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눈물은 알고 있다

2011.09.02이충걸

E.L.

여자들이 우는 걸 볼 때마다 두 가지 점이 완전 놀라웠다. “어떻게 저렇게 광속으로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릴 수 있을까? 어쩜 그렇게 원도 한도 없이, 있는 힘을 다해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까? 아, 나도 저렇게 모든 걸 초월하고 해탈한 감정 한번 느껴봤음 좋겠다야”, 그랬다. 그런데 이젠 어떻게 된 건지 TV만 틀면 우는 남자들이 나온다. 아니, 남자가 더 운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는 눈물 아니었나? 눈물은 여자만을 위한 갑옷 아니었나? (솔직히, 남자는 화를 내고, 여자는 눈물로 원하는 걸 웬만큼 취했다는 편견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운다 한들 평생 세 번이라는 이대엽 시절의 주먹 영화 같은 말은, 진짜 그보다 더한 폭력도 없을 테다. 어쨌든, 우는 남자가 새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 눈물이 남자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 것이다. 안구가 애매하게 붉어지거나, 슬쩍 눈물 한두 방울 듣거나, 떨리는 윗입술로 휴지를 찾는 남자는 당장 추앙받는다. (근데 카메라도 켜져 있고, 다들 말짱한 눈으로 보는 앞에서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있는 걸까?) 거기다, 대차게 울부짖거나 오지게 포효하고 나면 폭풍의 후일담이 국토를 적신다.

그 초인적인 페더러가 호주 오픈 우승 당시, 울지 않으려고 기와 묘를 다하다가 결국 아랫입술을 씰그러뜨리며 눈물에 굴복하는 걸 보았을 때, 역시 세상을 두 그룹으로 나누는 건 참 재미있는 방식이구나, 했다. 우는 남자 운동선수는 영웅일 수도, 찌질이일 수도 있다. 카리스마 강하거나, 여편네 같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울지 않는 남자 운동선수도 마찬가지다. 우는 모습을 카메라에 결코 찍히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눈물은 이미 알고 있다.

원래 인간이란 눈물을 흘리는 동물이다. 눈물은, 논리와 관련된 뇌의 대뇌피질, 감정과 이어진 대뇌변연계가 연합해 떨구는 것이다. 그러니까 눈물은, 실은 지금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눈물을 경험과 추억과 상처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이 운다. 눈물샘의 구조가 달라서인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가해의 정도에 더 큰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무튼 눈물의 양, 우는 시간, 횟수, 강렬함이 훨씬 더하다. 배란기나, 결혼식 같은 감성적인 순간, 공포나 수치심이 임계점으로 치솟는 찰나에 이르면 열거한 가짓수의 총량이 8배나 늘어나기도 한다.

남자를 울게 하는 원인은 좀 복잡하다. 남자를 울릴 수 있는 단 하나는 향수鄕愁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모든 ‘남성적인 남성적인’ 경험, 그러니까 명예와 수치, 출생과 죽음, 기쁨과 용서, 패배와 승리의 순간에 남자는 운다. 감정이 변해간다는 걸 알 때, 몸의 경험으로 지금 목이 멘다는 걸 인지할 때도 운다.

<남자의 자격>을 볼 때도, 누군가에게 명치를 걷어채었을 때조차 울지 않는 남자라도, 운동선수가 육체적 극한에 도달한 모습을 보면 운다. 물론, 한국 축구가 이탈리아에 이겼을 때 우는 남자를 여자가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 것이다. “너, 나랑 헤어졌을 때도 안 울더니 어떻게 축구 하나 때문에 그렇게 울 수가 있니? 오차원!” 여자는, 스포츠의 진짜 하이라이트엔 기대나 복잡한 감정이 따르지 않는다는 걸 잘 모른다. 그런데 남자도 여자가 울 때 제일 무섭다. 무서워서 당황하다가, 급기야 화를 낸다. 심지어, 저거, 공갈로 우는 척하는 거 아냐? 얕은 의심을 오지랖 넓게 흩뿌린다. 두려움 때문에. 여자를 언제 울릴지, 무엇이 그녀를 울리는지, 또 얼마만큼 울지 전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여자의 눈물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남자들은 통 모른다.)

눈물은 몸의 파이프를 청소해준다. 가슴 엄청 아픈 눈물, 고귀한 눈물, 자기연민의 눈물까지 가지가지지만, 속에 쌓이고 쌓인 나쁜 것을 씻어주는 데는 별 차이 없다. 하긴, 압박이나 강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밸브의 꼭지를 느슨하게 돌리면 샤워한 것처럼 시원해지긴 할 테다. 운다는 행위는 감정의 변비를 해소시켜 주는 관장 같은 거니까.

나도 가끔 울었다. 심장에 마이크로 칩이 박히거나, 탈수됐거나, 안구건조증이거나, 눈물샘이 아예 없거나, 꼭 자기만 아는 인간은 아니니까. ET의 손가락이 처음 빛을 밝혔을 때? 당연히. 과학자들이 그를 생포했을 때? 두말하면 잔소리. 자전거가 하늘을 날아오를 땐? 실성할 뻔했다. 심지어 스머프 시리즈를 볼 때도 그랬다. 기억할 만한 좌절이나 고통이 없어서 그런 캐릭터에 빠졌던 걸까. 하지만 영화를 보며 우는 건 인생의 필연적인 고통에 대비하는 고유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찔찔 짜는 건, 어쩌면 감정 이입을 위한 훈련일 것이다. 언젠가 식물인간이 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와줘야 할 때가 온다면, 그 영화를 기억하며 좀 더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서도 심드렁했던 뒤로는 웬만해선 안 울었다. 울 일이 없었다기보다는 역시, 남이 보건 안 보건, 내 자신이 보건 안 보건, 남자가 우는 건 생애 최고의 용기가 필요한 일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창피한 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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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GQ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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