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글자와 글씨

2010.12.29이충걸

E.L.최근, 눈이 더 나빠지면서 집중력이 말할 수 없이 떨어졌다. 글자의 윤곽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다 흐름을 놓치면 그걸로 책읽기는 끝이었다. 어떤 때 글자들은 꼭 키릴 문자 같았다. 아니면 크로아티아 버전으로 낸 책들? 외지를 펼치면 A는 이젤 같고, P는 버클 같고, Z는 뱀 같았다. 사과나 귤같이 친근한 개체들이 갑자기 처음 보는 열대과일처럼 이상해 보일 때도 있었고, 내가 손에 쥔 게 자두인지 자몽이나 토마토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게 단지 시력의 문제였을까.

교통 표지판과 상표, 설명서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 인생은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무작정 읽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낱말 하나가 아닌 글자의 묶음을 인식하기 곤란해지자 독해능력을 터득하는 아이의 과정을 새로 겪어야 할 것 같았다.

… 어느 날의 편집실은 친근하고도 낯설었다. 10년 동안 <지큐>를 만들어온 데가 박물관에서나 보는 모형 서재나 영화 세트장 같았다. 내 글씨가 갈겨진 포스트잇 메모들을 이상한 기분으로 쳐다보면서 내년 초엔 라식을 꼭 다시 해야지, 작정할 때 글자 주변이 살짝 흔들리면서 새 힌트가 번쩍 나타났다. 그리고 트윗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기질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광대하게 재잘거리며 튀어나오는 현대 문화의 격류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다양한 신호와 음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길은 그런 외부 자극에 얼마나 재빨리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평생을 싫다 싫다,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과묵한 냉소와 두껍게 닫힌 입술엔 더 몸이 뒤틀렸다. 그렇지 않다면 신념이라는 정차장에 계속 서 있는 편이 더 낫겠지.

새것이 화두가 되는 시기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출판물은 더 이상 종이에 프린트된 글을 의미하지 않는다. 월급은 더 이상 봉투에 담겨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 역시, 속삭임과 안식 말고도 섹스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보를 나눠 서로를 태그한 결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건축된다는 식의 심오함이나 지식의 확대는 잘 모르겠는 채, 유치원 책상 앞에 가득 앉은 청중이자 공중 앞에서 무해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언어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일 텐데, 소통을 위해 반드시 완전한 언어를 구사할 필요는 없고, 단어를 의미 있게 사용하려는 건 의미 없는 의도라는 걸 깨닫는다. 산문을 휘젓고 운율을 망가뜨리는 건 아무 상관없다는 걸.

글을 읽는다는 건 먼저 글자 하나하나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종이에 쓰인 글은 글자들의 소리뿐만 아니라 의미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단어가 의미를 잃으면 말의 힘도 사라지지만, 뜻이 더해지면 의미가 강화된다. 의미가 늘어나면 쓰임도 늘어난다. 마침표 하나 때문에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고, 느낌표 하나가 움직임의 동기를 표현하는 건 그 때문이다. 결국 트윗은 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좋은 글은 예술이 가진 심장의 목적, 텍스트 뒤 의식적인 아젠다 어딘가에 존재한다. 장르가 어떻든 좋은 글을 쓰는 데는 영원히 중요하고 신성한 뭔가가 있다. 재능은 아니다. 화려하게 번쩍이는 재능조차 큰 관련은 없다. 그건 단지 수단. 잘 써지지 않는 펜 대신 매끄러운 펜을 가진 것과 같다. 어쨌든, 지금 우리를 이루는 문자나 언어의 환각 또는 글자의 유령,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숫자와 음표들은, 물리적으로는 다르지만 우리와 점점 불가분해졌다. 하지만, 언어의 길이는 계속 줄어들 뿐이다. 구글은 지난 반세기 동안 2백만 개가 넘는 단어가 원래의 쓰임보다 줄여 사용되었다고 타전했다.

그렇다면 상상력, 언어, 자율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을 매일 감소시키는 문화 속에서 복잡성은 하나의 선물인 셈이다. 손실과 불안, 어두워지는 마음, 스스로를 겨냥한 의심, 일곱 방향에서 빛을 뿜어내는 명사, 두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미궁에 빠진 문장들, 모든 단어마다 매달린 각주의 복잡함 앞에선 다이빙 순서를 기다리는 소년처럼 어떤 반발과 부딪힌다. 어쩌다 로저 페더러의 엄청난 서브처럼, 글자들이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네트에 걸리지 않고 바로 내리꽂힐 때, 그렇게 서로에게 완전히 속해버릴 땐 막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슬픔은 글이 가진 힘을 증명하고, 글쓴이의 영혼이 가진 부드러움이 나에게 끼치는 온화한 강요를 증명하고, 이윽고 단어 자체가 가지는 광채를 증명한다.

결국 글을 사랑하는 일은 일생 가장 위대한 로맨스 중 하나다. 한 사람이 지금 속한 세상의 모든 뉘앙스를 배우는 그런 사랑인 것이다.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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