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ing

용서 받지 못한 자

2011.06.07유지성

남자는 코골이가 섹스와 여자를 앗아갔다고 의심했다.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 무너진 건 남자였다.

A는 그림을 그린다. 화가는 아니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라 여겼다. 주로 사람을 그렸다. 외로워서였다. 목탄으로 그린 것 같은 삐뚤빼뚤한 선은 간혹 위태로웠지만, 자존심만은 꼿꼿했다. 외로움은 일종의 탐닉의 대상이었다. 자책할 생각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사람이 그립던 유학 시절엔 간혹 진통제를 먹었다. 의학적으로 검증된 내용이라며, 기분이 좀 나아진다고 했다.

주류는 아니었지만, 홍대 바닥에선 그의 그림이 꽤 팔렸다. 연애는 능란했다. 고독을 전염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성애를 자극하는 자기장에 가까웠다. 주변엔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주말 밤이면 A는 무제한 유레일패스를 지닌 베테랑 여행자 같았다. 키가 커서, 발목이 가늘어서, 두상이 예뻐서, 수염이 가지런해서…. 별의별 이유로 여자들의 구애는 끊이지 않았고, A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할증이 풀릴 시간이면 A의 머리맡에선 술잔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후기는 언제나 미담으로 남았다. 섹스가 끝나면 여자를 꼭 끌어안고 자서 아침이 오면 밥까지 먹고 헤어졌다. 여자는 이를 ‘매너’라 받아들였다. 볼일 끝나고 나면 첫차 시간부터 알아보는 졸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A의 사정은 좀 달랐다. 왁자지껄한 주말 밤엔 좀 더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같이 자는 게 욕정을 채우는 것 보다 더 좋을 뿐이었다. 대실은 몇 시간인지도 모르는 남자였다.

여자친구가 생기면 집을 드나들었다. 그곳에 산다고 하는 게 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유레일패스보단 시즌권을 선호하는 남자였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밤이 되면 문을 두드렸다. 겨울이 지나고 새 여자친구가 생기던 날, A는 장미꽃 대신 전동칫솔을 포장했다.

새 여자친구인 B도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취업 준비생이었다. B 의 집에선 낮밤도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섹스를 하고, 섹스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왕성하고 적극적인 여자였다. A와 B는 취향이 잘 맞았다. 어떤 날은 광화문에서 함께 본 <아이 엠 러브>의 잔디밭 섹스 신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침대 대신 카펫에서 형광등을 밝게 켜놓고 섹스를 했다. 여자는 좀 더 흥분했고, 남자는 깊이 잠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성기를 ‘지갑’이라 불렀다. 몸보다 말이 더 야한 여자였다. 몸이 야한 여자는 질리도록 만났다. 대화는 사정 후에도 질리지가 않았다. 가끔 여자가 서투른 불어로 속삭여줄 때, 지갑은 현금이 가득 찬 듯 부풀었다. 진짜 지갑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A는 여자의 집이 점점 더 아늑해졌다. 살림을 사고, 같이 사용할 선물을 고민했다. 고독은 사람만큼이나 공간의 문제였다. 진통제를 먹던 시절, 남자는 욕조에 이불을 폈다. 자궁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일 거라 짐작했다. 아침에도 해는 뜨지 않았다. 옆집에서 샤워기를 켜면 마침내 이불을 개고 물을 채웠다. 여자의 방은 A의 새 욕조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카펫 위에서 깊게 잠든 아침, 여자가 남자를 깨웠다.

“집에 안 가? 나 오빠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라서….”

A는 당황스러웠다. 이유는 잘 몰라도, 자존심이 상했다. 못하진 않았다. 여자의 허리가 몇 번이고 꺾인 밤이었다. 여자에겐 브런치 약속 같은 것도 없었다. 카펫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8일 만의 귀가였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A는 선천적으로 코골이가 심했다. 대학교 MT에서 진탕 술 마시고 잠든 후, 신나게 코를 골아 주변에 누운 여자 후배 전부를 깨운 건 교수님도 아는 무용담이었다. 바로 옆에 누운 사람 입장에선 미싱 돌아가는 소리, 경차 엔진 소리 정도는 충분히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고약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엔 늘 남자가 나중에 눈을 떴다. 대개 B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A는 그런 눈이 그저 토끼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심하게 토끼 머리띠나 상상할 동안, B는 말을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B가 몇 주 전 농담처럼 던진 “코를 냉동실에 얼려놓으면 좀 나을까?”란 말은 B의 추정에 약간의 확신을 보탰다. 남자는 더 외로워졌다. 정확히 확인된 건 없지만,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여자란 생각은 남은 주말 내내 그를 괴롭혔다. 웅크리고 있던 일요일 밤에 전화가 왔다.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간혹 섹스 파트너로 지내기도 했던 후배였다.

“지금 룸메이트랑 있는데, 룸메이트 보는 앞에서 야한 짓 할까?”

남자는 망설였다. B에겐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깨진 욕조를 고치러 갈 셈이었다.

“혼자 좀 있어야 될 것 같아. 오늘 할 일이 너무 많아. 청소도 해야 하고 월요일에 내야 하는 자기소개서만 세 개야.”

“나 외로워.”

“애처럼 왜 그래?”

A는 고독을 숨기진 않았지만, 그것이 미성숙과 동일시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B가 A의 방문을 사양한 건 처음이었다. 화가 났지만 이유를 물어보진 못했다. 쪼잔한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코를 골기 때문이라고 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A는 뭐든 도와줄 생각이었다. 청소는 물론이고 이력서 대필도 해줄 수 있었다. 방해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여자의 할 일이 끝나면, 같이 누워 자고 싶은 게 다였다. 후배의 전화에 잠시 흔들렸던 건 스리 섬에 대한 유혹 때문이 아니었다. 두 명의 여자를 안고 자면 덜 외로울 것 같아서였다. A의 의심과 자격지심이 우애 좋은 쌍둥이처럼 커져갔다.

B는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번번히 서류심사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럴수록 A는 B의 방 문턱조차 넘기 힘들었다. 남자는 여자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B는 예민해질수록 혼자를 택했다. 여자는 여행을 다녀오겠노라며 일본으로 떠났다.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도시를 다녀올 거라고 했다. A는 영화만큼도 위로가 안 되는 사람이란 사실에 더 작아졌다. 남자에겐 항공권 대신 유레일패스가 있었지만,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다. 코골이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구직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던 거라고, 돌아오면 다 원래대로 돌아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여자의 비행기는 연착되었다. 저녁이나 먹을 생각이었지만, 여자는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B는 A를 원했다. 역학관계상, 남자에게 모래주머니 같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찬스가 생겼다. 그러나 A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둘 다 몸이 먼저 달았다.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택시를 잡았다.

“오늘, 세상에서 제일 야한 섹스를 할 거야.”

여자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속삭였다. A에겐 꽤 따분했던, 여자가 좋아하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하는 대사였다. 남자는 택시 안에서 벌써 커지고 말았다. B가 없는 동안 한눈팔지 않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설마, 오늘까지 쫓아낼까. 다시 처음 같을 거라고, 그녀를 안고 잘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긴장하긴 했지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고 되뇌었다. 섹스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다. B의 집에선 짐도 안 풀고 침대로 올랐다. 여자가 먼저 애무했다. 습기가 가시지 않은 여자의 움직임이 예전보다 과감해진 것 같았다. ‘새로 사온 콘돔은 사과 맛일까, 딸기 맛일까. 고급 마취제가 발린 콘돔은 ‘느낌’은 그대로 두고 더 오래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A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과일을 떠올릴 동안, B는 한참을 밑에 머물렀다.얼굴보다 정수리가 익숙할 무렵,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 왜 안 서?”

남자는 목표를 향해 경쾌하게 튀어 오르는 대신, 난파선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A는 안 선다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자면서도 커지는 통에 돌아누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몸에 입술만 닿아도 일단 서고 보는 남자였다. 서로에게 처음 있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B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좀 더 밑으로도 내려가고, 손도 바삐 움직였다. 빠르게, 느리게, 뜨겁게, 차갑게, 아프게, 부드럽게…. 그래도 안 섰다. 서서히 여자의 몸에서 땀이 식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순간 같은 건 결국 오지도 않았다. 주문은 마음에만 걸렸다.

몇 주 후, 남녀는 헤어졌다. 꼭 섹스와 그 이후의 사정 때문은 아니었다. A는 끝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물어볼 수 없었다. 원망하거나 자조하진 않았다. 대신 엉뚱하게 솟아오른 건 고마움이었다. 지나간 ‘착한 여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욕조에 물을 채웠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