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절식, 단식, 금식. 그게 ‘패셔너블한’ 남자의 자격이라고?

시절은 바야흐로 남자들에게서 고구마와 옥수수 중 어느 쪽의 열량이 높은지 가르침을 받는 때다. 패션 관련 일을 하는 남자를 만날 땐 종종 닭튀김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하고 감자튀김과 설탕을 입힌 도넛을 함께 먹는 여자도 우주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사설 강의를 듣는다. 근거가 정확하고 논조가 확실해서 듣다 보면 얘가 혹시 보건영양학과 병태영양학을 동시에 수학한 영양학자이며 곧 도쿠시마 대학에 초빙되는 건 아닌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가끔씩, 너무 광폭한 일주일을 보낸 금요일 밤엔 피자 위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은 후에 디저트로 버터케이크와 바닐라 하겐다즈 한 파인트를 해치우고 싶어진다. 그렇게 먹고 취한 채 집에 가서 씻지도 않고 자고 싶다. 이럴 때 영양학자가 모임에 끼어 있으면 입이 안 떨어진다. 시무룩해져서 좋아하는 가케아게 덮밥이나 좀 먹을까 하면 영양학자께서 촉새처럼 끼어들어, 기어이 탄수화물을 먹을 거면 오차즈케를 고르라고 훈수를 둔다. 게다가 “너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선이 예전 같지 않아”라거나 “아까 저쪽에서 걸어오는 걸 봤는데 움직임이 둔탁해졌어. 분명히 살쪘어”같은 집요한 말을 듣다 보면 머리가 편육이 될 것만 같다.

하도 김이 올라서. 아까 먹고 또 먹고 되는대로 줄곧 먹어대고 배 두드리고 앉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뭘 먹을 때마다 살이 찔까 살 떨리는 것도 무진장 곤란하다. 빼빼 마른 게 아름다운 거란 공식은 아프리카 반투 인종에게서도 들은 바 없다. 게다가 젊은 남자의 생활 지침이 언제부터 오늘은 절식, 내일은 단식, 모레는 금식이 됐을까. 얼마 전 뉴욕의 쇼 장 앞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테니스 공만 한 엉덩이를 반쯤 내놓고 청바지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남자와 평생을 풀뿌리와 나무등걸만 깎아 먹고 산 듯 비현실적으로 초연한 몸의 남자가 ‘비쥬’를 하는 광경은 팀 버튼 영화 속 한 신 같았다. 그들 자신의 기준으로는 그게 ‘패셔너블한 보디 핏’일 테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궁핍과 고난의 세레나데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톰 브라운을 만났다. 예의 회색 수트를 입고 탱크 같은 윙팁을 신은 채 걸어오는 그를 보니 야차들 사이에서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청했다. 항상 비슷한 땅콩 같은 헤어스타일,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윗옷과 튼튼한 다리 때문에 그를 만나면 실제 키보다 늘 한 뼘쯤 더 커 보인다.

막 신호가 바뀌려는 건널목에 선 채 그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고, 이제부터 샴페인과 버거를 잔뜩 먹을 거라고 말하곤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톰 브라운의 표식이었다. 그는 알렉산더 왕과 올리비에 데스켄스가 피날레 무대에 살랑살랑 걸어와서 방글방글 웃을 때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싱긋 웃곤 하니까. 스시와 토푸만 찾는 뉴요커들 사이에서 오후 네 시에 버거와 샴페인 얘기를 들으니 복음이 따로 없었다. 당장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서 칠리를 얹은 핫도그와 쟁반 만한 버거를 먹으면서 톰 브라운의 어깨와 허벅지를 축복했다. 살짝 익힌 패티를 꽉 씹을 땐 강 같은 평화가 찾아왔음은 물론이다. 사진은 2010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목전에 둔 오후, 쇼 장에서의 톰 브라운이다. 옥스퍼드 셔츠와 플란넬 타이를 매고 아가일 카디건을 짧게 입은 다음에 울 수트로 마무리했다.

수트를 입은 옆 선이 기둥처럼 단단하다. 오후에 버거와 샴페인을 양껏 먹어도 벤츠에서 내리는 대신 뉴욕 한복판을 걸어 다니면 칼로리는 잉여지방이 아닌 근육으로 남는다. 같은 이치로, 양파튀김 덮밥 대신 오차즈케만 찾는다고 살이 빠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마른 몸이 무작정 괜찮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금요일 밤의 방만은 암묵적인 합의로 통하는 현대의 쾌락이다. 그것까지 포기하면서 굳이 인간이 아닌 야차로 살려는 심리? 도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