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김민희

김민희와 함께 샴페인과 떡볶이를 먹었다.

보풀이 난 남의 모자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쓰고 소파에 드러누운 채여도, 김민희는 김민희식으로 예쁘다.
보풀이 난 남의 모자를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쓰고 소파에 드러누운 채여도, 김민희는 김민희식으로 예쁘다.

우리는 우연히 세 번 만났다. 그녀와 내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어쩌다 보니 바로 곁에 앉게 된 게 처음이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1월의 저녁, 김민희는 파스타 가락을 호로록 말아 먹으면서 “나는 주문 운이 없어”라고 투정했다. 그러곤 조개껍데기 속에서 살을 최대한 완전하게 떼어내려고 조심조심하고 있는 내게, 그건 참 맛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진심 같아서 “먹어볼래요?” 했더니 고개를 지나치게 여러 번 끄덕였는데 그때 웃는 눈 모양이 꼭 땅콩 같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태리 레스토랑 문 앞에서, 술이 모자란 사람들과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 간의 어정쩡한 상의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미니 자동차에 앉아서 창밖으로 고개만 뺀 채, 엄마 계모임에 따라온 여자애처럼 종종 하품을 했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 후 카페에서 한 번, 골목의 언덕에서 한 번 김민희를 더 만났다. 행사나 파티, 시사회나 촬영장처럼 공식적인 장소가 아닌 ‘동네의 김민희’일 때 그녀는 더 예뻤다. 볼 때마다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가끔 재미있고 얼핏 슬프고 조금쯤 지루해 보였다. 그리고 김민희 곁의 사람들은 누구든 다 활짝 웃고 있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는 사람들처럼. 섬유유연제처럼 부드럽다가도, 한 번 찍히면 끝장을 내버릴 것도 같은 깐깐함이 ‘아이러니하게’ 합의를 이루는 여자, 어떤 식으로든 보편이라든지 평범하고는 거리가 먼, 공격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소녀. ‘시크’나 ‘쿨’ 따위의 물파스 이름 같은 수식어로는 김민희를 다 말할 수 없다. 밸런타인 데이,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고백을 세공하느라 바쁜 날. 우리는 목련 나무를 심은 마당이 있는 그녀의 집에서 만났다. 최근에 새로 바꾼 거친 사륜구동 차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고 일본식으로 작은 돌을 조밀하게 깔아둔 마당에 선 채 짐작이 가는 창을 쳐다봤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커튼을 열어놨네요. 햇빛을 좋아해요. 요즘 내 마음을 제일 많이 움직이는 게 빛이에요. 오전의 빛이 다르고 오후가 또 다르잖아요. 네 시쯤의 빛이 제일 예뻐요. 우리 집이 남향이라 해가 많이 들어요. 눈부셔하면서도 마루에 앉아 있고 그래요.

집이 심심하네. 휑하다고 해야 하나. 이럴 줄 몰랐는데. 예쁘장하게 꾸미는 거 안 좋아해요. 소품 많이 사고 아기자기한 거 갖다 놓고 그런 거 별로예요. 꽃보다 잎사귀만 있는 식물 화분이 더 좋고, 커튼이나 침구도 무늬 없는 것만 써요. 사과 먹을래요?

뭘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사과를 잡고 있는 건가? 그릇을 좀 찾느라구요. 치즈도 먹을래요? 샴페인은? 긴 잔이 좋아요 짧은 잔이 좋아요? 샴페인 잔이 따로 없어서, 와인 잔은 많은데. 뚱뚱한 잔에 줄까요?

아무 잔에나 많이만 줘요. 사과를 작게 썰었네요? 예쁘장한 거 안 좋아한다더니. 이런 디스플레이는 또 신경 써요. 호두랑 건포도를 여기 놔야겠다. 잠깐 있어요. 난 내가 결혼하면 살림을 참 잘할 것 같아요. 샴페인이 아직 덜 차갑다. 그래도 맛있어. 밖은 환한데 집에서 술 마시니까 좋죠. 요즘은 집에 있는 게 제일 편해요. 옛날엔 파티도 많이 다니고 사람도 매일 만나고 그런 게 즐거웠는데, 막 화려한 것 같고. 언제부턴가 그게 시들해졌어요. 친구들을 삼일 만나면 이제 하루쯤은 집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지. 주부들이 시간 없다고 하면 다들 안 믿잖아요. 근데 나는 그 마음을 알겠어요.

술 좋아해요? 좋아해요. 레드 와인 달지 않은 거. 조금씩 매일 마시는데 의견들이 분분해요. 그게 알코올중독 초기 단계라는 애들도 있고 혈액순환에 좋다는 애들도 있고. 와, 빨리 마시네요. 술 되게 좋아하시나 보다. 음악 끝났다. 다른 거 틀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