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이 돌아왔다, 양손에 〈유홍준의 국보순례〉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이라는 책 한 권씩을 들고서. 그의 저술을 둘러싼 논란도 함꼐. 다시 답사가 시작됐다.

1990년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은 찬란한 문화재가 무더기로 발굴된 것과 비견될 만한, 일종의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외국 문화유산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존재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앙상하게만 여겨지던 국내 문화유산들에 대한 재조명, 재인식은 교양인의 지표가 되었다“. 그가 좋다고 말한 곳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가 느낀 것과 똑같이 느끼고자 했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던 것은 비단 소설가 박완서만 겪은 증상이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그의 호소 내지 도발은 당대의 경구였다.

그렇게 무수한‘ 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교주가 어느 날 갑자기 제단에서 사라졌다. 관성에 따른 글쓰기를 자제하고 전공 연구와 저술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홍준교’는 서서히 빛을 잃는 듯이 보였다. 급기야 문화재청장으로 변신한 그에게 일련의 비난이 따라붙었다. 국보인 경복궁 경회루를 국제검사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대여했고, 효종대왕릉 재실에서 국회의원, 지자체장들과 함께 화기火器를 동원한 오찬행사를 벌였다. 문화재보호법 위반이었다. 문화재청이 세금으로 구입한 증정용 도서 중 그가 쓰거나 감수한 책이 적잖이 포함되어 구설에도 올랐다.

숭례문 방화사건이 터지자 그에 대한 세간의 비난은 극에 달했다. 공교롭게도 사고 당시 그는 민간기업 협찬으로 부부동반 외유 중이었다. 화재의 대처 과정과 관련해서는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이 볼썽사나운 책임공방을 벌임으로써 가뜩이나 부글거리던 민심에 불을 질렀다. 당시 모 일간지 사설은“ (원래) 문화재 보호의 총사령관 격인 그는 문화재 보호보다는 훼손 전력으로 더 유명하다”며 비꼬았다.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문화재청장 역임이 외도가 아닌 인문학자로서의 실천이었다고 자평하지만, 공직의 이력이 그에게 어느 정도 상처로 자리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2009년부터 최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원고를 엮은 것이다. 조선일보 연재 첫 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숭례문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직에서 사임한 이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에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왔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나의 본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글쓰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이제 국보순례 길에 나서게 됐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숭례문이 되었다.”

전권들과 1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발간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은 저자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풀어놓고 있다. 책의 초반 네 꼭지는 모두‘ 경복궁’과‘ 광화문’에 할애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이번 책이 그의 공직 경험에 크게 연루되어 있다는 방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책 곳곳에서 모종의 해명 욕구가 읽힌다. 특히 그는 재임기간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화재의 개방과 활용에 대한 소신을 상세히 피력한다. 그런데 사실 유홍준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공직과 상관없이 그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부터 있었다. 이는 도올 김용옥도 줄곧 겪고 있는바, 이른바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입지에 걸맞은‘ 학자로서의 전문성’에 관한 것이다. 저자 스스로 가장 큰 애착을 가진 역작 〈완당평전〉은‘ 무림고수’들로부터 2백군데가 넘는 오류를 지적당했다. 세 권으로 나왔던 기존의 책이 절판되고 2006년에 한 권으로 요약되어 다시 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화인열전〉과 〈완당평전〉의 서평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틀린 곳이 너무 많아 서평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고서연구가 박철상은 유홍준이“ 전서篆書와 예서書도 구별 못한다”며 그의 학자적 자질을 근본부터 의심했다.

한편, 유홍준이 왜 하필 〈월간 중앙〉이나 〈조선일보〉 같은 보수 지면에 글을 연재하느냐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공직자의 신분으로 북한찬양가를 부르고,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는 이유로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려고 했던‘ 종북좌파인사’의 글을 보수지면에 허락하느냐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내게 원고청탁을 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가 이뤄온 성취에서 그의 정치적 취향이나 지향은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연구실과 강단을 벗어나 직접 발로 뛰며 살아 있는 미술사를 쓰는 걸출한 저술가로서 온전한 이름을 얻었다. 수시로 논란이 되고 있는 학문적인 오류에 관한 한 그는 부지런한 자문과 개보정으로 보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는 도록 속에 박제된‘ 유물’을 생활 속에서 즐길 만한‘ 문화’로 바꾸었다. 그렇게 발굴된 혹은 복원된 문화적 자부심이야 말로 애초에 그를 교주로 옹립한 힘의 근원이었다.

스스로 비유하고 있듯 유홍준은“ 선수권대회의 지정 종목 같은” 미술사의 딱딱함과 엄숙함에서 벗어나“ 갈라쇼 같은” 문화유산 축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문화재와 미술사를 다루되 시사와 유행의 코드는 물론 문학적 수사와 다양한 인문학적 참고 목록을 스스럼없이 동원했다. 그의 글쓰기를 두고‘ 딜레탕트’ 내지 문학청년의 호사 취향쯤으로 폄훼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유홍준은 파놉스키가 제시했던‘, 인문학의 실천으로서의 미술사’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화유산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포착해 알기 쉬운 언어로 소개하는 능력과 함께 그의 글쓰기를 더욱 빛나게 하는것은 역사와 문화재에 사람 냄새를 입힐 줄 아는 특유의 따뜻함과 발랄함이다. 그는 최근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화유산을 하나의 물질로만 보면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과 같이 어우러졌던 인간이나 에피소드는 유물과 유적을 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이야기의 힘을 알고 활용할 줄 아는‘ 인문학자’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성격상 나열적이고 지루한 편람이나 도록이 되기 쉬운 내용을 저자 특유의 감성적이고 해박한 글쓰기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각색해 어엿한 대중서로 안착시킨 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우리 문화재의 존재 자체가 역사 속에, 또한 동시대에 활약/암약하고 있는 무수한 고수들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문화재는 사람의 자취라는 얘기다.

유홍준의 귀환은 성공적이다. 재개된 그의 대중 강연은 연일 만원 행진이고, 언론들은 앞다퉈 그를 다시 만나고 있다. 5권까지 2백60만여 권의 판매량을 기록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경우 6권이 출간되는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1~5권의 개정판도 제2의 바람몰이를 노리고있다. 그는 앞으로 중국과 일본의 우리 문화재까지를 대상으로 한두 권의 답사기를 더 쓸 예정이다. 〈완당평전〉 〈화인열전〉 류의 예인 전기도 더 쓰고 싶다고 밝힌다. 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사명감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미술사강의〉의 완간이다. 본격적인 미술통사 시리즈로 기획되어 지난해에‘ 선사, 삼국, 발해 시대’를 다룬 첫 권을 냈다‘. 갈라쇼’만이 아니라‘ 정식 종목’으로도 인정받겠다는 뜻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는‘ 학자적 자질 논란’에 대한 심리적 반대급부일 것이다. 정년을 앞둔 그가 스스로도 고백한 바 있는‘ 학자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이다. 하지만‘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는 갈라쇼의 영역을 상대적으로 소홀히하다가 끝내 봉인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것이다. 유홍준에 대한 판단이 확정적일 수 없는 이유다.

SHARE