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ing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2011.05.09정우영

그녀는 사랑도 없이, 비밀도 없이, 다른 남자들과 잤다.

지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지만, 교정은 늘 봄이었다. 그러나 봄은 교실 바깥에서 찬란했다. Y는 충실히 봄의 요구에 따랐다. 4년 동안 교실은 마지못해 들어가는 곳이었다. 수업은 뒷전인 채 4년 내내 음악만 듣고, 미풍조차 없는 인생과 안 어울리는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다닌 남자의 이야기는 분명 기시감이 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엔 뜬금없이 태풍이 몰아치는 부분이 있다. Y는 동경 명문 대학의 경제학과 입학이라는 간판을 스무 살에 달았다. 사실 간판만 그럴 뿐, 입구가 아니라 출구였지만, 그 길로 진짜 입구를 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음악 동아리였다. J는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미모의 동아리 2년 선배였다. 2000년대 초, 일본은 사상 두 번째의 실업난에 직면해 있었다. J는 동아리가 입구라고 생각지 않았다. CEO는 당치도 않았다. 연예인이 되는 법을 알고 싶었지만, 그런 건 경영학과에서 알려주지 않았다.

짝사랑이라는 말에는 비참이 없어서, 음악 이야기 외에는 그녀와 말도 섞어본 적 없으면서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Y는 J를 사랑했다. 니나 시몬만이 그의 비참을 알았다. 샘 쿡은 모르는 것이었다. 마른 사람은. 내일은 고백할 거라는 다짐은 늘 다음 날 자기 전에 이를 닦으면서 다시 했다. 니나 시몬을 들으면서 울다 보면, 다른 인생도 다 그럴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그녀가 졸업하기 전까지, “요즘은 뭐 들어요?” 라는 질문이 다였다. ‘퍼피’라고 대답하면, 음악관과 레코드는 굽히지 않는 거라는 음악 마니아의 염결성으로 “그래요” 하고 대화는 끝났다. ‘에고 라핑’을 듣는다고 했을 땐 에고 라핑도 좋지만 진짜 쇼와 가요를 한 번 들어봐야 한다는 열변이 되고 “들어볼게” 라는 답만 들었다. 그녀가 학교를 떠나자, 시작도 못해본 사랑이 끝났다. Y는 동아리 방에서도 이어폰을 꼈다.

장기 실업난으로 졸업 후 선배고 동기고 방 안에 틀어박히기 시작할 때, Y는 출근했다. 음악 잡지 에디터였다. 대중적인 잡지는 아니었지만, 그 전문성으로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꽤 명성이 있는 잡지였다. 일반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보수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지금껏 거의 모든 수입을 음반에 쏟아온 마당에, 매달 그에게 쏟아지는 12인치 싱글 대부분을 친구들에게 버리는 생활은 호사였다. 여전히 니나 시몬의 비참을 생각하면서도, 동아리 졸업생 모임에 배를 내밀고 참석할 수 있게 됐다. J는 보이지 않았다. 한 1년 전부터 잘 안 나온다고 주변에서 일렀다. 카바레 클럽에서 일한다, 성인만화 출판사에 들어갔다, 남자친구가 사채업자다, 하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무슨 큰 흠이라는 투는 아니었다. 그들도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보다 걱정하게 된 사람은 그였다. 졸업생 모임에 배를 내밀 수 있는 용기는 그녀에게 전화할 수 있는 용기와 유사했다.

“요즘은 뭐 들어요?”

“옛날에 듣던 것만. 넌 음악 잡지 에디터 안 됐으면 어쩔 뻔했니?”

“안 그랬으면 대기업 들어갔을걸요?”

“에디터가 어울려.”

“뭐 하고 지내요?”

“아르바이트지 뭐. 편의점도 하다가, 출판사 계약직도 하다가.”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은 아마도 일본에서 가장 매출이 높은 곳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이 세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어.”

메일로 시답잖은 농담을 보내고, 저녁에 만나서 맥주도 마셨다. 음악 얘기 말고 다른 얘기도 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이 많은 줄 몰랐다. 배우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고, 누군가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라고 하자, 그녀와 자신 사이에 다리 하나가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소프트웨어로 직접 만든 음악을 들려줄 때는 다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길이 난 곳으로 뭔가가 다니는 건 인지상정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함께 교토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한 번도 다시 가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교토란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남녀가 떠나는 여행은 모종의 사건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여자가 앞서 제안한 예는 모른다. 그녀가 이런 제안을 할 때까지 뜸 들여온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할수록 제대로 된 고백인 것 같아, 유치한 계획을 짰다. 게이래즈의 ‘It’s Hard to Confess’를 MP3 플레이어에 담고, 휴대용 스피커를 챙겼다. 함께 노래를 듣다가, 그 노래 가사라면서 준비해간 편지를 읽을 셈이었다.

낮에는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나서는 맥주를 손에 쥐었다. 여관에 도착해서 그녀가 나중에 씻으러 들어가고, 맥주를 들이키면서 다시 한번 편지를 수정했다. 이전보다 더 바짝 긴장이 됐다. 노래는 플레이 리스트의 17번째에 놓았다. 너무 취했을 때도, 너무 어색한 분위기일 때도 안 됐다. 그녀가 나오고 다다미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Y는 벌써 맥주 두 캔을 비운 상태였다. 음악은 그녀가 조용히 있자고 해서 틀자마자 껐다. Y는 네 캔을 더 마셨다. 그제야 그녀가 좋은 노래 좀 틀어보라고 했다. 플레이리스트의 1번은 니나 시몬의 ‘If You Knew’였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했는지 알았더라면, 당신이 오늘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가사. Y는 목으로 왈칵 튀어나오려는 탄식을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내뱉었다. 너무 정직해서, 또 너무 정직하지 않아서, 그 방황을 정직하게 보여주기 싫어서, 수백 번 수정한 편지를 읊었다. 읽지 않고, 인용했다. 고백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한 느닷없는 인용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요?”

“여행 가자고 한 거야. 널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게 아니고.”

“왜 하필 그럼 나였어요?”

“같은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 여행이니까.”그녀 때문인지, 여행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따로 이불을 깔고 누워서, 그녀는 등을 보이고, 그는 천장을 바라봤다. 잠이 들기 직전 가위에 눌렸는데, 한 대머리 아저씨가 천장을 떠다녔다. 가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급기야 마음대로 하라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소리를 질렀다. 설마 동경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지, 걱정하면서.대머리 아저씨를 탓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삶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 술과 방탕으로 점철된 남자의 이야기 또한 기시감이 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엔 어느덧 정신이 드는 부분이 있다. 오래전에 사놓고, 돌려서 보거나 앞부분만 보고 말았던 AV 타이틀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유명 AV 배우는 ‘내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주로 옴니버스에 나오는 덜 유명한 배우를 선호했다. 시각 장애인 안마사가 손이 아닌 다른 부위를 활용해 안마해준다는 설정의 그 작품도 그중 하나였다. 차례로 일곱 명의 배우가 나오는 데, 그는 예전에 사서 두 번째 배우까지 봤다. 컴퓨터가 친절하게 ‘이전에 마지막 재생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맥주 캔을 따고 앉아 세 번째 배우의 등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곧, 맥주는 그대로 두고 AV는 껐다.위키피디아에 들어가 세 번째 배우의 이름을 쳤다. 그녀의 프로필을 훑었다. 2005년에 데뷔했고, 아직 현역. 가슴은 85센티미터 D컵이며, 신장은 160센티미터, AV 배우 최대의 에이전시인 로터스 그룹 소속이다. 아직 솔로 작은 한 편밖에 안 되지만, 옴니버스 물에는 10여 편이 넘게 출연했다. 무엇보다, 성이 자신과 같았다. 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절망이나 당혹 같은 건 빨리 봐야겠다는 의무감 뒤로 전부 밀렸다. 다시 AV를 켰다. 이건 신이 그에게 주는 진통제 같은 것일까?

옷 위로 훑으면서 상상했던 것보다 가슴이 작았으나 상관없었다. 그는 커다란 가슴이나 좋아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일만 없다면. 아픔이 멎었을 뿐만 아니라, 완치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통제는 향정신성의약품이 되었다. 대여점에서 그녀의 작품을 전부 빌려봤다. 가끔 그녀가 AV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배경이 궁금했고, 여자가 대상화되는 과정은 얼마나 끔찍한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차인 게 다행’이라는 판단은 너무 추악하게 여겨졌지만, 이미 ‘몸이 바라는 대로’ 하는 엇비슷하게 추악한 짓을 하고 있었다. 마음은 불확실하고 몸은 돌진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안다 혹은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몸도 마음도 아니라 명명하지 않고 내버려둔 ‘순간’은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금세 지나간다.

지나가고 나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낄낄거리면서 몇몇 친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주절대고 다녔다. 그가 아는 한, 찾아보지 않고 무시한 사람은 없었다. 막역하게 지내는 동아리 출신 남자들은 모두 아는데, 여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우스운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남자들 사이에서 좋은 유머 소재로 쓰인다. 다만, 촌스러워 보일까 봐 그들에게 말하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 위키피디아에 나온 그녀의 프로필을 읽다가 한 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취미 항목에 ‘여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여행이었구나.” 인생은 여행이라는 빤한 비유가 떠올랐다. 대부분을 짧게 스치고, 좀 알 것 같으면, 멀어진다. 멀리서 보면, 웃긴다.

    에디터
    정우영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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