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란이 왔어요 1

애란이 왔어요 1

2016-02-18T13:53:06+00:00 |ENTERTAINMENT|

스물세 살인 2002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무수한 상과 상찬을 짊어진 채로도 무겁지 않다. 그러나 소설가 김애란은 어른이 되는 일의 간단치 않음을 말했다. 그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의 제목은 〈두근두근 내 마음〉이다.

원피스는 에트로, 선글라스는 페리 엘리스 빈티지.

원피스는 에트로, 선글라스는 페리 엘리스 빈티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김애란을 사랑하라”고 했죠. 2007년의 한 대담에서 소설가 이기호는 “누가 김애란을 미워할 수 있는 거야?”라고 했고요. 그때 당신이 이렇게 말해요. “사랑스러워서 죄송합니다.” 그 말의 자존감이 참 좋아서, 무슨 질문을 해야 이런 답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 말을 제목으로 하고 싶어서요.
하하. 저는 확신하고 하는 말이 별로 없어요. 대담할 때도 쩔쩔맸던 게, 나한테 무슨 ‘관’이란 게 있나?, 싶었거든요. 그냥 천둥벌거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배들 말에 한마디 보탠 것뿐이에요.

故 이주일 선생님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의 자존감과 익살이 겹쳐 보이더라고요.
그렇네? 몰랐어요.

혹시 평소에 죄송하단 말은 좀 하나요?
아니요. 제가 회사를 다녔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방 안에서 제 작업만 하다 보니 죄송한 상황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글쓰기라는 게, 꼭 나중에 문자나 이메일로 ‘죄송하다’는 문자 보내듯이, 대면한 채로는 미처 다 하지 못하는 말들을 기록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작가 분들 중에 그런 분이 더러 있죠. 하지만 저는 글에다 무슨 메시지를 담는 게 아니라서, 그런 경우는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야기라는 형식이었다고 생각해요? 등단할 때는 시도 냈다고 들었어요.
어디서 재미있는 얘기를 봤어요. 영화를 끝까지 다 보여준 집단과 영화를 중간까지 보여준 집단에게 나중에 스토리를 물어보면, 끝까지 안 본 집단이 더 그 영화의 내용을 잘 알고 있대요. 사람은 미완되거나 미결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잖아요. 말이 좀 낯 뜨겁긴 하지만, 우리의 일상이 그런 것들의 연속 같아요. 보다 만 영화, 완결되지 않은 영화를 경험하면서 사니까, 그때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미였나, 뭔가가 날 지나갔는데 그게 뭐지?, 궁금해하면서 질문을 하는 방식이 이야기란 형식과 잘 맞는 것 같아요.

당신에게 잘 맞는 형식이긴 하고요?
근데,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야기를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자신은 데뷔 때도, 지금도 없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나한테 흥미로운 일이 생기면, 그걸 잘 기억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이야기의 그릇을 만들고, 의미를 만들고, 그런 충동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김애란의 소설이 왜 김애란과 잘 겹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소설은 굉장히 사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질문을 던지는, 그것의 답은 아니더라도, 답이 없다는 것 정도는 발견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인 생각만도 아닌 것 같은 게, 당신이 <달려라 아비>이후에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아버지가 안 계시냐?”였다고 들었어요. 어쩌면 그저 소설이 절실하게 읽히는 탓인지도 모르지만요.
저도 모르게 마음에 든 멍이든, 제가 그렇게 지나온 환경이든, 어떤 영향인지 잘 모르겠어요. 거창하게 막 치유나 구원 이런 건 아니고요. 얼마 전에 일본에 지진이 났을 때,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딸 쓰시마 유코 씨가 쓴 칼럼을 <한겨레>에서 봤어요.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똑같은 재난에도 동물들이 훨씬 더 혼란스러워한다는 거예요. ‘지진’이란 말을 갖고 있지 않아서 요. 그 단어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 자체로, 상황을 바꾸진 못해도 상황을 좀 더 괜찮게 해 주는 게 있지 않나 싶어요. 어떨 땐, 다만, ‘그렇다’고만 해도 살짝 괜찮아지는 게 있어요.

소설가로서 말을 다루는 건 또 다르지 않나요? 말 나온 김에 ‘가족’이란 예를 들어보죠. 소설가가 되기 이전이랑 그 이후랑 ‘가족’이란 말이 다르게 다가오나요?
가족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시각이 바뀌는 건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나이가 더 큰 이유인 것 같은데요? 나이가 들고 바라보는 느낌은 좀 다르더라고요.

어떻게요?
옛날에는 좋아서 결혼하고 혹은 애기 낳으려고 결혼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옆에 누군가 두고 말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두근두근 내 마음>에서, 어른이라는 단어에서는 외로움의 냄새가 난다고 썼죠.
딱히 결혼이나 대화에 대한 환상이 있지는 않아요. 또 마음이 온전히 전달되는 충만한 대화 같은 게 실제로 있나 싶기도 하고요. 근데, 그렇지만, 글쎄요. 하하.

이번 장편에서 당신에게 닥친 문제는 ‘젊음’인 것처럼 읽혔어요.
여러 개가 있는데요. 젊음이기도 하고, 늙음이기도 하고, 아이와 부모이기도 하고. 그것들이 어우러져서 서로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였으면 했어요. ‘젊음’이 소설을 쓰는 계기 중의 하나긴 했죠. 어른들이 보면 막 까불고 있네, 하겠지만, 소설 중에 장씨 할아버지의 말처럼, 생물학적인 정점이 지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라는 생각요.

30대 초반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이 폭발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어른이든 나이든, 되게 관념적으로 느꼈어요. 그걸 보는 렌즈 자체가 다르니까 떠오르는 단어들도 그걸 벗어날 수 없었는데, 렌즈를 몸으로 바꿔서 보니까, 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