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부르고 싶은 노래

지금 가장 주목할 만한 인디 뮤지션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가수를 지명했다. 그들과 무슨 음악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 우선은 노래 한 곡을 생각해봤다.

트램폴린 – 장필순과 하덕규
얼마 전 늦은 밤 택시 안에서 ‘제비꽃’을 듣게 되었다. 조동진의 오리지널이 아닌 장필순의 커버였고, 한 번 들은 기억만으로 배부른, 그래서 반복해서 들을 필요조차 없는 버전이었다. 별다른 편곡 없이 그녀는 서늘한 목소리로 밤의 신비로움을 불어넣어 곡의 공기를 다르게 만든다. 그녀는 간결하고 무심하게 노래한다. 그런데 목소리에 안개 같은 게 끼어 있다. 현실의 뜨거움을 보여주는 풍요로운 목소리 보다는, 비어 있는 공간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목소리. 내가 프로듀스하고 장필순이 노래할 곡은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다. 20대 초반을 함께했던 이 곡을 항상 커버해보고 싶었고, 여자가 노래하는 걸로 상상해왔다. 하덕규의 여성적이고 소년 같은 목소리에 대항할 중성적이고 성숙한 목소리로서 그녀를 생각한다. 게다가 그녀는 하덕규를 잘 이해할 것이다. 이 곡의 서정을 낮에 꾸는 꿈이 아닌 밤의 그리움으로 바꾸고, 느리게 춤추며 부를 수 있는 곡으로 만들고 싶다. 트램폴린의 사운드와 리듬이 주는 몽환과 그녀의 서늘하고 안개 같은 목소리가 섞이는 것, 어떤가. 이미 그녀가 노래하며 춤추는 것까지 상상하고 있다. 아주 느리게, 자유롭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차효선(트램폴린 보컬/건반)

야마가따 트윅스터 – 이재민
“골목길에서 너를 기다리네 아무도 없는 뉴타운 골목길.” 노래 제목은 ‘뉴타운 골목길’ 아무도 없는 쓸쓸한 뉴타운 골목길은 주민들이 사라진 유령 마을의 일부다. 곧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 ‘너를 기다리는 나는’ 어쩌면 스토커로 주민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야마가따 트윅스터는 전자음악 듀오다. ‘개러지밴드(GarageBand, 애플사의 맥킨토시 컴퓨터에 내장된 음악제작용 소프트웨어)’를 가동시키는 맥북에어와 한 옥타브 가창력으로 노래하고 저질 퍼포먼스로 마무리하는 ‘한받’이라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타운 골목길’은 이재민의 80년대 히트곡 ‘골목길’에 대한 일종의 헌정이다. 야마가따 트윅스터는 맥북에어와 Casio CTK-630을 연주한다. 이재민은 로봇춤을 추고 노래한다. 야마가따 트윅스터의 의상은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복(안전모와 안전화 필수)이고, 이재민의 의상은 은빛 광채의 로봇 의상 더하기 테니스복이다. 디트로이트 생산기지에서 출고한 자동차 철제 프레임을 닮은 듯한 차갑고 강렬한 댐핑의 테크노 비트를 시작으로 불길한 단조 코드 진행의 신스 음이 깔리며 뉴타운 정책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골목길에 서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청년백수-스토커의 심정을 이재민의 청순한 듯 건조한 목소리로 읊는다. 신스 베이스 음이 어지럽게 주저부를 휘저을 즈음, 기존의 노랫말에 덧붙여서 다소 횡설수설하는 듯한 단말마적인 단어와 문장을 통해 노래하는 이의 심정이 기다리다 지쳐 미치기 일보 직전임을 암시한다. 그러다 청자 입장에서는 다소 갑작스레 느껴지는 후반부가 시작된다. 이것은 일종의 환상장면이다. 이재민이 로봇 의상을 벗으면 테니스 복장이 나오며, 공중에서 떨어진 테니스채를 들고 ‘뽕끼’ 가득한 건조한 목소리로 언젠가 우리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한다.(물론 이것은 눈속임이자 기만이자 사탕발림이다. 그것의 현시!) 장르로 보면 전반부는 디트로이트 테크노에 근접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영등포 테크노’, 후반부는 변함없는 짝수 비트의 이탈로 디스코. 이외에 생각해볼 만한 것으로 ‘구로동 테크노’, ‘가리봉동 하우스’, ‘목동 덥스텝’도 좋겠다. 한받(야마가따 트윅스터/아마추어 증폭기)

회기동 단편선 – 박은옥
‘박은옥’이라는 이름이 앞서 나오는 것을 본 적 없다. 이를테면 ‘정태춘, 박은옥’ 같이, 항상 남편인 정태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식. 음악적으로도 그녀는 내조의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다만 한 음악가로서 그녀의 다른 가능성을 가늠해보고만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이례적으로 정태춘이 동석하지 않았던─자신의 옛 인터뷰에서 “부부인데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음색 궁합이 잘 맞아서 가끔 듀엣곡을 불렀을 뿐”이라며, 또 “음반을 함께 낸 건 항상 같은 음반사와 일했기 때문일 뿐”이라며 은근히 자신이 ‘솔로가수’임을 강조한 바 있다. 어쩌면 그녀는 아직, 다만 ‘주체’로서 호명되지 않았을 뿐일지도. 1980년대와 2010년대. 애수 어린 슬로 템포 포크송과 음향적 폭력. ‘민중가요’ 진영이라는 장과 홍대 앞 로컬 신이라는 장.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장, 두 ‘언더그라운드’ 간의 만남. 이 협업의 시작은 ‘대화’와 그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대화로부터 서로 간의 유의미한 ‘간격’들을 채집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가령 (대화로부터 촉발된) 새로운 소품들, 그리고 ‘간격’에 관한 짧은 오디오 다큐멘터리 연작을 박은옥의 목소리를 통해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겹침 혹은 휘말림.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울. 모쪼록, 그것이 단지 꿈일지라도. 단편선(회기동단편선)

몽구스 – 양준일
양준일은 ‘가나다라마바사’라는 말을 사랑한단 뜻의 패스워드로 썼던 가수다. 1990년대 초 ‘리베카’와 ‘가나다라마바사 password’ 같은 히트곡으로 ‘반짝’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와 스타일은 한국 가요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보인다. 양준일에게 작사와 ‘느끼한’ 내레이션을 부탁하고 싶다. 몽구스가 반주를 포함한 멜로디를 만들고, 거기에 ‘가나다라마바사’ 가사를 썼던 감각이 더해진다면 기이하고 ‘쿨한’ 노래가 될 것이다. 1990년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글 가사가 낯설었겠지만, 지금은 일산에서 유명 토익 강사라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잘 익은 야들야들한 작사 솜씨가 나오지 않을까. 그는 출생 연도를 속여 2001년에 V2란 이름으로 10년 만에 컴백했다가 쓴잔을 마신 추억이 있기도 한데, 음악을 들어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고, 확실히 작곡보다는 작사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 음악에 대한 강렬한 마음도 분명 남아 있을 테고. 좋은 곡을 만든다면 함께 뭔가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양준일이 쓴 가사를 내가 부르고, 중간에 직접 그의 느끼한 목소리로 된 내레이션을 삽입하고 싶다. 몬구(몽구스 기타/보컬)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 이치현
어릴 적에, 가수 중에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혜은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엔 이선희, 그 다음엔 이지연이었다. ‘어떤 노래가 좋니?’라고 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 질문에 대답할 기호를 스스로 갖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이다. 올림픽 때 흘러나온 ‘손에 손잡고’에 울컥하기도 했고, 사촌 형 방에 있던 테이프에서 ‘스티비 원더’라는 이름을 외우기도 했다. 그러다 해석이 불가능한 이상한 제목의 노래가 히트했다. ‘집시 여인.’ 제목도 그랬지만, 그 사람들의 무대나 곡의 느낌은, 가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이국의 냄새였다. 지금은 한국 가요를 틀어주는 술집에 가면 늘 신청하는 곡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신세계였다. 그 곡의 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시도 때도 없이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걸 다시 해보고 싶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2집에도 같은 제목의 노래가 들어가는데, 어쨌든 이젠 나도 ‘끝이 없는 방랑을 하는’ 집시 여인이 외롭다는 걸 알겠다. 주변의 많은 여인들이 ‘집시’라는 것도 알겠고. 그걸 알았던 이치현 형님과 차례로 한 구절씩 각각의 ‘집시 여인’을 불러보고 싶다. 조웅(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보컬/기타)

모임 별 – 하리수
여러 이름과 느낌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난 5~6년 동안 공연 때마다 연주하던 ‘리듬 속의 그 춤을’의 김완선이 떠오르기도 했고, 언제나 한 번쯤 곡을 써보고 싶다 생각했던 이소라가 생각나기도 했다. ‘네 박자’에 필적하는 곡을 만들어서 송대관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기도 했으며, 코리아나, 소방차 그리고 밴드 백두산 등의 이름도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우리와 가장 어울릴 만한, 우리와 가장 많은 것을 이미 공유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가수는 바로 하리수다. 우린 그녀가 데뷔 전 활동했다는 한남동 클럽을 오래전부터 종종 찾아다니며 밤새 술을 마셨고, 그녀와 관련한 빛나는 전설을 들으며 가슴 설레였다. 지금 하리수는 7집 앨범을 낸 중견가수이며, 트렌드의 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교태 가득한 목소리와 요란한 비트의 댄스음악을 고수하는 아웃사이더다. 시대에 획을 그은 스타임에도 어쩐지 스타라고 하기엔 어색하며, 유명 가수임에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신의 대표곡 하나가 아쉬운 독특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우린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녀에게 언제 어디서나 사랑받을 만한 애절한 러브송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3일 전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메모지와 펜을 빌려 그녀를 위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술에 젖은 어쿠스틱 기타 연주 아래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울음을 삼키는 그녀의 음성을 떠올린다. 떠나간 남자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그토록 사랑하는 마음을 독한 술잔을 비우듯 담담하게 읊조린다. 올 9월이면 하리수가 데뷔한 지 정확히 10년이 된다. 그녀에게 선물할 곡의 제목은 ‘반지’. 조태상(모임 별 작곡/보컬)

DJ 소울스케이프 – 혜은이
“선생님 이 노래 너무 좋아해요.” “내가 이런 걸 했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60-70년대 뮤지션과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이 땅의 음악 환경이라는 것이 그랬다. 멋있고 신선했던 순간은 잠깐일 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서울에서 각박하게 지내면서 어떤 ‘아티스트리’를 지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기억조차 못하는 마다이다. 미리 자충수를 두고 들어가는 이유는, 이 글이 단지 환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실행에 옮겨야 하는(꼭와 함께) ‘현실적이어야만 하는’ 프로젝트를 향한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성인 가요’ 프로그램을 자주 찾아다닌다. 심지어 각 지방방송에서 주최하는 성인가요제 무대도 찾아간다. 하다못해 그런 현실감각이라도 있어야 채소가게에서 쇠고기를 찾다가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여전히 현역의 활력과 느낌을 풍기는 가수를 꼽는다면 혜은이다. 길옥윤 사단의 음반들은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프리 소울 계열로 분류되는데, 굉장히 한국적인 음색과 ‘쿠세’를 선보이면서도, 프리 소울의 핵심적인 음역대를 구사하는 혜은이의 목소리는 켈리 페터슨이나 브라질의 아나 마조띠 같은 캐릭터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디스코부터 부기-일렉트로까지 다양한 프로덕션의 맥락을 함께해온 그녀이기에 더욱 다양한 면모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윤석철 트리오나 세컨 세션 같은 리듬 섹션과 함께 길옥윤 작곡의 ‘청산별곡’을 커버하고 싶다. 박민준(DJ/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