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 배우의 길

주연급 배우지만, 한발 물러서 있다. 2인자 배우라고 불린다. 2인자 배우 세 명의 걸어온 길과 걸어야 할 길을 살펴봤다. 1인자 쪽으로 나 있는 길만은 아니었다.

주상욱

강명석( 편집장)
실장님을 연기하기 위해 방송 3사가 개발한 로봇 같다. 어떤 작품에서든 재벌 2세인 실장, 또는 이사를 벗어난 적이 없다. 4년 전 <깍두기>와 요즘의 <파라다이스 목장>을 보면 한 번 연기한 걸 CG로 합성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연기력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그를 출연시키는 이유가 연기보다는 잘생기고 반듯한 이미지를 원해서고, 그 역시 ‘착한 실장님’과 ‘냉정한 실장님’을 번갈아 하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앞으로 1~2년간은 실장님 업계의 1등으로 활동할 것이고, 이현우에 이은 실장님 업계의 ‘레전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같은 실장님이라도 <자이언트>처럼 선악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가끔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성장 여지가 있는 배우인데, 들어오는 배역만 꾸준히 맡는 듯해 아쉽다.

김교석(TV 평론가)
잘나가는 ‘실장님’을 떠올리면, 열 커트 안에서 주상욱의 얼굴이 스친다. 반듯하다 못해 날카로운 인상. 엄친아의 전형과 같지만 뭔가 싸늘하고 비릿한 눈빛. 일에선 빈틈없이 완벽하게 해낼 것 같은 젊은 사업가. 주상욱은 자신의 이미지를 브랜드로 일궈낸 배우다. <자이언트>에서 보여준 올백머리와 욕망을 향한 몸부림은 바로 주상욱 캐릭터의 총아다. 패배나 실패는 들어본 적 없고, 1등을 놓쳐본 적도, 원하는 걸 못해본 적도 없다. 항상 성과와 인정이 뒤따랐고, 거만했다. 그런데 그 순탄대로와 같던 인생에 ‘걸림돌’을 만나면서 구김이 생긴다. 바로 그 뒤틀린 자존심으로 인해 인정욕구와 열등감에 휩싸이는 인물. 주상욱의 전문 분야다. 악역이 아닌 <파라다이스 목장>에서조차, 빈틈없던 완벽남이 흔들리면서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한다.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기보다 한 우물을 제대로 팠으면 하는 배우가 바로 그다. 빈정대는 게 아니라, 그가 악역(혹은 차가운) 이미지를 굳히고, 나중에 알렉 볼드윈처럼 망가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정우영 (에디터)
주상욱의 얼굴에서 ‘추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물방울에서 폭포수를 유추해내는 것만큼 어렵다. 추문은 어떤 의미에서 긍정적이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선택이, 사회적으로는 추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주상욱의 연기가 도달한 극점에 ‘추문’이 아니라 ‘분열증’이 자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얼굴은 헝클어진 순간조차 부와 명예와 성공을 말한다. 자연히 주상욱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스스로의 욕망보단 사회적인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주상욱이 연기하는 2인자 캐릭터의 숙명은 스스로의 욕망은 꾹 눌러두다가, 마침내 파멸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를 선택한 제작진들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 ‘분열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상욱이 자초한 바도 있다. 주상욱은 어느 드라마에서, 누구와 연기하고 있어도 주상욱이다. 타고난 외모의 존재감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존재감이 있다는 건 긍정적인데, 존재감’만’ 있다. 존재감만을 내세울수록 추문과는 멀어진다. 그러나 추문 없이는, 살아 숨쉬는 캐릭터를 보여줄 기회도 없다

서도영

<친구-우리들의 전설>에서는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의지를 가진 남자였다. <야차>에서는 야망이 큰 무사였다. <가시나무새>에선 사람 좋은 영화감독이다. 다만, 모든 작품에서‘ 2인자’다. 주인공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하지만, 맡기는 배역마다 나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다는 얘기. <친구-우리들의 전설>에서 시대의 상처를 안은 지식인 연기는 주목할 만했다. 그럼에도 데뷔작이나 다름없던 <봄의 왈츠>가 처음이자 마지막 주연작이 된 건 제작자와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못 잡고 있다는 의미다. <천하무적 이평강>처럼 왜 출연했나 싶을 만큼 경력을 갉아먹는 작품 말고, 작은 배역이라도 인상적인 작품에 출연할 필요가 있다.

<봄의 왈츠>의 남자 주연을 맡으며 파격적으로 등장한 그는 기대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샤이니의 민호 닮은꼴로 조금 유명할 뿐이다. <봄의 왈츠>에서 같이 데뷔한 한효주가 삼성전자의 간판 모델로 활동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너무 잘생기지도 않았고, 특별한 아우라도 없다. <친구>의 성택처럼 차분하고 여린 이미지에 머물러왔다. 그런 그가 <야차>를 통해 나약해 보이는 한편 광기어린 역을 맡아 스스로의 배우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외모가 빚은 캐릭터가 아닌 연기로 만든 배우 서도영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가시나무새>에서 다시‘ 키다리 아저씨’같은 역할로 돌아왔지만, 그의 존재감은 따스함보다는 <야차>에서와 같이 뜨거울 때 빛난다. 동어반복은 여기까지만 했으면 한다.

서도영은 <가시나무새>에서 바르고 헌신적인 최강우를 연기한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표시해보려고 해도 나타나지 않는 게, 웃기만 하면 얼굴에 나타났다. 무욕하고 무던한 사람이라는 인상. <야차>에서 형의 여자에 대한 욕망과 야망을 실행하는 냉혈한 이백결은 거기 없었다. 그러나 상기해보면 서도영은 늘 방향을 바꿨다. 그것을 연기 욕심이라고 보기 뭣하다는 데, 서도영의 방황에 담긴 의미가 있다. 시나리오 도착 순서가 뒤쪽일거란 걸 감안해도, 자신의 눈앞에 떨어진 작품은 외면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까지 서도영의 출연작을 보면 그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 어디에서도 기본 이상은 해내서, 큰 흠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최강우의 시선이 아니라 이백결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종혁


2010년 1월부터 <추노>-<결혼해주세요>-<강력반>에 쉬지 않고 출연 중이다. 다시 말해 KBS 공무원. 다만 능력도 있고 개성도 있는 공무원이다. 더 성공하기 위해 악행도 마다 않던 <추노>의 황철웅, <아줌마>의 장진구의 아들이라 할 만한 <결혼해주세요>의 찌질한 남편은 모두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심지어 <천사의 유혹>처럼 단역으로 출연할 때도 평소 이미지와 달리 찌질하고 어설픈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던 최철호가 불미스러운 일로 사라진 상황에서 능력 좋은 공무원으로 찾는 곳이 많을 듯. 다만 아직 좀 더 보여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말죽거리 잔혹사><추노>의 냉혈한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종혁의 모습이다. 그것도 꽤 스트레스가 많아 보이는 인물인데, 그 스트레스를 폭력을 앞세운 남성성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느끼하지는 않지만, 항상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재수 없는 마초 캐릭터. 이는 최민수도, 장동직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특색 있는 마초 연기도 이종혁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가 가진 남성성은 <결혼해주세요>에서처럼 치졸한 남자의 모습과 수더분한 모습을 함께 보여주면서 완성된다. 이종혁의 눈빛에는 서늘함과 서글함, 서글픔이 함께 있다. 힘주면 비열해지고, 웃으면 서글해지고, 찡그리면 서글프다. 그는 단편적인 남성성이 아닌 남자를 연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이종혁은 매우 성실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왔음에도, 익명적으로 보인다. 2인자이자 악역을 주로 맡아왔기 때문일까? 원톱 주연을 맡을 만큼 특출한 외모가 아닌 탓일까? 그에게는 일종의 평균이 있어서다. 한쪽으로 기울면 모종의 악의를 가진 2인자가 되고, 또 한쪽으로 치우치면 준수한 외모 뒤에 뭔가 있을 것 같은 찌질한 남성이다. 이종혁은 1인자 쪽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스스로의 장점과 한계 사이에서, 백지 같은 배우와 자의식 강한 배우 사이에서, 평균으로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안전했지만, 그처럼 2인자 역할을 잘해내는 사람도 드물었기에, 미덕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곳조차도 위기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익명성에 기대는 연기, 즉 ‘이종혁 이니까’ 잘 할 수 있었다는 인정이 없는 상황에서, 앞일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