두 작품 <미쓰 홍당무>와 <파주>는 안목이라기보다는 우연이었을 테지만,충무로 신인상을 휩쓸었다. 그 누구보다 연기를 잘하진 않았지만 작품 자체로 돋보이는 선택을 이어갔다. 서우는 계속해서 ‘얄미운’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다. 전도연이 함께한 <하녀>, 문근영을 내세운 <신데렐라 언니>, 그리고 최근엔 유승호가 비장의 키를 내보인 <욕망의 불꽃>까지, 작품 속 캐릭터는 물론,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작품의 파급력까지 착착 들어맞는다. 참 영리한 배우라는 생각이 먼저다. 그리고 원빈이 있다. 로맨스는 하지 않는 남자 배우, 그 점이 오히려 여자들을 애타게 하는 걸까? 아마 여자들은 원빈이 스크린에서 로맨스를 연기할 때까지 계속 그의 영화를 보러 갈지도 모르겠다.

한때 작품성과 흥행성을 골고루 갖추고 착실한 필모그라피를 쌓던 이성재였지만, <신석기 블루스>부터 시작된 무리수는 최근 <꿈은 이루어진다>와 <나탈리>까지 그의 작품 선택에 물음표를 다발로 안기는 중이다. 그는 다소 치우친 장르와 캐릭터를 선택하고, 그마저도 고착화된 코미디에 한정된 경향이 있다. 강혜정은 무리한 변신이 안타까운 배우다. <도마뱀> 이후 <허브>, <우리집에 왜 왔니?> 그리고 최근작 <킬 미>까지 굳이 강혜정이 아니어도 될 만한 영화들에 연이어 출연했다. 묘한 듯 개연성 넘치는 얼굴이 그저 예쁜 얼굴로 변하면서 그녀가 선택한 작품과 캐릭터 역시 평범해진 건 아닐까? <올드보이>의 미도가 주었던 강렬함을 다시 만들 수 있을지, 연극무대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글/ 박혜진(영화사 홍보팀)

정유미와 박해일은 비슷한 카테고리 내에서도 섬세한 결을 포착하고 선택 할 줄 안다. ‘연기변신’이라는 단어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사랑니>와 <옥희의 영화>에서, 정유미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솔직함은 예측 불가와 상통하고, 영화 속 인물과 관객까지 당황하게 만든다. 이 역할이, 혹은 정유미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반음 정도 높은 기이한 하이톤의 목소리는 한계가 있는 역할에서조차 모호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박해일이 <10억>이라는 비교적 관습적인 스릴러에 출연했을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원작의 파워를 이어받지 못했던 <이끼>에서도 박해일이 연기한 해국만은 빛났다. 박해일은 살짝 맛이 간듯한 인물을 연기할 때 의뭉스런 눈이 살아 움직인다. <소년, 천국에 가다> <괴물>에서는 비현실에 리얼리티를 불어넣고, <살인의 추억> <좋지 아니한가>에선 현실에 비일상적인 기운을 덧입혔다. 그런 곳에 꼭 그가 있었다.

김명민이 <내 사랑 내 곁에>나 <파괴된 사나이>에서 보여준 연기는 한 장면씩 떼어놓으면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장편으로 붙었을 때, 그건 일인 경주가 된다. 그는 고문하듯 캐릭터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미션을 완수하는 것처럼 단련한다. 김명민 스스로의 에너지 재분배가 필요한 시점이고, 동시에 김명민이 TV에서 보여준 연기를 감독들이 게으르게 활용한다는 측면도 지적해야 한다. 차승원도 비슷한 딜레마에 봉착했다.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얼굴과 근사한 저음은 자칫 과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걸 눌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 ‘난 미남이 아니야’라고 우기는 캐릭터, 혹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잔혹한 악당으로 연달아 등장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시크릿>에서부터 차승원의 연기는 대체로 지루해졌다. 원래 이미지를 지우는 이미지 전략은, 그야말로 차승원 본인이 홀로 참전하는 이미지 전쟁으로만 남게 된 것 같다. 글/ 김용언(<씨네21> 기자)

황정민은 남자 배우 중 (송강호를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감식안의 소유자로 꼽힌다. 흥행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작품 완성도 면에서 직선이라 해도 좋을 만큼 고르다. 특히 감독의 이름값 대신 시나리오의 만족도를 우선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한 편 이상 함께한 감독이 (아직도!) 없는 대신 작품마다 캐릭터를 변화시키며 장수 비결로 삼는다. <달콤한 인생>의 냉혈한에서 <너는 내 운명>의 순애보 농촌 총각까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현실도피자에서 <그림자 살인>의 조선 명탐정까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시나리오는 그에게 일종의 신용장이다. 이번에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에서는 좀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광역수사대 반장을 연기했다. 역시나 감독이 아니라 캐릭터가 영화로 이끌었다고 밝히는 그다. 한편 전도연은 감독을 더 믿는 쪽이다. <하녀>의 시나리오를 보고 심리가 이해되지 않았어도, 임상수의 연출력을 믿고 따르는 쪽을 택했다. 그 유명한 <해피엔드>의 베드신 공개 후 많은 이들이 과감한 연기가 두렵지 않았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정지우 감독님을 믿었을 뿐이에요.” <피도 눈물도 없이>의 액션 연기나 <밀양>의 아이 잃은 엄마처럼 전도연의 필모그래프에서 유독 여자 배우로서 감당하기 힘든, 그래서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역할이 많은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사실 시나리오를 잘 고르는 배우 분야에서 가장 먼저 호명되던 이는 한석규였다. 스크린 데뷔작 <닥터 봉>에서 <쉬리>에 이르기까지, 속칭 ‘되는 영화’만 잘 고르던 그는<이중간첩> 이후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만큼 시나리오를 못 고르는 배우 쪽으로 기울었다. 한석규는 신인감독의 작품을 집착에 가깝게 선호한다. 바로 여기에 한석규의 성공과 실패의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장윤현(<접속>), 이창동(<초록물고기>), 송능한(<넘버3>), 강제규(<쉬리>) 등 새로운 감성의 신인감독들이 충무로를 이끌던 시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한석규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형 제작사의 등장과 기획영화의 범람 속에서 신인감독들은 기능공의 역할을 맡으며 제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선규는 자신만의 원칙 속에서 그런 변화를 제때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이층의 악당>에 관심이 쏠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손재곤 감독은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이미 흥행력을 검증 받았으며, 무엇보다 신인의 때를 벗은 지 오래다. 더군다나 한석규가 연기한 소설가 사칭의 정체불명 사나이는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절대수를 차지하던 형사 계열의 캐릭터(<텔미썸딩><구토 유발자><눈에는 눈 이에는 이><백야행> 등)와는 거리가 멀다.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의 새로운 도전이다. 글/ 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

하정우는, ‘김기덕 영화’에 출연한 것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어떤 식으로든 잘 가꾸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말했다. 웬만한 남자 배우 중에 <대부> 시리즈 안 좋아하고, 로버트 드 니로며 알 파치노 얘기 안 하는 이가 드물다지만, 그 자신 어떤 배우인지 스스로 알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이는 드물다. 하정우는 언제 알 파치노가 되어야 할지, 언제 짐 캐리가 되어야 할지 감으로 알고 있다. 2007년과 2008년 그는 무수한 영화에 등장하지만, 그 선택엔 어딘가에 휩쓸린 듯한 구석이 없었다. 즉, 자신이 직접 ‘가꾸는’필모그래피를 진행하고 있었다. 고비는 <국가대표>였을까? 그는 잠시 조용하더니, 나홍진의 <황해>로 돌아온다. 그런가 하면 고현정은 작품 선택이 뛰어나다기보다 모든 작품을 이겨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대물>은 짐작 건대, 촬영 전의 잡음도 그렇거니와 그에게 다소 껄끄러운 작품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현정은 여지없이 이겨낸다. 극본이 좋아야 배우도 성공한다는 얘기는 유독 고현정에겐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그건 소신을 뛰어넘는 배짱 때문이다. 김해숙은 진부하면서 어울리는 캐릭터와 뜻밖이면서 너무 어울리는 캐릭터를 오가며 제대로 파고든다. 영화<박쥐>의 김해숙과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김해숙은 연기 변신이니 이미지 변신이니 하는 말이 꽤나 허무한 소린라는 걸 몸소 증명한다.

작품 선택에 생기는 물음표는 미남 미녀 배우에게 훨씬 잦다. 모든 걸 얼굴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그 얼굴로 인해 망설이는 부분도 생기는 것이다. 빛나는 매력이자 동시에 한계라는 이중성. 대표적으로는 장동건과 정우성이 그렇다. 지울 수 없는 얼굴로, 뭘 해도 좋을 청춘이 지나면, 이제 얼굴에서 뭔가 책임을 져야 하는 시간이 온다. 그때 발견하려는 건 대개 강인한 남자의 고독이다. 출연작 중에 유독 전쟁영화나 무협영화가 많아지는 이유가 거기 있다. 분장 또한 고스란히 드러내기보다는 긴 머리나 치렁치렁한 시대 의상으로 뭔가를 지우려고 한다. 돌파구는 작품이 아니라 연기다. ‘미모의 강도’가 좀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장혁이 <추노>에서 했던 것을 미루어 생각하면 답이 보일 것이다. 에디터/ 장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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