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소개팅이 곧바로 섹스로 이어진다는 말은 결코 믿지 않았다. 이 여자를 만나기 전까진….

책방이 있던 자리엔 통유리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10분 먼저 도착해 지하철 출구 쪽을 바라보고 섰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감우성과 엄정화가 이렇게 만나 밥 먹고, 술 마시고, 섹스까지 했었다. 다 거짓말. 차라리 ‘인터넷 즉석 만남’ 같은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소개팅에서 어떻게 그럴까. 통유리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커피값을 지불하고 그들은 잠시 비평가가 된다. 남자가 별로네, 여자가 예쁘네. 그러거나 말거나 공중에 떠있는 지하철역에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기다리는 이들의 움직임도 분주했다. 통유리를 거울 삼아 머리를 매만지는 남자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치는 여자. 11월의 어느 주말, 번화가의 흔한 풍경이었다.

여자는 늦었다. 꼬불꼬불한 머리엔 물기가 남아 있었고, 어쩐지 화장은 좀 엉성했다. 출구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만남을 주선한 친구에게 사진을 받아낸 터라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두리번거리며 여자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해요, 차가 막혀서.”

‘168에 48’은 아니었지만, 제법 비율이 좋은 여자였다. 얼굴이 작은 건지, 파우치가 큰 건지 헷갈릴 만큼 얼굴도, 손도, 발도 작았다. 그런 채 다리가 훌쩍 긴 건, 좀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지하철 타고 오셨잖아요” 대신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라는 말로 호의를 대신했다. 도로는 여전히 한산했다.

예약해둔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카르보나라와 안초비 오일 파스타를 주문했다. 소개팅에서 파스타를 먹는 건 “당신이 여자로 보이긴 하는데, 제 취향을 권할 만큼 좋은진 잘 모르겠어요” 정도의 함의일까. 여자는 끈적이는 카르보나라를 돌돌 말아 숟가락 위에 올렸다. 한 입 한 입 고개를 숙일 때마다 선글라스를 걸쳐둔 브이넥 사이로 굴곡이 드러났다. 입술 군데군데 묻은 하얀 크림까지, 의도적인 도발은 아니었을 텐데. 어색함에 스파게티 면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행히 매끈한 오일 파스타엔 탄력이 있었고, 툭 끊기는 소리와 함께 눈이 마주쳤다. “친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사실 예전에 사진 작업하신 거 본 적 있어요.”

여자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사진가였다. 꽤 흥미로웠던 사진의 감도를 칭찬하기보다, 저 작은 몸으로 조명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하는 딱한 마음이 앞섰다.

“모델 잔뜩 나오는 화보 촬영장 가보면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던데. 혼자 일하면서 힘에 부치거나 그렇진 않아요?”

“말도 마세요. 분위기 풀어주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뭐 말이 많아지죠. ‘좋아!’ 라든가 ‘한 번만 더!’ 같은 거.”

예상 밖의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좋아”와 “한 번 더”가 귀에 밟혔다. 엉뚱하게도 그 말 한마디에 여자의 알몸이 궁금해졌다. 과감한 말을 부끄럼 없이 하는 여자를 정신이 건강해 보인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건 꽤 오래된 취향이었다. 섹스할 때도 여자가 남자의 셔츠 단추 몇 개쯤 떨어뜨리고, 목에 키스 마크를 남기는 정도의 과감함은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단추야 새로 달면 그만이고, 옷장엔 깃이 높은 셔츠가 많이 있으니까. 따뜻한 이불 안에서 한 팔에 허리가 쏙 들어오는 당찬 여자를 안고 있는 상상. 파스타가 줄어들 때마다, 선글라스의 무게에 눌린 여자의 브이넥이 점점 내려갔다.

“술 마셔요 우리. 딴 거 말고 소주.”

파스타를 그릇 가장자리부터 돌돌 말아 가지런히 숟가락 위에 올려놓던 여자는, 신용카드 영수증을 받기도 전에 택시를 잡고 있었다. 첫날부터 소주라니. 아주 좋거나, 정말 싫거나.

횟집엔 형광등이 눈부실 정도로 작렬했다. 식당에서보다 여자의 얼굴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두께가 얇은 테이블,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 눈동자만 내리면 여자의 긴 다리였다. 11월이었지만 짧은 바지를 입었고, 스타킹도 신지 않았다. 형광등의 열기에 술기운을 더한 실내는 무척이나 더웠다. 여자가 척추를 꼿꼿이 세우며 재킷을 벗었다. 좁은 2인용 테이블엔 서로의 눈길을 피할 구석이 없었다. 또 다시 눈이 마주쳤고, 여자가 물었다.

“오늘 토요일 밤인데 뭐 해요?”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

어떤 ‘예감’이 있는 날은 좀 다른 것들을 챙겨 집을 나선다. 밤을 샐지 모르니 면도기도 챙기고, 콘돔과 콘택트렌즈도 가방 깊숙이 넣는다. 오늘 콘돔을 놓고 나온 건 일종의 다짐이자 도박이었다. 당연히 밤 시간도 비워놓지 않았다. 소개팅에서 만날 여자와는 네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 약속 있구나. 몇 시쯤 갈 거예요?”

“열두 시 쯤 약속했어요. 아직 열 시 반밖에 안 됐는데. 집에 가고 싶은 거예요, 벌써?”

맘에도 없는 소리. 여자가 웃으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말은 몸이 대신했다. 무릎과 무릎이 가까이 닿았다. 둘 다 반바지를 입었다면, 맨살과 맨살이 닿았겠지. 아쉽게도, 11월에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회 한 접시에 소주 세 병을 마셨다. 주량은 이미 예전에 넘겼다. 이러단 정말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와 “어리고 착한 애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잘해줘”라고 말하던 친구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우리 남은 술만 마시고 가요. 회도 다 먹었네.”

“아저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전어회 ‘소짜’ 한 접시 더요!”

여자는 대답은커녕 주문을 했다. 계산할 것도 아니면서.

“좀 더 마셔요. 나같이 예쁜 여자랑 술마시는데 가고 싶어요?”

“그래서 가야 돼요.”

무릎이 닿던 지점엔 종아리가 포개져있었다. 여자가 양팔을 포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얼굴과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다. 딱 테이블의 중간까지 여자의 몸이 넘어와 있었다. 점점 가팔라지는 몸의 각도에 선글라스가 식탁에 툭 떨어졌다. 볼이 발개진 여자의 입에 전어회를 한 점 집어 건넸다. 의미 없는 방어였다. 먹으라고 준 건데, 여자는 젓가락을 물고 놓질 않았다. 대신 고개를 뒤로 젖혀 젓가락을 당겼다. 당긴 건 팔이었으나, 따라가는 건 왜 내 얼굴일까. 혀가 입 안에서 젓가락 대신 돌았다. 시큼한 초장 맛.

새로 주문한 전어회를 다 비웠을 때, 시계는 열한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헤어져야 할 시간. 이미 그녀의 손은 내 허벅지 안쪽에 있었고, 난 그녀의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이젠 안녕.

“가요, 우리. 늦었다.”

“정말 갈 거예요?”

“술도 다 마셨네. 일단 나가요.”

어둑어둑한 골목엔 사람이 없었다. 작별 키스라 생각하고 입술을 다시 포갰다. 그러는 와중에 여자가 게걸음을 걸었다. 걸으면서 하는 키스라니, 잠깐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가로등이 꺼지면 멈춰 서 서로의 몸을 탐하다, 켜지면 또다시 걸었다. 걷는 동안에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가 힐 뒤축을 제식하듯이 땅바닥에 구르며 발걸음을 멈춰 섰다.

“저, 여기 살아요.”

혼자 산단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알았다고 해도 “라면 먹고 가도 돼요?” 같은 수작을 걸려던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서는 건, 내 사랑하는 친구도 원치 않겠지. 어쩌면 여자의 자존심 문제일지도 몰라. 문턱을 하나 넘어서자 덜컥 고삐가 풀렸다. 앞에 후크가 달린 검정색 브래지어를 끄르고, 얼굴을 묻었다. 적당한 크기였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대비되는 분홍색 유두는 부풀어 있었다.

“저, 잠깐만요.”

“네?”

“친구한테… 얘기 안 할 거죠?”

대답 대신 여자의 바지와 속옷을 함께 내렸다. 여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몸 위에 올라탄 여자는 가볍고 미끄러웠다. 온전히 몸을 맞댔을 땐, “철썩”이 아니라 “찰싹”하는 소리가 났다. 피부가 건강한 여자의 몸과 부딪힐 땐 나는 소리.

“잠깐. 뭐 오는 거 같은데?”

서로의 몸이 숫자를 그리고 있을 때, 여자와 내 전화벨이 번갈아 울렸다. 아래 어딘가에 있던 여자의 고개가 내 얼굴 위로 뾰족이 올라왔다. 똑같은 이름과 번호가, 두 개의 휴대폰에서 깜빡이다 꺼지고 다시 깜빡이다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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